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10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103화(1103/1105)
1103회
103. 공작님과 황제 (24)
“당신이 그들에게 속았던 건 제가 믿음을 드리지 못한 탓인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과거의 저는 완벽함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당신이 보좌관으로 모셨던 저는 훨씬 더 강박적 사고에 갇혀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당신에게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제가 용서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으아아···! 그런 말씀 마세요!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건 저인데, 어째서 공작님께서···.”
세르펜스의 반성이 이어지자 비비가 황망하게 양손을 내저었다.
예전에 세르펜스의 언변에 휘둘려,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뿌리를 내린 탓이리라.
“잘못의 크기를 따지자면 제가 더 큽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제게 사과를 하셨잖습니까?”
“그, 그거야 원인은 제게 있으니까···.”
“제게도 있습니다.”
“하, 하지만···!”
“만약 저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말을 돌리시는 거라면···. 저의 잘못이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용서할게요, 용서하겠습니다! 제발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서로 자신이 더 잘못했다며 아웅다웅한 것도 잠시.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까는 가련한 세르펜스의 모습에 비비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사과를 받는 사람이 사정하게 하다니 상식 밖의 일이다. 그걸 세르펜스가 해냈다.
하지만 녀석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당혹스러운 마음이 커서 세르펜스는 잘못하지 않았고, 자신은 사과받을 자격이 없다며 손사래 쳤지만.
나중에 차분히 생각해 보면 세르펜스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게 될 테다.
만약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분명 후회했으리라.
죽임을 당했던 자신에게 사과받을 기회를 빼앗은 것이자,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세르펜스에게 용서받을 기회를 박탈한 거니까.
과거의 자신과 세르펜스에게 미안해서 마음속에 앙금이 남았을 거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관용을 베풀도록 몰아간 세르펜스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나는 이런 분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보좌관으로서 공작님의 고충을 살폈어야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확실한 근거도 없이 의심하기나 하고···. 그렇다고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정말 최악의 보좌관이야···.”
세르펜스에게 사과를 받은 것이 부담스럽고 미안한 탓일까?
주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신감 만땅 상태였던 비비가 소심한 시온으로 돌아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울먹이며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정말 가여운 모습이지만. 그렇지만 너무 귀엽다.
그 까닭에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제온의 품에서 비비를 빼앗아 둥개둥개 어를 뻔했다.
“으음···. 제게는 당시의 기억이 없어 보좌관으로서의 당신이 어땠는지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암흑가에 관한 조사 자료를 빼돌리거나 조작하고, 그곳에 마약을 유통하려 한 전임 보좌관만큼 최악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엑?! 엄청난 사람이었잖아요?! 어떻게 그런 짓을···!”
“네, 정말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안 좋은 의미로.”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듯 세르펜스가 싱긋 눈을 접어 웃었다.
비비가 자꾸 자책하며 괴로워하니,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일부러 핵심 주제에서 벗어난 얘기를 언급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한 가지 당신이 잘못 알고 계시는 점을 짚어 드리자면, 세상이 망한 건 당신의 탓이 아니라는 겁니다.”
“달라진 건 저 하나뿐인데 세상이 망하지 않고 변했다면서요? 그럼 저 때문에 망한 거라고 봐야···.”
“그만큼 선우가 대단하다는 뜻이지, 당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고려해야 하는 건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선우가 알려준 ‘정보’도 상황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녀석이 예전 버릇 못 버리고 또다시 나를 찬양하는 게 아닐까 싶어 잔뜩 긴장했다.
하나 다행히도 녀석은 나에 관한 얘기를 짧게 끝내고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본인이 받았던 신탁을 기억하십니까?”
“공작님께서 성검을 잡게 하면 안 된다던 그거요?”
“네. 그것 말인데 어쩌다 보니 어겼습니다.”
“···예에?!”
세르펜스의 발언을 바로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 건지, 비비의 반응이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넋 놓고 지켜보기만 하던 이들도 뒤늦게 경악했다.
모두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세르펜스의 말은 곧 성검을 잡았다는 뜻이니까.
“과정을 설명하자면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 바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르펜스가 활짝 편 양손을 들어올리며 다들 진정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선택 받지 못한 자가 성검을 잡으면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는다. 이 대륙에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깨끗하기만 한 녀석의 손바닥을 확인한 이들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대로의 반응이라는 듯,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세르펜스가 천연덕스럽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제가 성검을 잡은 순간, 성검의 선택을 받았던 제가 몸을 차지했습니다. 선우와 일행들의 말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제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탓에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그것을 또 성검의 주인 잘못으로 돌린 까닭에, 제가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내몰린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망했던 건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녀석의 설명이 끝났으나, 비비는 자신의 잘못으로 세상이 망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안도하지 못했다.
장내에 숙연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세르펜스, 이런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어?”
“선우가 신뢰하는 이들이니 이 정도 비밀은 털어놔도 괜찮을 거라 판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자신의 잘못으로 세상이 망했다고 생각했을 거다.”
