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10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105화(1105/1105)
1105회
103. 공작님과 황제 (26)
“선우, 자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황제누스가 돌연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주고받는다기보다는 그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가만히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갑자기 이리 말을 걸어오니 괜히 긴장됐다. 대체 이 타이밍에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
“자네는 세르펜스의 어린 시절 일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세르펜스와 가까워진 후, 그에게서 들은 건가? 아니면 보좌관으로 지내며 직접 조사하여 알아낸 건가? 그조차 아니라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며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딱히 살기를 뿌리거나 기운을 일으켜 압박하는 것도 아니건만 위압감이 느껴진 까닭이다.
찔리는 구석이 있기도 하고.
“휴마누스가 짐작한 대로입니다.”
“그를 실제로 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황제누스가 ‘하···.’ 하고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그가 세르펜스의 마음을 열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듣고 난 직후인 탓일까?
허망함 가득한 그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세르펜스가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낼 리 없으니 그럴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짐작만 하는 것과 확인을 받는 건 와 닿은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그의 눈빛에, 분노인지 광기인지 모를 것이 스쳐 지나갔다.
세르펜스도 그것을 보았는지 긴장한 녀석이 내게 몸을 바짝 붙였다.
“왜 내가 아닌 거지? 신께서는 어째서 외부인에 불과한 자네에게만···!”
황제누스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겁먹은 세르펜스의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다.
분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황제누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상태로 씩씩거리는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제가 세르펜스의 어린 시절 일을 알고 있어서, 그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휴마누스는 사정이 다르잖습니까? 막 학대가 시작됐을 무렵이라면 몰라도. 선택의 날을 앞두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들, 둘 사이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을 것 같지는 않네요. 오히려 죄책감에 사로잡혀 세르펜스를 대하는 게 어려워지면서, 관계만 서먹해질 뿐이겠죠.”
나는 잠시 말을 끊고 황제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내 얘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긴 했으나 무어라 따지지는 않았다.
일단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계속 들어보기로 했나 보다.
“게다가 자칫 잘못해서 일이 꼬이면, 휴마누스가 모든 것을 알면서 세르펜스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에게 진실을 들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을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나는 세르펜스에게 들어서 과거의 일을 알게 된 것이 아니네. 현 시간대의 내 기억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
그 말대로였다. 지난 두 회차에서는 세르펜스가 어린 시절 학대 당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누스는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현 시간대의 나는 세르펜스에게 친구로 받아들여지긴 했으나, 그건 자네가 중간에서 도움을 준 덕분이네. 그렇다면 그간 내가 해 왔던 노력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란 자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채지 못한 게, 어디 나만의 잘못인가? 당시에는 나 또한 어렸네. 내 세상은 황궁 내부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 누구도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네. 부모가 아이를 학대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더 자라고 나서, 황궁 바깥의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된 이후네. 그리고 그땐 세르펜스가 이미 공작 자리에 오른 상태였지.”
현재누스는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 없는 불평이다.
하지만 그가 단 한 번도 저런 생각을 한 적 없는 건 아닐 테다.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세르펜스에게 서운함을 느꼈겠지. 그리고 더 나아가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숨겨서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건지, 억울함 또한 느꼈을 테다.
그럼에도 현재누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간 건, 어쨌거나 세르펜스가 자신을 친구로 인정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겨우겨우 녀석이 마음의 문을 열어 줬는데 지난 일을 따지는 건 긁어 부스럼이니.
그냥 눈치 없는 자신을 탓하며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기로 한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이런 얘기까지 했는데 끝까지 입을 닫고 있을 거야? 뭐든 좋으니 변명이라도 해 주면 안 돼?”
황제누스의 말투가 바뀌었다. 시선 또한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살짝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세르펜스를 바라보며 녀석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거다.
그가 세르펜스에게 직접 말을 건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죄, 죄송···, 합니다···.”
움츠러들대로 움츠러든 녀석이 내게 들러붙다시피 기대며, 잔뜩 겁먹어 반쯤 흐느끼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렇지 않아도 전대 공작과 겹쳐 보이는 황제누스가 자신에게 화까지 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일만도 하다.
하지만 황제누스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차갑게 식어가는 황제누스의 표정을 보긴 했으나 세르펜스를 달래주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세르펜스를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거리자, 황제누스가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사과를 받자고 한 말이 아니야. 그저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해해 달라는 거지. 그리고···, 나를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그 말이 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 정도는 바라도 되는 거잖아?”
나는 세르펜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옆에 내가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보통 놀란 게 아닌 모양이다.
