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9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94화(1094/1105)
1094회
103. 공작님과 황제 (15)
* * *
놀랍게도 세르펜스는 고작 하루 만에 국어사전을 세 번 정독하고 열 번 속독하더니, 사전의 내용을 달달 외워버렸다.
본인 말로는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단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이름 등, 필요 없는 단어는 배제하고 외웠다는데···.
‘혼자서 쓸모없는 단어를 분류해 낸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잖아?!’
어순은 이미 내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읽고 통달한 상태였으니.
고작 말투만 몇 번 교정해 줬을 뿐이건만, 녀석은 원어민 뺨을 맘껏 후려칠 수 있을 정도의 한국어 구사 능력을 갖추었다.
과연 내가 이 아이의 천재성에 걸맞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까?
혹여 내 평범한 교육이 이 아이의 천재성을 묻어버리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
그렇게 천재 아이를 둔 평범한 보호자의 고뇌에 빠져들고 있을 무렵, 세르펜스가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여 말을 걸어 왔다.
“<선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천재 아이 교육법에 관한 고찰?>”
“<왜 그런 고민을 하지? 선우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컸는데.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세르펜스가 양손을 턱밑에 받히고 예쁜 얼굴을 자랑하며 예쁜 말을 했다.
이럴 때면 정말 아이 키우는 보람이 넘친다.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어 줬고, 세르펜스는 헝클어지다 못해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도 좋다고 헤실헤실 웃었다.
‘그런데 황제누스 얘기는 언제 꺼내야 하지?’
어차피 세르펜스는 생각을 통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으니, 녀석이 한국어를 듣고 이해할 수준만 되면 바로 얘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고작 하루 만에 한국어를 통달해 버렸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했다.
세르펜스의 뛰어난 천재성에 감탄하고 예쁜 말에 감격하여 들뜬 나머지, 녀석의 기분을 너무 띄워 줘 버린 것이다.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어떻게 황제누스에 관한 화제를 꺼내란 말인가?
그건 휴마눈새도 못할 짓이다.
‘황제누스는 끼어들지 않는 건가? 세르펜스한테 새로운 언어를 습득한 것에 대한 축하의 말이라도 건네며, 친한 척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나는 혹시나 싶어 황제누스를 쳐다보았다.
황제누스는 아련한 표정으로 말없이 나와 세르펜스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명상을 참 자주 하네···?’
원래 현재누스도 명상을 자주 하긴 했다.
꿈을 통해 습득한 2회차의 전투 경험을 온전히 소화하고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했으니까.
익숙한 장면이었기에 황제누스가 명상에 잠겨도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런데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현재누스처럼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거나, 신성력을 세밀하게 다루는 연습이라도 하는 거라면 다행이지만···, 현재누스의 자아를 찾아내 강제로 합쳐버릴 작정으로 저러고 있는 거면 어쩌지?’
물어봐도 사실대로 말해 주리란 보장이 없으니 물어볼 마음도 안 생긴다. 아니, 사실은 그냥 대화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황제누스와 한 번쯤 얘기를 나누긴 해야 할 텐데.
그 필요성은 통감하고 있으나, 아직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핑계로 자꾸만 미루게 된다.
‘오늘 중에 뭐라도 하나 끝내 놓자. 세르펜스와 황제누스에 관한 얘기를 하든, 황제누스에게 태도를 바꿔 보라고 설득을 하든···.’
그렇게 오늘의 목표를 세우고 있는데 황제누스가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생각을 하는 동안 무심코 그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을 느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약 5초가량 가만히 내게 시선을 주다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
“할 말이 있으면 쳐다보지만 말고 그냥 하게나.”
“어, 그게, 있긴 있는데···.”
목표를 세우기가 무섭게 이렇게 달성 기회가 주어지다니 하나도 안 기쁘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속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불만을 터트리며, 슬쩍 곁눈질로 세르펜스의 상태를 살폈다.
황제누스가 말을 건 대상은 녀석이 아닌 나였고, 말을 꺼내기 전에 5초가량 시간을 둔 덕분인지 놀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굳은 표정을 통해 세르펜스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려던 그때.
“꽤액!! 집중해, 집중! 카펫에 불이 붙을 뻔했잖아?!”
윈스톤의 머리 위에 앉아있던 꽥꽥이가 노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탁탁 발을 굴렀다.
달리 표현하자면 윈스톤의 머리통을 넓적한 오리발로 탁탁 쳤다는 뜻이다.
꽥꽥이와 계약한 후 윈스톤의 오러는 불 속성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신성력과 비슷하게 흑마력과 마기를 정화하는 힘이 깃들었다.
아무튼 새로운 힘을 얻었으니 그것을 통제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이런 실내에서 익숙하지도 않은 불의 힘을 다루다간 화재로 번지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꽥꽥이가 화재 예방 도우미 겸 윈스톤의 수련을 봐 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 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황제누스가 말을 꺼내니까, 세르펜스가 걱정돼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나 보네.’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덕분에 경직된 분위기가 풀어졌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돌려 황제누스를 바라보았다.
“휴마누스, 일행들한테 사과할 생각은 없어요?”
“사과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네. 하지만 그들이 과연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받아줄지는 의문이군.”
어떻게 들어도 진심을 담아 사과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황제누스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세르펜스를 쳐다본 것이다.
