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2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23화(123/1105)
123회
29. 공작가의 보좌관들 (4)
자그마치 20년도 더 된 일이다.
보좌관 경력이 얼마 되지 않은 투스토르가 이렇게나 자세히 알 정도라면, 아직도 사교계에서 언급되고 있다는 소리다.
아르젠토 공작이 모든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건 아닐 터. 필연적으로 팔숨 경 또한 참석하지 않는 자리가 생긴다.
‘정보 교환을 빙자해서, 자기들끼리 떠들어대고 있는 거겠지.’
보좌관들은 모두 귀족 출신이다.
지금은 다른 가문의 귀족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는 하나, 성을 갈아치우는 것도 아니고.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출신 가문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가문의 역사와 전통.
그것은 귀족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족보를 달달 외우고 다니던 것과 비슷한 이치.
아르젠토 공작의 보좌관이 되면서 자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고는 하나, 근간이 되는 본가 꼴이 그래서야.
‘다른 보좌관들이 보기에, 팔숨 경은 근본 없는 놈이나 마찬가지려나?’
그런 그가 공작가의 위세를 빌어서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뻐기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나 보다.
‘팔숨 경과 말싸움 한 번 이겼다고, 투스토르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기에 배알도 없는 놈인가 했더니···.’
자신의 기준에서 자기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거다.
우월감에 도취하여 사는 놈이니만큼, 더더욱.
근본이 아예 없는 놈보다, 뭐라도 있는 내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건 그렇고, 영지전을 선포했다던 상대 가문은 현재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좌관이 된 직후에는 손댈 수 없었겠지만,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시간이다.
권력도 얻었고 아르젠토 공작의 신임도 받았겠다, 그의 성격상 이제껏 가만히 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오래전 일이라 과정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지 경영이 힘들어질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져서 완전히 파산했다나 뭐라나···. 보나 마나 팔숨 경, 그자가 손을 쓴 게 분명합니다.”
거기까지는 잘 모르나 보다.
‘세르펜스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려나?’
그렇게 열심히 뒷조사하고 다니는데, 옛날 일이라고 모를 것 같지 않다.
팔숨 경을 의심하고 있는 만큼, 그가 보좌관이 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으리라.
돌아가는 대로 한번 물어봐야겠다.
“영지도 모두 황실 쪽에 넘어갔다나 봅니다.”
“모두라 하면, 본래의 팔숨 가문의 영지까지 말입니까?”
“네. 현재는 황실에서 관리를 보내 경영 중이라나 봅니다.”
지금은 제국 황실의 직할령이 된 모양이다. 누군가 황실에 공을 세우면 상으로 하사받게 되겠지.
“아주 도량이 좁고 뒤끝이 긴 자입니다. 그러니 연회에서 무안 좀 당한 거 가지고 꽁해서 리벨론 경을 까고 다니는 거겠지요.”
지금도 신나게 팔숨 경의 뒷담화를 떠들어대고 있는 투스토르가, 팔숨 경의 뒷담화를 지적했다.
‘무안을 당한 게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자신의 밑으로 숙이고 들어가지 않은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거겠지.’
모든 것을 잃은 그가 아르젠토 공작가문의 보좌관이 되고, 남들에게 인정받기까지 수많은 고초를 겪어왔을 것이다.
수도 없이 노력했을 테고.
그런 그가 보기에, 나는 그저 운 좋은 놈에 지나지 않으리라.
고생은커녕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안 겪어본 햇병아리가 자신과 맞먹으려 든다고 느껴졌겠지.
더군다나 시온은 2년이나 보좌관 모집에서 낙방하고 다녔으니, 어수룩하고 무능력한 놈이라 판단했대도 어쩔 수 없다.
그런 내가 그와 대등하다고 주장한 거다. 이제껏 해온 노력과 겪어온 고난을 떠올린다면.
‘그렇게 따지면 내 뒷담화 정도야 뭐···.’
아니꼽지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귀족 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사교계의 소문에 어두운 것도 사실이다. 고작 그 정도 뒷담화는 치명적이랄 것도 없다.
‘하지만 세르펜스까지 걸고넘어지면 안 되지.’
그것만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으나, 진짜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다.
애초에 아르젠토 공작가를 조사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던가.
‘아르젠토 공작가를 움직여 프라시더스 공작가를 건드린다? 그 보좌관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웃기는 소리.
팔숨 경이 그 정도 사리 분별력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아르젠토 공작에게 버려졌을 거다.
‘차라리 그 반대라면 또 몰라.’
처음부터 표적이 세르펜스였다면. 그 때문에 그의 보좌관인 내게 접근했던 거라면 어떨까?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자신을 따로 찾아오라는 식으로도 말하지 않았었나?’
단순한 기 싸움이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만일 그때 내가 순진하게 홀라당 넘어갔더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표면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 친절한 선배가 조언을 주려나 보다 믿어버려서. 그에게 업무에 관하여 물어보고, 조언을 얻고, 그것을 실행하고.
그런 행동이 반복되어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다면···.
‘나를 통해 세르펜스에 관한 정보를 쏙쏙 빼먹고, 이용하려 했다는 거 아냐?!’
대체 왜? 팔숨 경이 세르펜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그렇게까지 하지?
“혹시 팔숨 경과 프라시더스 공작가나 세···, 제가 모시는 공작님 사이에 갈등이라거나. 안 좋게 엮인 문제 같은 게 있던가요?”
“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쵸. 없겠죠, 당연히.”
투스토르가 뭔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세르펜스를 향한 까닭 없는 적개심의 유래가 될 만한 것이라고는···.
‘역시, 이번 일은 악마 숭배 세력이 연관된 거였나?’
그들은 언제나 절망한 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농락하고 타락시켰다.
