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09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099화(1099/1105)
1099회
103. 공작님과 황제 (20)
* * *
재단사를 내보내고 옷을 추스른 후 황제누스를 넣어 둔 옆방으로 이동하려던 그때, 복도에서 제온을 만났다.
그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세 개나 들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전부 달랐다.
세르펜스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어 그것들을 건네받는 모습으로 보아, 녀석이 미리 주문한 물건인가 보다.
“가져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일하러 가셔도 됩니다.”
이만 가 보라는 세르펜스의 말에도 제온은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행동으로 보아 내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온이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기···, 그러니까, 보좌관님?”
“와, 공적인 자리도 아닌데 이젠 형이라고도 안 불러주네. 시온 몸에서 나왔으니 이젠 완전히 남남이다 이거지?”
“···형이 맞긴 해?”
나를 대하는 제온의 태도에서 거리감이 느껴져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서운함을 토로하자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하니 다른 존재가 나인 척 연기하는 거라고 의심하는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아닐 것 같다.
제온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니까.
세르펜스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만 봐도, 내가 시온의 몸 안에 들어갔던 그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제온의 물음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내가 이쪽에 와 있는 동안, 원래 살던 세상의 시간이 멈춰 있어서 그래! 좀 더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히 멈춘 건 아니지만···.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넘어가겠는데, 아무튼 그래서 나이를 먹지 않은 거야.”
“그걸 고려해도 너무 어려 보이는데? 대략 20대 초반 정도쯤으로 보이니까···. 실은 나랑 동갑이거나 나보다 한 살 정도 어린 거 아냐?”
이런 대답이 돌아오는 거로 보아 내 추측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제온은 내가 연상이 맞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보좌관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거였다.
전에는 세르펜스가 그러더니, 이제는 제온까지 나를 형 소리가 듣고 싶어 나이를 속인 사기꾼 취급했다.
“동안이라서 그래! 이 육체는 스물다섯 살이야! 그러니 앞으로도 쭉 형이라 부르도록!”
“지금 내 나이도 스물다섯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중요한 건 정신 연령이지! 몇백 살을 먹어도 20대처럼 보이는 엘프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신체 나이 따위에 연연하지 마!”
“···알았으니까 진정해.”
세르펜스가 지켜보고 있는 터라 너무 열성적으로 주장을 펼친 까닭일까?
제온이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래, 알았어. 네가 형 해라.’ 하고 인심 쓰는 듯한 반응에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보다 나는 왜 부른 거야? 내 진짜 나이가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그게, 그러니까···. 이 세상의 위협이 사라지면 바로 돌아갈 거야, 아니면 계속 여기서 살 거야?”
“웬만하면 돌아가는 쪽으로 생각하고는 있는데, 그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서. 아마 몇 년 정도는 더 살지 않을까? 평화로워진 대륙을 함께 여행하자고 세르펜스랑 약속한 것도 지켜야 하고···.”
그렇게 말하는데 돌연 ‘아!’ 하고 짧은 탄성이 들려왔다. 세르펜스가 감동하며 낸 소리다.
녀석은 제온에게 건네받은 상자들을 한쪽 팔로 소중히 끌어안으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정말 기뻐 보인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세르펜스와 눈을 맞추고 있을 때 제온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럼 신분이 필요하겠네?”
“···설마 너도 내게 양자 제안을 하려는 건 아니지?”
“맞는데?”
혹여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싶어 제온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으나, 그는 진지하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쯤 되니 사실 나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게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샘솟는다.
그것도 그냥 자극하는 게 아니라, 보는 순간 아들 삼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로 엄청나게.
그렇지 않고서야 세르펜스와 에일리히에 이어 제온까지 나를 입양하겠다고 나설 리가 없다.
“이야~! 썬, 너 인기 되게 많다? 킬킬킬!”
스물아홉 평생 모르고 지냈던 진실과 마주하고 내가 넋을 놓아 버리자, 꽥꽥이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갑자기 오리가 말을 하면 보통은 화들짝 놀라며 ‘오리가 말을?!’ 하고 소리칠 텐데, 제온은 잠깐 움찔한 게 다였다.
비비의 말문이 트였을 때와 비교하면 굉장히 덤덤한 반응이다.
아무래도 천사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에일리히가 미리 꽥꽥이의 존재를 모두에게 알린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식사할 때에도 꽥꽥이에게 새 모이 대신 우리와 같은 음식을 내줬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가 이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형,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거절이지! 지금 네 성은 ‘로베르토’잖아? 한스 그 양반과 같은 성을 쓴다니,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어!”
“자, 잠깐만! 설마 내가 형을 입양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제온이 펄쩍뛰며 성을 냈다. 정말로 아닌가 보다.
확실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상식적으로 누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입양하고 싶어 하겠는가.
문제는 그 상식을 깨트린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서 있다는 거다.
세르펜스는 제온에게 나를 빼앗길 새라 경계하며, 그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내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잡아당겼다.
다른 가문에 가지 말고 자신이 있는 프라시더스 가문에 와 달라는 뜻이다.
나는 그런 녀석의 행동을 무대응으로 넘기며 제온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네가 입양하는 게 아니면, 추천할 가문이라도 있는 거야?”
“만약 형이 의탁할 가문을 찾고 있다면, 부모님께서 입양하고 싶으시대.”
“그건 감사한 제안이긴 한데···, 너무 위험하지 않아? 내가 리벨론 가문이 잘 지낸다는 게 알려지면, 그땐 민숭이가 아니라 악숭 세력 전체에게 노려질 수도 있어.”
