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10화(110/1105)
110회
26. 공작님과 2황자 (5)
내 자리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있노라니,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으며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잠시를 못 참고 세르펜스가 서류를 처리하는 소리다.
“대체 왜 이렇게 침착한 겁니까! 함정에 걸린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흥분하셨던 겁니까?”
‘고작 이 정도로?’라고 묻는 듯한 어투였다.
“마사날 백작을 바로 잡아 들였다 하더라도, 제대로 심문을 해보기도 전에 자살 등으로 꾸며서 죽였을 거다. 그랬다면 그쪽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테지만, 아무것도 드러나는 것 없이 끝났겠지.”
동문서답이 따로 없다. 누가 뒷조사 못한 게 아쉽다고 했나?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저쪽에서 일부러 밝힌 것이긴 하나, 아르젠토 공작가가 엮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나름 큰 수확이다.”
“아, 쫌! 그게 아니라 세르펜스를 걱정하는 거잖아요!”
황위 계승권이 현상 유지되는 것을 바라고 움직였으니, 쟁탈전에 뛰어든 거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나라를 분열시키고 좀먹는 놈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 목적 아니던가.
‘그런데 그거 가지고 세르펜스가 제국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는 놈으로 몰아가?’
더군다나 처음부터 프라시더스 가문을 노렸다는 얘기인데, 당연히 걱정이 앞설 수밖에.
만약 황제가 그딴 소리를 믿고 세르펜스를 축출해 내려 한다면···.
‘유지스에게 부탁해서 아르케 왕국으로 망명할까?’
세르펜스는 엘프가 아니지만, 웬만한 엘프보다 예쁘니까 명예 엘프로 받아 줄지도 모른다.
“공작 가문에서 황위 계승 문제에 끼어들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행에 불과하다. 대놓고 끼어든다 한들, 직접적인 해는 없을 거다. 또한, 이미 황태자에게는 정혼자가 있으니 후대의 권력 구도에도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할 테고.”
워낙에 그가 태연하게 말해서 그런가,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번 건은 어디까지나 견제에 불과하다. 벌써 아르젠토 공작가라는 패를 꺼내 든 것도, 이쪽을 묶어두려면 같은 공작가쯤은 되어야 할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세르펜스가 읽던 서류를 한 장 넘겼다.
“그럼 이제 어쩌실 건데요? 아르젠토 공작을 직접 만나볼 겁니까?”
“그 전에, 2황자를 다시 만나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
다음 연회까지는 한 달의 시간이 남았으니, 이번에는 정식으로 알현 신청을 넣으려나?
“당신의 말대로 다른 이들이 보기에 나와 그자가 친근해 보여서, 그자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을 알고 덫을 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자가 직접 그런 짓을 꾸민 건지.”
“네?!”
지금 말한 그자가 2황자인 프레드릭을 말한 것이 맞는지, 세르펜스의 말을 다시 곱씹어봐야 했다.
‘진짜 가차 없이 안 믿는구나?’
그나마 신성력 스캔을 하지 않은 것은, 프레드릭 또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기에 흑마력이 검출될 리 없기 때문에 불과했나보다.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지. 하지만···.’
세르펜스를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있다 말하던 프레드릭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아닐 것 같은데, 세르펜스의 말 때문에 괜히 그것조차 연기였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런 게 퍼져 물타기가 되고, 선동과 날조로 이어지는 건가.
“선우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요?”
“이 세상에 선우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달리 있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를 지칭한 것을 알면서도 그의 물음에 반문을 표한 것은 어디까지나, 세르펜스가 이런 문제에 내 의견을 물어올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세르펜스도 답을 골라내지 못한 것을 내가 이거라고 짚어낼 능력은 없었다.
[성검의 주인]과도 전혀 다른 상황이니, 참고도 안 된다.내가 낼 수 있는 의견이라고는···.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고. 만약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전자, 그러니까 관계를 이용한 제삼자가 있다는 쪽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것뿐이지,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요?!”
“그 경우, 여차하면 2황자를 교단에 귀의시키는 방법을 쓸 수도 있으니.”
“······.”
세르펜스가 그럼 그렇지.
순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동의를 표한 줄 알았다.
내 메마른 눈빛을 인지한 것인지, 그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계속 교단에 두자는 것은 아니고, 그저 모든 일이 끝난 후 황태자가 돌아올 때까지만이다. 그 뒤로는 자진해서 파문당하면··· 이 얘기도 아닌가.”
여전한 내 시선에, 그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프레드릭의 혼사 문제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면, 그것을 해결하기에 세르펜스가 제시한 방법만큼 유효한 것은 없겠지.
신 룩스메아를 모시는 신관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불경했지만, 대륙의 미래를 위한 것이니만큼 룩스메아도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 주겠지.
나중에 프레드릭이 교단을 벗어나려 할 때 여러 말이 나오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할 문제.
“세르펜스의 의견에는 이견(異見)이 없긴 한데, 그런 얘기가 나올 줄은 몰라서···.”
“그렇다면 선우, 당신은 왜 그쪽이 낫다고 생각한 거지?”
오랜 사이니만큼 그가 프레드릭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더라도 그런 가정을 떠올렸을 때, 무의식적으로 일말의 배신감 정도는 느낄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나 보다. 그렇다고 선택을 정정할 생각은 없다.
“배신당하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아, 물론 세르펜스가 그를 믿지 않고 있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그냥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남의 친분을 이용하던, 자신의 친분을 이용하여 뒤통수를 치든. 양쪽 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아주 악질이다.
