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2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25화(125/1105)
125회
29. 공작가의 보좌관들 (6)
본관에서 세르펜스와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를 게 없는,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약 일주일 정도는.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한스가 가져다준 편지가 문제였다.
“전 아무래도 편지와는 영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보낸 사람의 이름 란에 적혀있는 ‘네루스 팔숨’이라는 글자. 봉투 위에 화려한 필체로 흘려 쓴 ‘초대합니다.’라는 글귀.
“와! 봉투를 뜯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 읽은 것 같네!”
굉장한 의사 전달 효과다.
편지를 받자마자 비꼬고 있으니, 세르펜스가 궁금해졌는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리고 겉면의 글씨를 확인하고는 그것을 채간다.
봉투를 뜯는 손길에 거침이 없다.
“···보좌관 모임이라, 변명도 좋군.”
세르펜스가 그 안에 들어있던 초대장 내용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근데 왜 저는 1년 가까이 초대받은 적이 없죠?”
“참고로 이전의 모임 주최는 프라시더스 가문의 보좌관이었다.”
“프라시더스 가문의 보좌관···이면, 지금은 나잖아?!”
“그래. 선우, 당신이지.”
팔숨 경이 치사하게 나만 빼놓고 초대장을 돌렸나 했는데, 그간 열리지 않았을 뿐이었나 보다.
“원래 제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까? 그딴 소리 못 들었는데요?”
“해야 하는 일이라기보다, 내가 사교계 출입이 없어서 전 보좌관이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열기 시작한 거다. 친목과 사교계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함이라 보면 된다.”
“···해야 하는 일 맞네요, 뭘.”
세르펜스야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그렇다 치자.
그래도 한스라면 날 닦달해서라도 초대장을 돌리라고 하고도 남았을 양반인데, 어째 선가 일언반구도 없었다.
“사교계 동향에 관한 정보쯤은 모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정보 단체를 굴리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내 의문을 눈치챈 세르펜스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쉽게 말해, 내가 못 미더우니 한스 본인이 좀 더 수고하는 쪽을 택했다는 얘기다.
“그래도 친분 쌓는 건 대신해줄 수 없잖아요.”
“쌓는 게 아니라 싸우는 걸 잘못 말한 거겠지.”
“뭐임마?!”
울컥해서 소리치니, 세르펜스가 조용히 소리 죽여 웃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그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어쨌거나 그럼 팔숨 경은 이런 모임을 열 필요가 없다는 거네요?”
“당신을 제외한 보좌관들은 다른 사교 모임에서도 마주칠 테니.”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장을 내게 돌려주었다.
읽어보니, 오랜만에 보좌관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자리를 갖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부디 모두가 참석해 주길 바란다는 끝인사로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이건 절 불러내기 위한 거 맞죠?”
“안 가도 된다.”
“안 가도 되긴요! 보좌관 모임이면 학부모 총회 같은 거잖아요? 요즘엔 이런 모임에 결석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애한테 간다고 아주 난리던데, 빠지면 큰일 납니다!”
호들갑 부리며 아무렇게나 떠들어댔더니, 세르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살던 곳 이야기였으나,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비슷비슷하니 여기도 별반 차이는 없을 겁니다.”
“···그 이전에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얼굴을 굳히고 존댓말까지 쓰면서 정색한다.
“고민도 안 하고 딱 잘라 안 가도 된다고 하시길래, 농담 좀 해봤습니다. 제가 하루 이틀 이러는 것도 아닌데, 표정 풀어요.”
“···자기 입으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말과는 달리, 세르펜스가 ‘하긴, 그렇기는 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무 순순히 이해하고 넘어가니, 괜히 더 찝찝하다.
“농담이긴 했지만, 참가는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상대방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와줬는데, 가봐야 그 속셈을 알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일대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보좌관들도 있는데 바로 수작을 걸어올까요?”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잖은가.”
보좌관들만 따로 모이는 데다가, 그 장소가 아르젠토 공작저라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경계하는 태도다.
“어차피 거절한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잖습니까. 핑계를 대고 불참을 표한다면 제게 시간에 맞추겠다고, 저더러 날짜를 잡으라고 할걸요? 끌려다니다가 마지못해 참가하는 것보다 그냥 깔끔하게 바로 하는 게 나아요. 그걸 뻔히 아는 사람이 왜 이래요?”
“능력도 없으면서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겁도 없이 구는지···.”
“세르펜스 믿고?”
세상 강한 녀석이 내 걱정을 이렇게 해주는데, 든든하지 않을 리 없다.
내 대답에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그자는 물론, 그 누구와도 일대일이 되는 상황은 피하도록. 적당한 거리도 유지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돌아와라.”
“저, 그런데 오늘 당장 가는 거 아니거든요?”
예정일까지 매일 잔소리를 듣는 게 아닐지 벌써 걱정이다. 얘 왜 이렇게 걱정이 늘었지?
* * *
모임 날짜는 주말이었다.
평일에는 각자의 업무가 있으니,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함인 듯하다. 동시에 일을 핑계로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목적도 겸할 테고.
나는 세르펜스가 내어준 프라시더스 가문의 마차를 타고 아르젠토 공작저로 향했다.
공작저에서 고작 보좌관 모임에다 잘도 공간을 내줬구나 싶어 질문했더니, 이전까지의 모임이 프라시더스 공작저의 연회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라는 답을 얻었다.