팔숨 경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들이 접근해 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쩌면 그가 아르젠토 공작가의 보좌관이 되는 것에 그들의 지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궁금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보다 자세한 상황은 세르펜스가 이미 알고 있겠지. 모른다면 앞으로 조사해서 알아보면 될 일이고.
물론 내가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팔숨 경을 욕하는 것에는 거침이 없던 주제에,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적갈색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다닌다.
“대체 뭘 물어보시려고 그러십니까?”
“아, 아니 그게. 제가 궁금하다기보다는 저희 백작님께서 알고 싶어 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 외 많은 귀족분들이···.”
쓸데없이 서두가 엄청 길다. 자기변호를 열심히 하는 거로 보아, 무척이나 실례가 되는 질문을 하려는 게 틀림없다.
“질문 안 받습니다.”
“네?”
“사절한다고요.”
뭘 물으려기에 장황하게 변명부터 하는 건지 궁금하긴 하나, 들어서 좋을 건 없을 것 같다.
답변하기도 곤란할 것 같으니, 저런 건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옳다.
투스토르가 어딘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 * *
많은 귀족이 궁금해한다던 투스토르의 말이 진실이었나 보다.
“그 질문이라면, 안 그래도 실컷 듣고 온 참이다.”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팔숨 경에 관한 이야기는 길어질 것 같기에, 그것은 잠시 미뤄두고 가볍게 던진 화제에 세르펜스가 대답했다.
“무슨 질문이었는데요?”
“유지스 위리디아. 그녀와의 관계를 묻더군.”
하기사, 두 번의 연회에서 남들 보란 듯이 그렇게 붙어 있었으니.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혹시 결혼을 염두에 둔 사이냐던가, 이번에 위리디아님께서 제국을 떠난 것도 그것을 허락받기 위해서냐던가. 그런 걸 물었다.”
“그거 엄청나게 실례되는 질문 아닙니까?”
저렇게까지 노골적인 질문을 했을 줄이야. 그렇다면 어떻고, 아니면 자기네들이 뭘 어쩌려고.
세르펜스를 통해 전해 듣는 건데도, 말본새가 ‘난 이 결혼 반댈세!’를 외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보나 마나 신성력 때문이겠지.”
“아, 그러고 보니···. 일반 엘프는 신성력을 가질 수 없었죠?”
현재 대륙에 남아있는 이종족은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인어라고도 불리는 메로우. 이렇게 셋뿐이다.
[성검의 주인]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을 제외한 다른 세 종족의 경우, 신성력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하이 엘프, 하이 드워프, 하이 메로우.
혹은, ‘사도(使徒)’라 불리는 자들이 바로 그 존재이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욱 다양한 종족들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니 대충 넘어가고.’
엘프의 사도는 세계(世界)의 나무를.
드워프의 사도는 영겁(永劫)의 화로를.
메로우의 사도는 무궁(無窮)의 심해를 수호한다.
그리고 그들의 수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며, 순환된다.
엘프의 사도가 죽고 난 뒤. 세계수 아래에 그 시체를 묻으면 나무는 열매를 맺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도가 태어난다.
드워프의 사도는 영겁의 화로에 태운 뒤, 그 잿가루가 모여서.
메로우의 사도는 무궁의 심해에 가라앉고 나면, 떠오르는 알을 통해.
방식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탄생보다는 부활처럼 느껴지고, 이름과 기억 또한 계승된다.
어떻게 봐도 보편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세대교체 방식 때문에 사도들을 해당 종족에 편입시키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별도의 종족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두고 인간학자들이 멋대로 싸우고 있지만···.
‘지들이 맞다고 하는데, 왜 제3의 종족이 그것 가지고 토론을 하는 건지.’
하여간 오지랖도 넓다.
아무튼 결론은 사도가 아닌 이상, 신성력을 가지지 못 한다는 소리다. 그것은 혼혈 또한 마찬가지.
“그래도 다다음 대가 되면 신성력도 다시 발현되지 않아요?”
세계관상 쿼터부터는 피가 더 많이 섞인 종족의 유전자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그냥 인간과 다름이 없다.
“당장 후대를 걱정하는 거겠지.”
“그깟 신성력이 뭐가 중요하다고···.”
다른 나라에서는 귀족 가문의 결합은 정치적 목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신성 제국은 그에 더해, 신성력을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당장에 세르펜스의 부모만 봐도 그러하다. 신성력 하나만 보고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양의 많고 적음의 차이만 있지, 신전만 가도 신성력을 가진 자들이 차고 넘치잖아요?”
“그야 신전이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대체재가 충분하다, 이겁니다! 많은 신성력이 필요한 일엔 여럿이서 함께 힘을 모으면 되죠.”
“그럼 선우는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세르펜스가 진중한 표정으로 조언을 구하듯 물었다.
“누구든 상관없어요. 세르펜스가 행복하고, 의지할 수 있고, 나아갈 수만 있다면.”
“······.”
정말 그것만으로 괜찮으냐는 듯, 두 눈을 깜박거린다.
미려한 속눈썹이 오르내리고, 선연한 빛깔의 눈동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생각해 봐요. 신성력 보유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세르펜스의 얼굴은 대체재가 없어요. 독보적입니다.”
“···뭐?”
유지스를 제외한 엘프들을 모두 일렬로 세워놓고, 뺨따귀를 와다다다 날릴만한 미모다.
신성력보다 신성한 얼굴이 있는데, 신성력 따위는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못 된다.
“만약 세르펜스가 후대를 통해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면, 그건 신성력이 아니라 그 얼굴일 겁니다.”
“···진지하게 들어서 괜히 손해 봤군.”
나는 정말 진지하게 말한 것이 건만.
세르펜스는 헛소리로 받아들였나 보다. 더는 대화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