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4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47화(147/1105)
147회
31. 공작가 동상이몽 (10)
피차 연기라는 걸 뻔히 아는데. 그렇게까지 과장하면 부끄럽지도 않은가?
어쩜 저리도 태연한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발걸음마저 멈춰 섰다.
“갑자기 왜 그러···, 아.”
나를 따라서 황궁의 복도 한복판에 멈춰 선 세르펜스가 말을 하다 말고,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그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뒤에 뭐가 있나?’
돌아보니 아르젠토 공작과 팔숨 경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차가 세워진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같은 복도를 지나야 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길이 겹친 거려니 하고 넘기기에는, 아르젠토 공작의 시선은 정확히 세르펜스에게 꽂혀있었다.
“프라시더스 공작. 시간이 괜찮다면 잠시 대화를 나누지 않겠소이까?”
아니나 다를까, 그가 세르펜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공작씩이나 되는 인물이 눈 좀 마주쳤다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할 리는 없고. 용건이 있는 게 틀림없다.
분명 내가 멈춰 서지 않았더라도 세르펜스를 불러 세웠겠지.
“네, 괜찮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택에 초대하여 식사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었으나, 아시다시피 저택 꼴이 말이 아닌지라···.”
뭐야, 진짜 밥 먹자는 얘기···정도가 아니라, 밥을 얻어먹고 싶다는 소리인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공작저를 나설 때만 해도 중천에 떠 있던 태양이 벌써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해합니다. 그럼 프라시더스 가의 저택으로···.”
“허허, 미리 연락도 드리지 않고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팔숨 경에게 듣자 하니, 저번에 리벨론 경과 함께 방문했던 레스토랑이 상당히 괜찮았다고 하더이다. 예약을 해두었으니, 그곳에서 자세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용건이 있는 것이 맞았다.
무슨 놈의 식당 예약을 텔레파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막 회의를 마치고 나왔는데 예약을 언제 했겠는가.
자문회가 시작하기 전에 미리 해뒀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아르젠토 공작의 저녁 식사 초대는 분명한 목적성을 띠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까 아르젠토 공작이 자문회에서 보였던 태도에 관해서, 세르펜스에게 제대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바로 본인이 등판할 줄이야.
전혀 반갑지 않았다.
“예, 좋습니다. 저도 시온 경에게 그 얘기를 들었던 터라, 언젠가 방문해 볼 예정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프라시더스 가에서 예약을 잡았다기에 당연히 방문 경험이 있으실 줄 알았는데, 아직이셨나 봅니다.”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너무 나태한 것도 문제지만, 프라시더스 공작처럼 젊은 나이에 너무 일에만 매진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청춘이 아깝지 않습니까?”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프라시더스 공작가의 정보원들이 묶이면서 세르펜스가 얼마나 뛰어다녔는지를 생각해보면, 아니꼬운 얘기다.
하지만 그 말 자체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벌써부터 악마 숭배자들이 기승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며 더욱 못살게 굴 테다.
그 전에 세르펜스는 여유를 갖고, 충분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마침 이렇게 좋은 기회가 닿았잖습니까. 오늘을 위해 아껴둔 거라 생각하면 조금도 아깝거나 아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깝고 아쉬워서 그런다.
사람이 어떻게 매일 앞만 보고 살겠는가.
‘가끔 뒤도 돌아보고 그럴 때, 추억 거리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데.’
추억할 것이 있기에 더 그립고 허전할 때도 있지만, 그것조차 없었다면 얼마나 공허하고 외로웠을까.
과거에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있기에,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가게의 위치는 이미 아실 테니, 그 앞에서 만나는 것으로 합시다.”
“예, 그럼 잠시 뒤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설마하니 거기까지 한 마차를 타고 같이 가나 했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각자 가문의 마차가 있는데, 굳이 불편하게 껴서 갈 필요는 없었다.
고작 네 명 탔다고 좁거나 불편하다고 느낄 만한 넓이는 아니지만, 심적으로 불편하다.
‘세르펜스와 나눌 얘기도 있고···.’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의자의 커버를 들춰서 그 아래에 숨겨두었던 방음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아르젠토 공작이 마법 발동을 눈치채긴 하겠지만, 대화 내용을 공개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까 고개 저었던 건 뭡니까? 설마 아르젠토 공작이 팔숨 경이 악마 숭배자와 결탁했었다는 것을 알면서 눈을 감아주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아마도.”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듯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진짜···요? 세르펜스에겐 거짓말 탐지 기능이라도 탑재된 겁니까? 연기인지 아닌지 다 알아보나?”
“··· 본심이 전혀 담기지 않고 꾸며낸 감정 표현이라면 어느 정도는. 모든 거짓과 진실을 구분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세르펜스가 잘 말하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그렇게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어나갔다.
“선우, 당신에게 속는 일도 없었겠지.”
