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1화(11/1105)
11회
3. 공작님과 기차여행 (3)
“···죄, 죄송합니다.”
나도 나름대로 변명은 있다.
세르펜스는 원래 보좌관 없이도 업무를 충분히 소화해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전 보좌관 선례를 생각하면 최대한 일에 손대지 않는 편이···.
‘그래, 이건 다 변명에 불과하지.’
돈 받고 일하는 처지에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적당히 시간만 때우다 퇴근해버리면, 칼퇴 요정님이 대신 처리해 준다는 걸 알아버린 탓이다.
그것이 너무 편하고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그만···.
“괜찮습니다, 앞으로만 주의해주십시오.”
세르펜스가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크흑, 이번엔 진심으로 감동했다.
“지, 지금이라도 할까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단박에 거절당했다. 펜이 사각거리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객실에 울려 퍼졌다.
방금 막 농땡이를 지적당한 참이다.
이런 상황에서 눈앞에서 상관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혼자 가만히 있으려니 죄악감에 짓눌리는 것 같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괜히 짐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웬 종이봉투가 보인다.
“아차, 쿠키! 챙겨왔는데 좀 드시겠습니까?”
어제저녁 포피나에게 부탁해서, 오늘 점심때 메리에게 전달받았다.
“그것도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어째서 제게 자꾸 무언가를 먹이려 하십니까?”
“예? 아, 아뇨. 그게 그냥 혼자 먹기 뭐해서···?”
나도 아까부터 궁금한 건데, 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날을 세우지?
“저는 정말 괜찮으니, 앞으로는 혼자 드셔도 됩니다.”
“왜, 왜죠! 어째서? 혹시 제가 너무 농땡이 피운 탓입니까?”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제만 해도 마카롱을 세 개나 집어 드시고, 어? 우리 분위기 좋았잖아?
‘쿠키를 준비해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해!’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어쩐지 너무 순조롭다 했어···.
“왜 화를 내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화내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니라?”
아, 너무 흥분해버렸다. 일단 진정하고 생각하자. 이젠 어쩌지?
이렇게 고민하는 와중에도 세르펜스는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냥, 공작님을 지켜보다 보니 취미도 없으시고···.”
“없으시고?”
“관심사 같은 것도 없다고 들어서···.”
“들어서?”
혹시 ‘끝말 따라 하기’를 아는가?
이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호응하고 있다는 걸 인식시켜주기 위해.
그리고 ‘나는 네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말하는 모습만 봐도 흐뭇하다~’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상대방이 하는 말의 마지막 어절을 따라 하는 것이다.
‘보통 이성을 꼬시는 기술로도 알려졌지만···.’
하지만 이 화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잘못 사용하면, 상대방이 굉장한 압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비꼬거나 깔보거나 하는 식의 용도로도 쓰인다.
실제로도 압박 면접 하는 곳에 가면 일부러 이런 식의 화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공작님?”
“네, 말씀하십시오.”
세르펜스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출근 첫날만 해도 그렇게 경계하고 무서워하던 나였는데.
하지만 최근 세르펜스가 과자 하나 더 먹겠다고 요행을 부리는 걸 계속 봐온 탓일까?
나도 모르게 방심해버렸다. 이 자식은 역시 속이 시커먼 놈이었다.
‘···오늘 정말 역대급으로 무서우신데요?’
긴장해서 그런가, 목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직원을 불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그 표정도 오랜만입니다. 처음 출근하시던 날도 그렇게 절 바라보셨는데···.”
“그, 그건···.”
세르펜스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손깍지를 껴, 그 위에 턱을 괴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아직도 제가, 무섭습니까?”
“그, 그야 부하가 상관을 무서워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보통?”
잊고 있었다.
본래 세르펜스의 주특기는 천사 같은 얼굴로 상대를 현혹하고, 방심시킨 후 그 틈을 노리는 것이었다.
“리벨론 경이 말씀하시는 ‘보통’이란 게. 정말 ‘보통’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
“리벨론 경이 전에 제게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세르펜스에게 무슨 말을 했더라? 기억이 날 듯 말듯 희미하다.
“피차 보통이 아닌 건 마찬가지 같으니. 이제 편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생각났다.
출근 둘째 날, 내가 세르펜스에게 한 ‘보통은 이렇게까지는 안 한다.’는 식의 이야기.
거기에 대고 세르펜스가 날 이상한 취향을 가진 거라 오해했고···.
‘아···.’
이제야 깨달았다.
세르펜스는 그때 내 말의 논점을 정확히 파악했으나, 잘못 이해한 척하며 상황을 그냥 넘겨버린 것이다.
“저, 진행하셔야 할 서류가 많아 보이시는데···.”
“아닙니다, 리벨론 경의 말씀대로 저도 가끔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르펜스가 더없이 화사하게 웃었다.
“모처럼의 기차여행인데, 느긋하게 대화나 나눠봅시다.”
내가 이틀이라곤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50시간을 이 기차에서 보내야 했다.
앞으로 49시간 남았다.
