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6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64화(164/1105)
164회
34.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3)
우리는 더이상 그날 있었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라면 놀리지 못해 안달이었을 텐데. 유지스는 그저 작은 미소만 지어 보였을 뿐 말없이 넘어가 주었다.
셋이서 같이 식사를 하거나, 6월의 햇살을 맞으며 정원에서 차 마시는 시간을 갖거나 하며 평화롭고 한적한 나날이 이어졌다.
이윽고 세르펜스가 출정하는 날이 찾아왔다.
“세르펜스 님, 잘 다녀오세요.”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합니다.”
“염려 붙들어 매세요.”
세르펜스의 말에 유지스가 유자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과하게 으스대거나 위축된 구석 없이 담담한 대답이 무척 믿음직스럽다.
그렇게 느낀 것은 세르펜스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 가만 보면 은근히 유지스도 믿고 있단 말이야?’
고양이에 비유하자면 ‘내게 먹이를 주는 것은 허락했지만, 쓰다듬는 건 아직 이르다.’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본인이 길들여져 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건지, 자각하지 못한 것인지.
발치까지 다가와 간식을 받아먹으면서 살살 눈치를 살피며 거리를 재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공작님.”
그런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배웅의 인사를 건네자, 너나 조심하라고 말하는 눈빛이 내게 닿았다.
‘지금 위험한 곳에 가는 사람이 누구더라?’
작년에 저가 없을 때 악마 숭배자가 숨어들어 편지를 두고 간 사건 때문일까?
자신과 정예 기사들이 빠졌을 때를 가정한 공작저의 경비를 몇 번이나 점검하고, 유지스까지 저택에 붙여 놓은 주제에.
‘어제는 내게 사고 치지 말고, 수상한 사람을 따라나서지 말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더니···.’
누가 들으면 내가 트러블 메이커인 줄 알겠다.
오죽하면 유지스가 나를 사고뭉치 바라보듯 하기 시작했을까. 억울해 죽겠네.
어쨌거나 세르펜스는 원정을 떠났고, 공작이 자리를 비워도 공작저의 시간은 돌아갔다. 물론 업무도 말이다.
나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행정실에서 근무하였다.
그동안 유지스는···.
“자상하고 부드럽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 좋죠. 하지만 악인에게는 냉정하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모습이 더 멋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아니죠. 공작님은 슬픈 눈으로 악마 숭배자를 처단하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또 하나의 생명이 사그라진 것에 슬퍼하시는 모습이 잘 어울려요!”
“그래도 저는···. 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 따스한 얼굴이 차갑게 변하기에, 그것이 훨씬 더 값진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잠시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에 나왔다가 보지 말아야 할 광경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세르펜스의 갭 모에를 설파하고 있었다.
상당히 친근해 보이는 것이, 제온을 지치게 하고 솔레르티아가 치를 떨었던 공작저의 신고식을 매우 훌륭하게 통과한 모양이다.
“···그, 그런 건가요?”
“네. 처단해야 할 자들에게는 한없이 냉혹하고 날카롭기에, 지켜야 할 사람들에게 보이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훨씬 돋보이는 거죠.”
“아···!”
그냥 통과한 정도가 아닌 것 같다.
갑자기 군대에서 만났던 중증 오타쿠 선임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길, 모름지기 덕질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줘야 하는 법이라 하였다.
대체 군대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으나, 정말 틈만 나면 그 소리를 해댔다.
“시온, 어디 가시나요?”
“···화장실 갑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대화 나누세요.”
그러한 까닭에, 나는 방금 본 광경을 못 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그동안 세르펜스의 이미지가 너무 편향되어 있긴 했어.’
이번 기회에 좀 더 다채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세르펜스에 관한 캐 해석으로 ‘전통 공작저 계파’와 ‘신흥 유지스 계파’가 맞부딪히며 공작저에 피바람이 불어 닥칠까, 그게 걱정이다.