···그러고 보니 그랬던 과거가 있었다.
“반쯤은 세르펜스가 속고 싶어서 속은 거 아닙니까? 이제는 다 아름다운 추억이죠.”
“아르젠토 공작의 경우, 연기라기보다는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봐야 할지···.”
“······.”
세르펜스가 너무 자연스럽게 내 말을 못 들은 척 넘어가서, 내가 속으로 생각만 한 줄 알았다.
민망함을 애써 감추려 하는 표정이 아니었더라면, 다시 한 번 말해줄 뻔했다.
“까짓, 넘어가 줄게요. 봐야 할지, 그래서 뭐요?”
“···모르는 건가?”
나는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는데, 녀석은 순순히 말할 생각이 없나 보다.
‘그걸 네가 왜 모르지?’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진짜 모르는 거냐고 묻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아, 뭔데요?”
“···비슷하잖은가.”
답답해서 세르펜스를 다시 한 번 채근했더니, 그가 괴이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뚱맞은 소리는 덤이다.
“비슷하다니, 뭐랑요?”
“선우의···. 좀 더 면밀히 따져서 말하자면, ‘세미타 거리’에서 악마 숭배자를 대하던 당신의 행동과···?”
“도대체 어디 가요?”
오늘 보았던 아르젠토 공작의 모습을 되새겨보았다.
아가리 파이터 기질이 다분하고, 여유 넘치는 말씨로 상대방의 속을 벅벅 잘도 긁어놓았다.
이간질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빈정거리며 도발할 때는 어떻고?
내가 악마 숭배자 입장이었다면, 속이 아주 뒤집혔을 거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선우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지금 누가 누구에게 양심의 안부를 묻는 겁니까?”
“내가 그대에게.”
유지스에게 세르펜스가 부르는 호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쭉 신경 써서 듣다 보니 깨닫게 된 건데···.
“세르펜스는 말이 뇌를 덜 거치고 나오면, 십중팔구는 ‘그대’라는 호칭을 쓰는 거. 본인도 아십니까?”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여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거나, 지금처럼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경우가 그러하다.
굳이 예외를 찾자면, 밀려 들어오는 청혼서 세례에 깊은 빡침을 느꼈을 때 정도?
‘아닌가? 그것도 나름대로 감정의 동요라고 볼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예외는 없었다.
“그런 건 모르겠고, 선우가 대화 도중 다른 길로 잘 샌다는 것만은 익히 알고 있다.”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진다.
그래도 그의 지적이 일리 있기는 했다. 이런 농담 따먹기는 저택에 돌아가서 느긋하게 나눠도 상관없다.
“···그래서 제 어떤 점이 아르젠토 공작과 비슷했다는 겁니까?”
지금은 아르젠토 공작의 속내를 파악해 두는 것이 우선이다.
저쪽에서 느닷없이 대화를 신청해 온 만큼, 그 정도는 미리 알아두어야 최소한 휘둘리지는 않겠지.
“지나치게 침착했다. 선우가 악마 숭배자로부터 이전의 보좌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자의 말에 당황하거나 의심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래서 그게 왜? 뭐, 어쩌라고.’ ···라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내 말투를 따라 한답시고 저렇게 말한 건가? 너무 껄렁한 것 같지 않아?
따지고 싶었지만, 자꾸 딴소리한다고 지적받은 것이 불과 1분 전이다.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자.
“더군다나 그자의 말을 이간질이라 딱 잡아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덮어주다 못해 은근슬쩍 정당화하려 들지 않았나?”
“···아니, 뭐. 제 전임자가 나쁜 놈이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갑자기 왜 변명을 하는 거지?”
“제 양심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죠.”
세르펜스가 눈을 흘겼다. 못 본 척하자.
“얘길 듣고 나니까, 좀 비슷한 것 같긴 하네요.”
“조금이 아닐 텐데?”
“그렇다 치죠. 그래서 세르펜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르젠토 공작의 팔이 안으로 굽어, 눈을 감아주는 것뿐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 또한 악마 숭배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인지···.
“···는 개뿔. 아무래도 그냥 덮어준 것 같은데요?”
“그렇게 혼자 답을 내릴 거면 어째서 내게 질문을 한 건가?”
불만스럽다는 듯 토를 달았지만, 따로 반박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세르펜스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나 보다.
사실 오늘 아르젠토 공작이 보였던 태도를 생각하면, 고민할 여지조차 없었다.
“곤란하게 됐군.”
세르펜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씹듯이 말했다.
“그래도 아르젠토 공작이 완전히 악마 숭배자인 것보다는 낫잖아요.”
“하지만 모르고 편을 드는 것과 알면서 덮어주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야 저도 알긴 아는데, 이제 와서 공작이 태도를 바꾸려 들까요?”