“리벨론 경이 저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다닌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저도 리벨론 경이 무척이나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아, 아뇨! 전 공작님께서 직접 관심을 가지실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세르펜스가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속눈썹을 사락거리며 눈웃음쳤다.
“아닙니다, 리벨론 경은. 굉장히 흥미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슬픈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미친 데자뷰!!
오늘 대체 왜? 아니, 오늘 갑자기 이러는 게 아닌가. 설마 처음부터 오늘을 노린 건가?
“오늘은 그거 안 하십니까? ‘네, 전 흥미로운 사람이에요.’라고 말씀하실 타이밍 같았는데.”
엄마, 나 너무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서스펜스가 너무 무서워요!
먼 곳에서 봤을 때나 서스펜스였지, 가까이서 보니 그냥 스릴러잖아!!
“리벨론 경이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고. 저의 무엇을 알고 싶어 하며, 제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저에게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알고 있는 건 당신의 과거와 앞으로의 미래요,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신의 취향이요. 당신에게 원하는 건 회개해서 세계 평화에 일조해주시는 겁니다!’
···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고 정말 미치겠다.
“그, 그게···. 사, 살려주세요?”
“제가 제 보좌관을 왜 죽이겠습니까, 안 죽입니다.”
세르펜스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살짝 가라앉으며, 그의 눈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말이죠.”
난 정말 내가 잘 해왔다고 생각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세르펜스는 무섭지 않았고, 되려 엉뚱한 면모를 보였다.
그 때문에 나는 가능성을 보았고, 그 가능성을 보고 방심해버렸지.
‘그것이 그의 노림수임을 까맣게 모른 채···.’
아무것도 모르던 휴마누스와 달리 나는 세르펜스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하지만 내가 두었던 모든 수가 자충수가 되어 돌아왔다.
“저, 혹시···.”
“말씀하십시오.”
여유로운 표정의 세르펜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기다려준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이건가?
“제가 말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리벨론 경은 제가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머릿속에서 [성검의 주인] 내용이 마구 떠올랐다. 주로 세르펜스가 다른 누군가를 죽이거나, 고문하는 모습들.
세르펜스는 그들을 결코 쉽게 죽이지 않았다.
‘더욱 고통스럽게. 더욱 처참하게. 더욱 잔인하게. 더욱 공포심을 느끼도록.’
아직 선택의 날은 오지 않았지만, 세르펜스는 그 방법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직접 그가 몸소 겪은 일이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둥근 안경알 너머의 녹색 눈동자가, 내 생각을 꿰고 있다는 듯 날카롭게 바라본다.
“리벨론 경이 저를 계속 두려워하시기에.”
시기상, 지금의 세르펜스는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럴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세르펜스가 자란 환경과 그가 받았던 고통을 알면서. 그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꽤 재밌는 상상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하얗게 질려가는 나의 모습을 보며 세르펜스가 희게 웃었다.
창밖은 아직도 밝다. 따사로운 햇살이 나와 세르펜스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나는 뱀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듯한 서늘함을 느끼며,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떠한 상상들을 하셨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일부러였구나.
그는 일부러 공포를 각인시키기 위해, 천천히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제게 아무런 관심사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쩐지 저 다음에 올 대사를 알 것만 같다.
“이제 생길 것 같습니다. 아니, 이미 생겼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세르펜스는 말없이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그건 바로 너’라고 말하는 듯.
뱀이 온몸을 휘감은 듯한, 서늘함과 오싹함이 느껴졌다.
“앞으로가 즐거워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저, 조금 서운해지려 합니다.”
“대답, 안 해주실 겁니까?”
“대답. 하시는 게 좋을 텐데···.”
“흥미가 떨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저도 알 수 없어서 말입니다.”
세르펜스가 천천히 한 문장, 한 문장. 텀을 주며 서서히 압박해온다. 여기에 휘말리는 순간 끝이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라고? 말해봐야 믿긴 할 건가?
‘사실 여기는 소설 속이다. 성검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너는 최종적으로 타락해 최종 보스가 될 거다. 그리고 결국 성검의 주인인 황태자에 의해 사망할 것이다.’
퍽이나 믿음직한 소리다.
어차피 사실대로 말해도 죽을 테니, 어떻게든 꾸며낼 수밖에 없다.
‘진정하자, 침착하자. 이대로 휘말려서는 안 돼.’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는 지금 상황에선 도움이 안 된다.
성검이 휴마누스를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건, 너무 훗날의 이야기.
선택의 날이 오기 전까지 있었던 일 중 아는 거라고는, 시온이 마차에 치여 죽는 것뿐.
‘이건 당연히 기각.’
무엇을 떠올리듯 당장에 쓸모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가 죽어가며 떠올렸던 마지막 회상을 토대로 이야기해 보자.
‘그가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사유가 없더라도···.’
조금씩 그의 사고를 좀먹고, 생각을 마비시킬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가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 여유조차 갖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거다.
‘세르펜스는 어릴 적 상처를 많이 입은 것뿐, 무섭지 않아. 아직 그는 타락하지 않았어. 괜찮아, 나는 할 수 있어.’
스스로를 세뇌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공포가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