‘하지만 그 중심에 서 있는 게 유지스이니 만큼, 그런 일은 없으려나? 알아서 조화롭게 잘 버무려 주겠지, 뭐.’
업무 시간 외에는 구베르노 행정관이 뽑아준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썼다.
작년과 달리, 이번에는 업무 관련이 아니라 교양서적이었다. 내가 그럭저럭 업무에 잘 따라가고 있다는 방증(傍證)이다.
유지스도 초반 이틀가량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듯하더니, 슬슬 지겨워졌는지 오늘은 테라룸 왕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주류(酒類) 카탈로그를 뒤적거렸다.
도수가 높은 술들 위주로.
원래 관심이 많았다기보다는 이제부터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저번 술자리가 재밌었나 보네.’
엘프들끼리 술자리를 가져봐야 약간의 알딸딸함이 추가될 뿐.
차를 마시는 자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녀에게 듣기로, 혼자 아르케 왕국을 떠나 밖으로 나온 것은 우리를 만났을 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전에는 외국 사절 차 방문한 것이 전부라나?’
그 때문에 이동도 다른 엘프들과 단체로 하고, 엘프 외 종족과의 교류도 공적인 사교 모임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녀에겐 여러모로 새로운 경험이었던 거다.
‘어쩐지. 이렇게 적응도 잘하고 눈치도 빠르고, 나이도···.’
아무튼.
그런 그녀가 그때는 이상할 정도로 사회 경험이 미숙했던 것처럼 보여 어째 기이하다 했더라니.
정말 사회 경험이 적어서였을 줄이야.
그렇다.
그녀는 그동안 겨울을 한 번도 안 보내 본, 온실에서 애지중지 자란 유자나무였던 것이다!
세르펜스 녀석이 피동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접하고 있다면, 유지스는 능동적으로 새로운 경험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셈.
‘저런 진취적인 자세를 배웠으면 했는데···.’
자기 계발이라고는 학문적 소양을 쌓는 것과 무력을 키우는 것밖에 배우지 못한 탓일까?
취미와 휴식과 관심사.
하다못해 길을 걷다 하늘을 한 번 바라보는 것까지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성장케 하는 밑거름이라는 것을.
어째서 그 누구도 그에게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녀석은 한 번쯤, 그 완벽해 보이는 틀을 깨고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거다.
한껏 긴장을 풀고 느슨하게 늘어져 보기도 하고, 잔뜩 헝클어져서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도 그에게는 경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읽던 책을 내팽개치고 그녀와 함께 카탈로그를 뒤적거렸다.
“···아까 그거 오늘 내로 다 읽으셔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참, 그러고 보니 위스키 봉봉 같은 건 어때요? 프뤼네 왕국의 특산품이라고 하더라고요.”
“내일까지 리포트 다 못 끝내시면 과제량이 두 배로 늘어나신다고···.”
“프뤼네 왕국은 추운 나라라, 도수 높은 술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그쪽 카탈로그도 구해봐야겠습니다.”
절대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것도 다 세르펜스를 위해서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시온, 너무 정색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뇨? 절대요!”
나는 절대로 찔리지 않았다.
공부하는 사람 옆에서 그런 것을 본 유지스가 나쁜 거다.
“시간도 늦었고 더 있다가는 시온이 공부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전 이만 제 방으로 돌아갈게요.”
그녀의 방은 내 방 바로 옆. 창문으로 넘나들기 딱 좋은 위치다.
세르펜스나 유지스나, 창문을 제2의 출입문쯤으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지스가 펼쳐놓았던 카탈로그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다행히도 긴급상황도 아닌 지금까지 창문으로 드나들 생각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내 손에 들린 카탈로그까지 뺏어 든 그녀가 문을 통해 정상적으로 방을 나갔다.
“하나는 남겨주지···.”