그중에서 굳이 앞에 있는 것을 선택한 이유는, 이제 막 인간관계를 배워가기 시작한 세르펜스가 친근과 호의에 더 이상의 경계심을 갖지 않았으면 해서다.
안 그래도 높은 벽이라, 더 높아지면 아무도 못 오른다.
“···그런가.”
세르펜스가 알듯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얘기는 그것이 끝인지 그는 묵묵히 서류를 처리해갔고, 나도 시선을 책상 위로 옮겼다.
이제는 익숙해진 행정용어들이 가득했다.
* * *
세르펜스가 넣은 알현 신청은 빠르게 수락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프라시더스 공작!”
우리가 2황자궁의 응접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프레드릭이 안절부절못하며 세르펜스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금세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면목이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하는 세르펜스의 모습에 프레드릭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아닙니다, 제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사과를 해오는 프레드릭에게 세르펜스가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댔다. 그로 인해 프레드릭이 더욱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선은 앉으시지요.”
그는 세르펜스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신 또한 자리에 앉았다.
세르펜스가 궁에 도달한 시간을 바탕으로 계산된 것인지, 때마침 시녀가 들어와 둘의 자리 앞에 찻잔을 놓고 알맞게 우려진 찻물을 따랐다.
이어, 찻주전자를 소리 없이 내려놓은 시녀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남은 사람은 2황자와 세르펜스, 이전에 보았던 시종과 나. 도합 네 명뿐.
또다시 두 명의 상관은 자리에 앉고, 나와 시종은 서 있는 장면이 연출 되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저야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보다 공작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한가하게 예의를 차리는 세르펜스의 태도에 프레드릭이 더 안달을 냈다.
내가 보기에는 자기 때문에 세르펜스가 곤경에 처한 것 같아 미안해 죽으려는 것 같은데, 세르펜스는 무언가 찔리는 게 있어서 저러는 건가 싶은 마음으로 차분하게 프레드릭을 살펴보는 듯했다.
“정말 괜찮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르펜스가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천사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고 있노라면 속세의 근심 걱정이 사라질 것 같은 얼굴이다.
그 표정 덕에 프레드릭 또한 간신히 안정된 듯하다.
“저 때문에 공작의 신분으로 황위 쟁탈전에 손을 대었다는 불명예를 얻게 되신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노심초사하며 말하는 프레드릭의 말에도 세르펜스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황위 쟁탈전이 성립되었을 때의 이야기 아닙니까.”
너만 잘하면 그런 불명예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니,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라면 말로만 하지 말고 제대로 처신하라는 소리다.
그 뜻을 이해했는지, 프레드릭이 ‘아-!’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직도 접근해 오는 이들이 많습니까?”
“수는 거의 정리되었고, 대신 남은 이들이 꽤나 끈질겨서 그게 좀 거슬릴 뿐.”
자꾸 번거롭게 구는 그들도 짜증 나고, 공연히 자신을 도우려던 세르펜스까지 난처해졌다 여긴 탓일까?
프레드릭이 조금 신경질적인 투로 말했다.
“남은 가문이 어디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세르펜스의 질문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에게 손짓했다.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한 것인지, 시종은 바로 작은 수첩을 꺼내어 세르펜스에게 건넸다.
“방문 기록을 정리해 둔 겁니다.”
그 말에 세르펜스는 받아 든 수첩을 바로 펼쳐보았다. 수첩 안쪽에 흘깃 시선을 두니,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쓰인 것이 가까이서 보지 않는 이상 읽기도 힘들어 보였다.
세르펜스가 그것을 훑어보는 동안 프레드릭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잘 알겠습니다.”
그것을 끝까지 확인한 세르펜스가 수첩을 다시 건네려 하자, 프레드릭이 자신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편이 유용하게 쓰일 거라며 거절했다.
‘이걸로 제국에 해가 될만한 가문들을 골라낸 셈인가?’
예를 들면 복권 같은 거다.
그동안 프레드릭에게 몰려들었던 이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복권을 사긴 했지만, 그냥 소소하게 일주일에 5천 원씩 자동으로 로또를 구매하는 가벼운 마음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로또 번호 분석 사이트에 가입해서 돈을 내고 번호를 발급받는다거나, 과거 당첨 번호를 기준으로 통계를 내어 확률을 계산해본다거나.
복권에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라 보면 되겠지.
여차했을 때, 제국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욕심을 차릴 놈들이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도움은 제가 받고 있는데, 그리 말씀하시니 참···.”
프레드릭이 민망하다는 듯 괜스레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이건 최후의 수단이나, 정 힘드시다면 잠시 교단에 귀의하시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잠시라면···.”
세르펜스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그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결론을 내렸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최후로 둘 필요가 있습니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기보다는, 지금 바로 그 수를 써먹겠다는 얘기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아도 여차하면 억지로라도 교단에 집어넣었을 거면서, 세르펜스가 놀랐다는 듯 되물었다.
“물론 바로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어깃장만 놓겠다는 얘깁니다.”
지금처럼 결혼을 강요하면 교단에 들어가 버리겠다고 공식으로 발표라도 하려나?
그것만으로 그들이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기껏 몰아 가던 사냥감이 도망가버릴지도 모르니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덤벼들지는 않으리라.
좀 더 시간을 갖고 천천히 접근하려 하지 않을까?
장기전이 될 테니 그동안 아르젠토 공작가문이 어째서 움직인 것인지, 차분하게 조사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네, 이해했습니다.”
세르펜스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