‘당시에는 업무의 일환으로 열었던지라, 기꺼이 장소를 내어줬다나?’
한스와 사용인들도 시중을 드는 척, 대화를 주워듣고 정보를 모으는 데 일조했다는 모양이다.
사정이 달라졌지만, 이전 모임을 주최하던 공작가의 보좌관이 공작의 허락을 받아 공작저에서 모임을 열었다.
팔숨 경 또한 그러할 수밖에 없겠지.
장소를 따로 대관할 수 없었다기보다, 자기의 위신을 위해서다.
“어서 오십시오, 리벨론 경.”
일부러 적혀있는 시간에 거의 맞춰서 도착했던지라, 이미 모든 보좌관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다른 보좌관들과 대화를 나누던 팔숨 경이 내가 입장하자 바로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팔숨 경.”
그 손을 슬쩍 맞잡았다가 바로 빼내려 했으나, 그가 빠져나갈 수 없게 손을 꽈악 잡았다.
근 50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 그런가, 악력이 장난 아니다.
‘악수 신경전이라 이건가?’
나도 밀릴 수 없어서 최대한 힘을 꽉 주었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는 것인지, 그냥 버티는 것인지.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포마드로 넘긴 그 머리카락처럼, 표정 또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웃음을 유지하고 있다.
‘이거 언제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 거지?’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긴 한데, 손아귀가 슬슬 아파져 온다.
“이전에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좋은 뜻으로 한 이야기였으나, 리벨론 경의 말을 듣고 돌이켜 보니 오해할 만한 발언이었다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싶습니다.”
결국 내가 말을 비꼬아 들었던 게 원인이니, 이제 적당히 퉁치고 없었던 일로 하자는 뜻일 테다.
“그때가 언제 적 일인데, 아직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저는 진작 털어냈으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작년 7월이다. 무슨 놈의 생각을 9개월씩이나 한단 말인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좀팽이 같다는 말을 돌려 했는데도, 그의 표정은 조금도 일그러짐이 없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용서랄 게 있나요? 다 오해에서 벌어진 일인데.”
“하하하! 맞습니다.”
드디어 그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잽싸게 손을 빼내었다.
‘신개념 답정너도 아니고, 제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까지 안 풀어줄 생각이었나?’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이 자리에 세르펜스가 있었다면 바로 치료해달라 징징대고 싶을 정도로 저릿저릿하다.
“리벨론 경과는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서로를 무시하고 지낸 기간이 너무 길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나오는지 의문이 들었다.
“리벨론 경 또한 제게 묻고 싶은 것이 많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우리의 대화를 속 편하게 구경하고 있던 투스토르를 향했다. 눈빛을 받은 투스토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긴, 본인이 욕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걸 어디다 얘기했겠어.’
주변이 떠들썩했기에 묻힐 줄 알았는데, 오러나 신성력 등을 수련한 자들이 많아서 그런가. 그때의 대화를 들은 사람이 있었나 보다.
테라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눴어야 했는데.
내 입으로 그를 욕한 것은 아니나, 그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는 거로도···.
‘잠깐만. 근데 팔숨 경은 날 직접 욕했잖아?’
괜히 미안해질 뻔했다.
“같은 공작가의 보좌관으로서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팔숨 경께서는 저에 대해 아주 잘 아시는 듯하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듣자 하니 벌써 프라시더스 공작님께 대단한 신임을 받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유능하신 분이시기에 그런 게 가능했던 건지, 진작 친해지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상하다.
조금의 꼬임도 없이 내가 유능하다고 칭찬을 해주는 것 같은데 기묘하게도, 비꼬는 말을 들은 것처럼 심장이 따끔거린다.
“팔숨 경이야말로, 아르젠토 공작님께서 친아들보다도 아끼신다는 얘기가 자자하시던걸요? 그 비법이 궁금할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듯한데···.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그가 도중에 말을 잠깐 끊었다가 주변을 휘휘 둘러본 후, 다시 이었다.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지 않으냐는 뜻이다.
“주최자가 자리를 막 비우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주최자라고는 하나, 저 역시도 한 명의 보좌관일 뿐. 그렇게 격식 있는 자리도 아니고, 모두가 편히 즐기기 위한 자유로운 모임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자유로워도 자리를 빠져나가는 건 아니죠. 만약 다들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버리면 그게 무슨 모임입니까? 그대로 해산하자는 거지.”
세르펜스에겐 속셈을 알아보겠다는 식으로 말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따라나서는 게 맞았다.
하지만 조금 전 신경전의 결과···.
‘얘, 나보다 많이 쎈데···?’
최근에야 운동하기 시작한 시온의 힘과는 비교도 안 될 것 같다.
세르펜스의 경고도 있었고, 괜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 깝치다간 아차 하는 순간에 제압당할지도 모른다.
계획을 전면 수정해서 대충 간만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도 그렇군요. 리벨론 경의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다들 저희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눈치요? 제가 보기엔 그냥 공작가 보좌관들의 자신이 모시는 상관에게 신임받기 위한 꿀팁 대방출 시간인 줄 알고 귀 기울이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
“좋은 정보는 다 같이 나누는 게, 서로 돕고 사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나는 날름 연회장 중앙에 놓인 좌석에 앉아, 팔숨 경에게도 이리 와서 앉으라는 뜻으로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