이 녀석이 두려움을 떨치고 대화에 응해 주면 좋겠지만, 겁먹고 떠는 아이에게 억지로 용기를 내라며 다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 봤자 악효과만 날 뿐이다.
“잠깐만 끼어들게요.”
하는 수 없이 내가 한쪽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을 꺼내자 황제누스가 팍 인상을 썼다.
나를 통해 세르펜스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을 땐 언제고 방해꾼 취급이 따로 없다.
“휴마누스가 억울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세르펜스를 탓해서는 안 되죠. 원래 그런 문제는 얘기하기 어려운 거잖아요? 특히 어린아이들은 학대를 당하면서도 그게 학대라는 사실을 인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세르펜스 또한 그러했으니까. 주변에서 누가 알아봐 줘야 하는데···. 아! 그렇다고 휴마누스에게 잘못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잘못을 한 건 알면서도 묵인한 어른들이죠.”
“나는 지금 그런 잘잘못을 따지고 싶은 것이 아니네.”
“당연히 그것도 잘 알죠. 그냥 세르펜스와 잘 지내고 싶은 것뿐이잖아요?”
“···그래, 고작 그 정도뿐이지.”
뭔가 뉘앙스가 애매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게 더 날카로워진 것 같기도 하고.
본래 노리던 건 세르펜스의 절친 자리였는데, 그 자리를 꿰찬 내가 그냥 잘 지내고 싶은 것뿐이지 않으냐고 물으니 아니꼬웠나 보다.
그 부분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세르펜스가 어째서 자신을 무서워하는 건지, 그 이유부터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또 나 혼자 노력해야 하는 건가?”
“이제껏 휴마누스가 세르펜스를 위해 노력해 왔고, 그에 보답 받지 못해 지쳤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만 더요. 혼자서 노력하는 게 아니라, 먼저 노력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간절히 사정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뱉은 황제누스가 알았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전에 잠시 세르펜스에게 시선이 향했던 거로 보아, 녀석의 상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걱정이 되었나 보다.
나는 세르펜스를 보듬으며 부디 황제누스가 제대로 된 답을 찾아내길 기원했다.
“혹시 내 언행이···, 그가 어린 시절 느꼈던 공포를 자극한 것인가?”
생각에 잠겼던 황제누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정답을 입에 올렸다.
자신이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과 비슷한 짓을 했다는 걸 드디어 자각한 모양이다.
이건 눈치와 별개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이켜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누스보다 눈치 레벨이 높은 황제누스일지라도 깨달음이 늦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세르펜스가 이렇게까지 겁먹을 만한 이유가 그것을 제외하면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틀렸다는 겐가?”
“애초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이 옳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나는 세르펜스를 위해서···.”
“정말 세르펜스를 위한 거였어요? 남을 믿을 수가 없어서, 본인이 상황을 통제하려던 게 아니라?”
“······.”
황제누스는 내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분한 듯 보이면서도 회한에 잠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이번 일로 큰 충격을 받았으니, 적어도 더 이상 그가 세르펜스나 일행들에게 강압적으로 굴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물론 그렇다고 한들 인간 혐오가 사라지는 건 아닐 테지만.
“저는 잠깐 옆방에 가서 세르펜스 좀 진정시키고 올게요.”
“······.”
잠깐 사이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황제누스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윈스톤을 쳐다보자 그는 괜찮으니 나가보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꽥꽥이는 아까 별관으로 향했을 때처럼 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세르펜스를 부축하듯 내 몸에 기대게 한 채 옆방으로 이동했다.
여차하면 신성력으로 신체를 강화하여 안고 갈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녀석은 제 발로 걸음을 옮겼다.
“많이 무서웠어?”
“···이제는 괜찮다.”
세르펜스를 의자에 앉혀 놓고 그 옆에 서서 질문을 건네자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전히 새하얀 안색을 하고 그리 말하면 퍽이나 믿을 수 있겠다.
내 입가에 쓴웃음이 걸리자, 제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걸 안 세르펜스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정정했다.
“선우가 곁에 있어 주었는데도 겁에 질려서 미안하다. 휴마누스에게 마음을 걸어 잠그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니까···. 그 부분을 지적당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안 그래도 무서웠는데, 내심 미안해하던 부분을 그가 찌르고 들어오니까 더 겁을 먹었나 보네? 그럴 수도 있지.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내가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그리 말하자 녀석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이제 막 안심하며 긴장을 풀고 있는데 다정한 말을 들으니 눈물샘이 자극된 모양이다.
나는 앉아있는 녀석의 머리를 내 품에 기대게 하고 가만가만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