“비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심한 시온은 그럴 것 같긴 해.”
“그 둘은 동일인이잖은가?”
“응, 그렇지.”
결론은 비비를 위해서 1회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는 뜻이다.
기특하고 장하고 갸륵하고 가상하고, 이 모든 칭찬을 끌어 와도 부족한 느낌이 들 정도로 몹시 대견하다.
녀석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마구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게 힘들어졌다.
감동의 파도가 마구 밀어닥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슬금슬금 손이 올라갔다.
그런 나를 멈춰준 건 예비 양아버지인 전 리벨론 백작이었다.
“저···, 그런데 우리 애가 공작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는 건 무슨 얘기인지···?”
“죄송하지만,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저에게도 허물이 되는 일이니, 아드님께도 물어보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뜻 들으면 비비를 감싸주고자, 본인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비비를 혼내지 말고 넘어가 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본래의 역사대로 일이 흘러갔으면 네 아들은 내 손에 죽었다.’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비밀에 부친 것에 불과하다.
나도 그 일이 리벨론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건 원치 않는다.
현 시간대에서는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무고한 현재의 세르펜스가 비난받지 않았으면 하니까.
그리고 세르펜스가 이들과 불편함 없이 잘 지냈으면 해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자, 자! 그럼 이제 슬슬 입양 서류를 작성해 볼까요? 그런데 양식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는 분?”
나는 짝짝 손뼉을 쳐서 모두의 시선을 모으며 말했다.
그러자 예비 양아버지가 잠시만 기다려 보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머무를지 알 수 없으니. 만약 입양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빠르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미리 관련 서류를 갖춰 둔 모양이다.
달콤하고 폭신한 붓세를 야금야금 베어 먹고 있자니, 예비 양아버지가 서류 뭉치와 펜을 가지고 돌아왔다.
열 장 가까이 되는 서류 중 내가 작성해야 하는 건 동의서 딱 한 장뿐이었다.
나머지는 양자를 들이는 쪽에서 작성해야 하는 거였는데, 이미 공란 없이 전부 채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적어야 하지? 내가 살던 세상의 언어로 써야 하나? 아니면 대충 소리 나는 대로 적어야 하나?’
짧은 고민 끝에 그냥 한글로 적는 쪽을 택했다.
어떻게 읽는 거냐고 물어보면 그냥 자기소개 한 번 하지 뭐.
그렇게 가장 어려운 이름 칸을 해결하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태어난 연도에서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그냥 시온이 태어난 연도를 적고 넘겼다. 날짜야 당연히 내 생일을 썼고.
“제출은 제가 할게요. 마침 내일 황제를 만나러 갈 예정이라서요.”
“설마 그걸 폐하께 바로 드릴 생각이니···?”
“귀족의 입양은 황제의 허가가 필요한데, 황제한테까지 서류가 올라가려면 한참 걸리잖아요. 언제 악숭 세력이 사고를 칠지 모르는데 세월아 네월아 무작정 기다릴 수야 없죠.”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내가 서류를 챙기며 황제를 언급하자 예비 양어머니가 흠칫 놀랐다가, 이어진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작성도 끝냈고 간식도 다 먹었으니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났다.
황제누스를 생각하면 바로 일어나는 게 맞지만, 그건 너무 매정한 것 같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바가 있어 세르펜스의 품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그런 김에 입양 서류를 집어넣고 본래 꺼내려던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제온, 이거 내가 살던 세상의 음식 레시피인데 나 대신 주방에 전달해 줄래? 참고로 이쪽에 있는 건 만드는 데 오래 걸리니까, 그걸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먼저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 떠나기 전에 좀 챙겨가고 싶거든. 그리고 이건 디저트 샘플인데 간단한 설명도 적어 놨으니까, 먹어 보고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해 달라고 전해 줘.”
“직접 주방에 찾아가서 얘기하지 그래? 다들 좋아할 텐데.”
제온의 말에 살짝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을 텐데 세르펜스를 데려가면 더 불편해할 테고, 그렇다고 녀석을 먼저 황제누스가 있는 방에 돌려보낼 수는 없다.
더구나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오랜만에 대면하면 대화가 길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쉽지만 재회는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나도 그러고야 싶지. 그런데 내가 천사가 되면서 신성력이 생겼거든? 그것도 엄청 많이. 언제 실전에 들어갈지 모르니까 부지런히 수련해 둬야 해.”
“그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는 거 아냐?”
“어···, 그렇긴 한데 서류 작성을 끝내자마자 일어나는 건 너무 정이 없잖아. 가족이라기보다는 비즈니스 관계처럼 느껴지고.”
“본인 안전이 걸린 문젠데 왜 그렇게 태평해?!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으니까, 어서 일어나.”
제온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레시피 번역본과 샘플들을 바리바리 챙기며 나를 재촉했다.
그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급하게 예비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뒤, 세르펜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용무도 끝났고 아직 데면데면한 느낌이 남아 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레시피 얘기를 꺼낸 것이니만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