전 리벨론 백작 부부와 제온, 비비는 공작저에서 지내니 상대적으로 안전하겠지만, 현 리벨론 백작인 카론은 그렇지 못하다.
그 간단한 사실을 제온과 그의 부모님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제안을 해 왔는지 모르겠다.
“천사와의 연이 사라지면 막내의 신성력도 사라질까 봐 불안하기도 하고. 신성 제국에서 천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아니까,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붙들어 놓았다고 소문을 내면 해결되지 않겠어?”
“그럼 대륙 모든 이들이 리벨론 가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비난할 텐데?”
“부모님이 그런 것도 모르고 형을 입양하겠다고 했을까 봐?”
“알고 있다면 대체 왜 나를 입양하시겠다고 한 건데?”
“이미 예전에 형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혹시 모를 위험이나 남들의 비난 때문에 가족을 내칠 수는 없잖아?”
제온이 뚱한 표정을 짓고 묘하게 서운함이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그 탓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제온이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건 형의 의견이니까, 만약 더 좋은 가문에 들어가기로 예정되어 있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알다시피 리벨론 가문은 형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래도 세상이 평화로워진 이후에 형의 이름을 팔아먹는다거나, 어느 모임에 얼굴을 내비쳐 달라는 둥 가문의 일에 나서 달라는 둥.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않을 거라는 것 하나만큼은 약속할 수 있어.”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세르펜스의 양자 제안은 못 들은 척 무시했고 에일리히의 제안은 어물쩍 넘겨버렸지만, 이번만큼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가족을 끔찍이도 아끼는 그들이, 명예를 목숨만큼이나 귀히 여기는 귀족 가문이.
자신들의 삶과 명예에 위협이 되는 걸 알면서도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다니, 어려운 결정이었을 테다.
그렇기에 나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런데 카론이랑도 얘기가 된 거야?”
“나한테는 형이라 부르라더니, 자기는 큰형 이름을 그냥 막 부르네?”
“너랑은 ‘나’로서 쌓은 친분이 있지만, 카론이랑은 대화도 몇 마디 나눠본 적 없잖아.”
“알아, 그냥 장난으로 해 본 말이었어. 그리고 큰형도 동의한 사항이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말고. 안 그래도 지금 공작저에 와 있으니까, 뭣하면 직접 확인해 보든가.”
“카론이 와 있다고?! 아니, 왜?!”
영지는 대체 어쩌고 영주가 수도에 와 있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옆에 서 있는 프라시더스 공작령의 영주를 보자 가라앉았다.
리벨론 령이 작긴 해도 행정관은 존재한다.
반면에 처리해야 할 업무는 적으니, 영주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
“왜겠어? 동생이 악마에게 납치되면서 천사라는 소문이 퍼지더니, 갑자기 기억에 이상이 생기고. 이제는 납치됐던 동생이 천사의 몸으로 대륙에 강림했다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나돌기 시작했으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상한 오해를 한다고 생각하던 큰형도, 동생이 천사라는 소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 그건 그렇지.”
“그래서 에일리히 어르신께 양해를 구하고 큰형을 수도로 불러들인 거야. 비비의 정체와 형에 관해 설명해 주려고. 겸사겸사 가족회의를 열어 형의 입양 문제도 논의하고.”
가족 회의 하니까 생각난 건데, 나는 부모님께 다른 집에 입양돼도 괜찮은지 허락받은 적이 없다.
잠깐 돌아가서 가족 회의 좀 하고 다시 오면 안 되나?
“그리고 이건 입양이랑 별개로 하는 얘긴데, 당장 급히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면 부모님이랑 비비한테 얼굴 좀 보여 줘.”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대?”
“그게 아니라! 건강하게 잘 지내는 걸 확인시켜 주라는 뜻이었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형 상태가 정말 안 좋아 보였으니까. 다들 형을 엄청 걱정했거든. ···나도 그렇고.”
이들 가족을 마지막으로 본 건, 악마의 수작질 때문에 나 자신을 시온으로 혼동했을 때다.
당시 내 상태에 악영향을 끼치는 데 일조했던 꽥꽥이가 ‘꾸엑···.’ 하는 소리를 내며, 목을 잔뜩 움츠렸다.
놀랍게도 악마 출신 꽥꽥이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희대의 발견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걱정을 끼쳤으니, 이제는 괜찮다는 걸 확인시켜 드리는 게 예의긴 한데···.’
나도 모르게 황제누스가 있는 방의 문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살짝 열려 있던 문이 소리소문없이 닫히는 모습을.
좁은 문 틈새로 언뜻 보라색 눈동자를 본 듯한 건 내 착각이 아니리라.
윈스톤은 황제누스가 엿보는 것도 안 말리고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다. 설마 같이 구경한 건 아니겠지?
어차피 황제누스에게 숨겨야 할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으나 괜히 기분이 찝찝하다.
“선우, 전 리벨론 백작 부부를 만나러 가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다.”
굳게 닫힌 문과 눈싸움을 하고 있자니 세르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자신이 황제누스 옆에 붙어 있을 테니 나 혼자 갔다 오라고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갈 수 없다. 녀석이 황제누스를 누구와 겹쳐보고 있는지 모르는 바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녀석을 두고 갈 수 있겠는가.
마음을 굳히고 됐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잠시만 여기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세르펜스는 제온에게 대기 명령을 내린 뒤, 내 손목을 잡고 황제누스가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우리가 방 안에 들어서자 문 옆에 서 있던 황제누스가 바로 문을 닫았다.
그가 문 틈새로 복도를 엿보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당당하게 문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가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