딱히 노려본 것도 아니건만, 세르펜스는 마치 위협이라도 당한 것처럼 잔뜩 긴장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황제누스가 다시 시선을 내 쪽으로 옮겼음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손을 꽉 잡아주자 그제야 세르펜스가 움츠렸던 몸을 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일행들과 잘 지내라고 말하는 거라면, 세르펜스의 저 태도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딱히 그를 책망하는 것은 아니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 세르펜스가 저러는 거겠지. 나는 이제 평판 따위 신경 쓰지 않기로 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네만, 자네는 상당히 신경 쓰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황제누스가 현재누스의 의사는 확인해 보지도 않고, 남들이 뭐라 하든 내키는 대로 행동하겠다는 소리를 해댔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뭣 모르는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든 말든 신경 끄고 싶다.
하지만 그 결과 욕을 먹는 건 나 한 사람이 아니라 일행들 전체고, 그게 사회적 분위기와 사람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니까 어쩔 수 없이 신경 쓰는 거다.
‘근데 성검의 주인이 그걸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다고 남의 말에 휘둘리는 게 좋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남들이 비난할지라도 그들을 포함한 이 세상을 지키겠다.’와 ‘어차피 인간들은 글러 먹은 존재니까 무시하고 내 할 일이나 하자.’는 천지 차이다.
당장 저 생각을 뜯어고치는 건 요원한 일이니 접근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휴마누스, 세르펜스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염치로 그런 마음을 품겠나?”
“그렇게 염치를 따질 거면, 세르펜스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분위기부터 만들어주는 게 어때요?”
“그래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조용히 지내고 있지 않나?”
세르펜스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서, 세상을 두 번이나 말아먹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아니, 대화를 통해 풀어나갈 생각을 해야지! 닥치고 있으면 문제가 해결된답니까?! 물론 휴마누스가 입을 열 때마다 세르펜스가 불편해하기는 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 그렇다고 아예 대화를 포기해 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나도 이게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에게 내 사고 방식을 강요하게 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짓 하기만 해 봐요,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하하하하!”
내 말에 황제누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어서 웃는 것 같지는 않고, ‘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하는 조롱이 담긴 듯한 웃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기만 한 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일단 말은 내뱉었는데 구체적으로 뭘 어찌할지 계획 세운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세르펜스에 관한 건 일단 넘어갈게요.”
“넘어가면 안 되는 문제 아닌가?”
“그러니까 ‘일단’이라고 한 겁니다. 이따 세르펜스와 대화를 하고 나서 다시 얘기를 꺼낼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요.”
“알겠네.”
황제누스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반응을 보인 쪽은 세르펜스였다. 녀석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어 불만을 내비쳤다.
내가 국어사전을 꺼내준 게, 황제누스에 관한 얘기를 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눈치채서 이러는 걸 테다.
나는 세르펜스의 손등을 토닥여 녀석을 달래는 한편 황제누스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보다 일행들한테는 왜 그렇게 모나게 구는 겁니까? 윈스톤이야 이전 회차에서 적으로 만난 사이라지만. 유지스와 푸로르, 리에나, 아니마는 소중한 동료였잖아요. 2회차의 인격이 사라졌다 해도, 그 당시의 기억과 감정들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거 아니었어요?”
“현 시간대의 그들은 두 번째 회차와 달리 큰 위기를 겪지 못한 탓인지, 강해져야 한다는 간절함이 부족하니 이렇게라도 자극을 줘야지 어쩌겠나?”
설마설마했는데, 아니길 바랐던 이유가 황제누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현 회차의 성검 일행이 ‘각성 이벤트’를 겪지 않았고, 그로 인해 이전 회차보다 약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각성 이벤트가 반드시 필요하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아니마만 해도 에드나와 함께하며 합동 마법이라는 강력한 기술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길은 하나가 아니다.
굳이 벽에 부딪혀가며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지 않더라도, 멀리 돌아간다든가 사다리를 만들어 넘어간다든가.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계의 벽을 넘을 수 있을 텐데.
애초에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것도 황제누스의 주관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의 시련을 극복하는 것과 내부의 동료에게 상처되는 말을 듣는 건 다릅니다. 휴마누스가 한 건 성장을 독려하는 채찍질이 아니라, 그냥 본인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에 지나지 않아요. 자극을 받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병들게 하고 주저앉히는 짓이라고요.”
“그래도 단기간에 강해지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네. 나만 해도 2회차 때 성검의 주인 자격을 의심받으며, 모두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덕에 빠르게 강해졌고···. 현 시간대 나의 기억을 살펴보면 지금도 비슷한 듯하던데?”
이 황제누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2회차 인격의 영향은 전혀 받지 않고, 당시의 기억만 통합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2회차의 휴마누스는 일행들과 의지하고 나아가며 정신적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성장한 정신은 사라져버리고, 광증이 도진 황제가 당시의 경험을 제 것으로 받아들였으니 이 사달이 날 수밖에.
‘고생과 좌절감은 기억하는데 그것을 통해 얻은 인생의 교훈은 모두 잊고, 라떼만 찾아대는 꼴이 꼰대와 다를 바가 없네.’
에인젤 주교처럼 무늬만 꼰대가 아니라 이놈은 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