현재 상황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아르젠토 공작은 팔숨 경에게 속아 이용당한 피해자로, 팔숨 경은 그를 속인 가해자로.
둘을 아르젠토 공작가라는 하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하여, 따로 분리해 놓는 것이다.
‘아르젠토 공작가의 명예는 실추되겠지만, 그 정도쯤이야···.’
이 경우, 어디까지나 현 아르젠토 공작 개인의 문제다.
자식에 손주까지 있으니, 그가 가주 직에서 물러나는 정도로 눈 가리고 아웅 하면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역모와 악마 숭배는 연좌제가 적용된다.
현 아르젠토 공작이 악마 숭배자로 몰리면, 아르젠토 공작가까지 도매로 넘어가게 생겼다.
“공작가가 무너지면 곤란한 건 악마 숭배 세력이 아닌 제국이다. 공식적으로 많은 이들 앞에서 그렇게 두둔한 이상, 황제가 나서서라도 덮어줘야 할 거다.”
저 말은, 아르젠토 공작이 아르젠토 공작가를 인질로 삼아 뻗대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런데 [성검의 주인]에서 황제가 세르펜스를 탄압하려 했던 건 반쯤 확정 난 사실 아니었습니까?”
“내부적으로 억제해서 고립시키는 것과 악마 숭배자로 몰려 가문이 통째로 날아가는 것이 어디 같은가?”
“···다르긴 하네요.”
전자라면 그 힘과 세력을 야금야금 빼앗아 천천히 흡수시킬 수라도 있지.
후자라면 공작가가 가지고 있던 거대한 힘이 주인을 잃고 한순간에 풀려나 버린다.
‘신성 제국으로서의 위상이 떨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떨어진 콩고물들을 주워 먹기 위해 너도나도 몰려들어, 서로 박 터지게 싸워댈 테다.
그마저도 온전히 회수되지 못하고 대부분 손실되거나, 악마 숭배 세력이 혼란을 틈타 집어삼킬 수도 있고.
“대체 무슨 생각이래요?”
“···그건 당신이 잘 알겠지.”
“제가요?”
“선우도 똑같은 행동을 했잖은가.”
행동이 비슷했다고, 결과와 목적까지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그때와 지금은 그 규모부터가 다르잖습니까? 공작 가문 하나가 통째로 걸려있는데!”
“내 쪽에는 대륙이 걸려있는 것 아니었나? 규모라면 선우, 당신이 훨씬 더 크다.”
“듣고 보니 그렇···, 그런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마터면 그의 말에 현혹되어 넘어갈 뻔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국이 공작가를 버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걸었다고 보기에도···.”
“사실 이제 와 말하는 건데, 세미타 거리에서는 제가 언제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기왕이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어서 닥치고 덮어둔 것에 불과합니다!”
“···꼭 그때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나를 부정할 때, 선우는 나조차 외면했던 나의 편을 들어주었잖은가.”
“아, 그거.”
진작 그렇게 얘기해주지.
난 세미타 거리에서 악마 숭배자와 나눴던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줄 알았지···. 사람 무안하게스리.
“그런 거라면, 저는 그냥 세르펜스가···.”
많이 안타까웠다.
사실 아직도 그러하고, 그가 남들과 다름없이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날이 오더라도.
그의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기에, 계속 아픈 손가락으로 남을 거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이쯤 되면 세르펜스의 5할은 내가 키웠다고 봐야 하는 거 아냐?’
남은 5할은 아직 덜 큰 몫이다. 마저 잘 키워야지.
“···그런데 세르펜스는 제가 왜 그랬는지, 이제는 잘 알지 않습니까? 이미 머릿속에서 답을 얼추 내려놓고 저에게 떠넘기려 하지 마시죠?”
팔숨 경의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서 자식을 팔아넘기려 했던 인물이다.
과연 그 외의 부분에서 아이들에게 애정 비슷한 것이라도 주었을까?
‘그가 악마 숭배자의 도움을 받아들일 정도로 심적으로 몰려있었다면, 그것이 티 나지 않았을 리 없고.’
아르젠토 공작이 그를 자식처럼 여기고 있다면 말 다 했지.
그에게도 아픈 손가락인 거다.
나라도 세르펜스가 과거의 업에 의해 곤경에 처하게 된다면.
그리고 내게 그를 도울 힘이 있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그를 도와줄 것이다.
‘이제야 좀 세상 사는 즐거움을 알아가는 중인데···.’
그것이 더 안타까워서라도. 있는 힘껏.
“···그런 거라면 더 이해가 안 된다.”
“네?”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아르젠토 공작은 최근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자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르젠토 공작가에서 프라시더스 공작가를 견제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말대로다.
“그런데요?”
“그리고 그자는 지금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르젠토 공작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아…. 아르젠토 공작이 왜 그랬는지만 생각하다, 그쪽을 생각 못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