내 혼잣말은 분명 그녀에게 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빈 테이블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 똑, 똑, 똑.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그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섬뜩했을 일이다.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오면서도,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노크를 해줄 사람은 제온뿐이었다.
“네, 들어···.”
“위험해요!”
예의를 안 지킨 쪽은 욕실로 들어온 제온이 아니라, 열려있던 창문을 통해 소리 없이 들어온 유지스다.
그녀는 사뿐하게 바닥에 내려서는 것과 활에 화살을 메기고, 당기고, 놓는 일련의 과정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 팍-!
첫발은 견제용으로, 욕실 문을 열고 이제 막 방에 들어오려는 제온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화살은 그대로 욕실을 가로질러 타일로 이루어진 벽에 틀어박혔다.
화살대가 휘청휘청 탄력 있게 흔들리고, 깨진 타일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제온은 휘청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얘는 어째 내 방만 오면 쓰러지냐···.’
그 모습이 심히 안쓰럽다.
“부 집사님이셨던가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밤중에 몰래 남의 방에 숨어든 거죠?”
언제 화살을 새로 메겼는지, 유지스가 이번에는 제온을 바로 겨냥하며 말했다.
스산하게 빛나는 차가운 금속제 화살촉에 그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냥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제온은 현명하게도 ‘방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어떻게···?’와 같은, 수상해 보이기 짝이 없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문을 통해 들어오셔도 되는 것 아닌가요?”
정중하게 노크를 하고 바닥과 맞닿은 문을 열고 들어온 제온에게, 바닥에서 떨어진 창문으로 소리 없이 들어온 유지스가 따졌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며칠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두 분께서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해 보이지는 않던데, 무슨 개인적인 일이 있는 거죠?”
놀랍게도 그렇게 공작저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 누구도 시온과 제온이 혈연관계임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난 당연히 그들과 대화를 많이 하길래 들었을 줄 알았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그녀와 친하니 얘기를 했을 줄 알았는가 보다.
“저, 유지스?”
“물러나 있어요. 가진바 무력은 형편없어 보이지만, 숨겨둔 무기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몰라요!”
“···갑자기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번에 저랑 공작님이랑 부 집사님이랑 셋이 같이 돌아왔잖아요?”
“네, 들었어요. 시온의 동생이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나 그를 후견해주기 위해 본가에 내려갔다고요.”
“그럼 부 집사는요?”
“고향에 내려갔다고···.”
시위를 당기는 유지스의 팔에 힘이 살짝 풀렸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신 거 아니었나요?”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혹시나 ‘그럼 그때 누군가와 접촉했구나!’와 같은 음모론 적인 이야기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그 정도로 중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부 집사님은 제 동생입니다. 풀 네임은 제온 리벨론이고요.”
“아···, 리벨론.”
“그리고 그동안 친해 보이지 않았던 건, 제가 공작저에 취직한 이후에 제온이 들어온 거라 일부러 거리를 두는 중이라 그런 겁니다. 괜히 혈연이니 뭐니 해서···.”
물론 혈연으로 들어온 것이 맞았다. 세르펜스가 순순히 인정한 부분이다.
또한, 그것에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스만 해도 집사 자리가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구베르노 행정관도 손자를 꽂아 넣지 않았는가.
“아, 아아-. 네. 이해했어요.”
아직 세상의 때를 덜 탄 유지스가 얼른 화살을 회수하고 제온을 일으켜 세웠다.
“죄송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상한 통로 같은 것을 통해 방으로 올라오시길래, 너무 수상해서 그만···.”
“괘, 괜찮습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제온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작은··· 동생에 관해 할 말이 있어서.”
“그래, 그래. 작은 요정처럼 귀엽고 깜찍한 비비 말이지?”
“···어.”
내 딴에는 어떻게든 무마시켜 주려던 것이 그만···.
졸지에 제온은 자신의 동생을 칭할 때마다 작은 요정 어쩌고 하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심각한 팔불출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