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19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199화(199/1105)
199회
40. 공작님과 실종 사건 (4)
나와 녀석의 업무 속도나 집중력 등을 고려해 봤을 때. 세르펜스가 처리해야 할 일이 나보다 많더라도 녀석이 먼저 일을 끝냈어야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항상 비슷한 시간에 일을 끝마쳤고, 그러고 나서 함께 연무장에서 체육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냥 녀석이 내 속도를 맞춰주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니까, 쉬엄쉬엄 놀면서 일하는 줄 알았다고! 나처럼 중간중간 몰래 딴짓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처음에는 어색해하였지만, 요즘엔 퇴근 후 서재에서 편하게 쉬고 장난치다 보니 그놈의 일 중독도 나아진 줄 알았더니.
살짝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자식은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쉬지도 못하나?!’
녀석이 (스물) 다섯 살이 아니라 그냥 다섯 살이었다면 장난감이라도 쥐여주고 혼자 놀으라고 했을 텐데···.
아무리 세르펜스라도 블록 쌓기 같은 건 안 하겠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정히 할 게 없다면 낮잠이라도 자면 되지. 세상에 놀 거 없다고 일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놀 돈이 없어서 일하는 사람만이 존재할 뿐.
“이건 다 압수입니다.”
“···하, 하지만.”
내가 서류를 착착 모아서 한쪽으로 치워버리자, 세르펜스가 간곡히 돌려달라는 눈빛을 보내며 손을 내뻗었다.
그런다고 내가 돌려줄 거라 생각했다면 명백한 오산이다.
“하지만이고 그치만이고 소용없습니다! 저도 이제 서류 볼 줄 알거든요?”
말해놓고 아차 한다는 얘기가 이럴 때 쓰이는 걸까?
세르펜스의 손을 밀어내며 단호하게 말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렇다 해도 방금 한 말은 역시나 괜히 한 것 같다.
내 사정을 아는 세르펜스는 별생각 없이 넘긴 모양이지만, 아직 집무실에 남아있던 한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가 않다.
취업 전에 당연히 알고 왔어야 하는 것을 이제야 배운 거냐고 속으로 욕을 진탕 하고 있겠지.
눈치 못 챈 척하자. 모르는 척하는 거다. 지금부터 내 눈치 레벨은 휴마누스 급인 거다.
“이, 이거랑 이거! 그리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나중에 해도 되는 거잖아요? 맞죠? 이건 행정관들에게 넘기고, 요건···. 좀 애매한데 제가 하면 되겠죠, 뭐. 나중에 확인만 해 주세요. 그리고 저건···, 지금 장난합니까?! 이봐요, 집사님! 여기 집사님 일도 있어요!”
“···예?!”
세르펜스의 책상 위의 서류를 멋대로 뒤적거리던 내 모습을 떨떠름하게 지켜보던 한스가 넋 빠진 소리를 냈다.
내가 한 번 더 서류를 흔들며 손짓하자, 그가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다가와 서류를 받아들었다.
“이건···. 제온 군에게 넘긴 업무 중 하나로군요.”
“그렇다면 부 집사님은 이걸 집사님이 처리하는 줄 알겠네요.”
“대체, 어째서···?”
예전처럼 집사 일을 한스 혼자 처리해왔다면 해야 할 일이 사라졌으니 그것을 찾아 헤맸을 테고, 들켜도 진작에 들켰겠지.
그러나 인수인계를 위해 일거리를 후임자에게 하나둘 넘기고 있을 때, 중간에서 몰래 일감 자체를 빼돌린다면 말이 달라진다.
세르펜스는 바로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제발 이딴 거엔 머리 쓰지 말라고!’
오죽하면 한스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볼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하고, 안 하는 행동이었다.
이내 자신의 시선에 담긴 불경함을 깨닫고 바로 눈길을 거두긴 하였으나, 손에 들린 서류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일이 없으면 그냥 쉬세요, 좀!”
“으, 으음···.”
이렇게 들킬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세르펜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다.
오늘 밤에 이불 꽤나 차겠네.
“그리고 집사님! 집사님은 집사씩이나 되어서 대체 뭘 한 겁니까? 고···옹작님께서 편히 쉬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집사의 의무 아닙니까? 예?!”
“그게···.”
“그게 뭐요? 면목 없다고요?”
“···네.”
“하이고, 그렇게 저를 핀잔하시더니. 그쪽이야말로 제대로 하는 게 뭡니까?”
“······.”
저런 사람은 고양이를 키울 자격도 없다. 집사 자격을 다 박탈해야 한다.
나는 팔짱을 끼고 한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며, 발을 까딱이며 앞꿈치로 바닥을 두드렸다.
구두 앞굽과 바닥에 깔린 카펫이 만날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집사님 일은 알아서 챙겨가시고, 저쪽에 쌓인 건 구베르노 행정관님께 가져다주시면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얼른 다 치워 버려요.”
“···네.”
“아까 말했던 보고도 잊지 마시고요.”
“알겠···, 습니다.”
뒤늦게 현타라도 온 걸까?
한스가 고분고분 대답하며, 내 업무로 따로 빼둔 것을 제외한 서류들을 몽땅 가지고 집무실을 떠났다.
축 처진 어깨가 마치 아이들이 한창 자라며 손이 많이 가던 시기에는 신경도 안 쓰고 나 몰라라 하다가, 애들이 다 크고 나니까 친한 척하려다가 퇴짜 맞은 가부장적 아버지의 뒷모습을 닮아있었다.
그 모습이 청승맞게 보일지언정 처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게 진작에 잘했어야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쯧쯧.”
방금 한스가 나간 문을 흘끗 보고, 혀를 차며 내가 처리해야 할 서류를 챙겨 내 책상으로 옮겼다.
언제나 서류가 수북이 쌓여있던 세르펜스의 책상이 휑하니 비워졌다.
유지스가 꽃이라도 갖다 놓아서 망정이다. 아니었다면 저 위에 놓인 것은 만년필 한 자루와 손수건 두 장이 전부였으리라.
녀석이 괜스레 손수건을 곱게 접어 책상 한구석에 얌전히 올려뒀다.
“아까 집사한테 손수건 세탁도 맡길 걸 그랬네.”
나는 다시 녀석의 자리로 가서 손수건 두 장을 챙겨 들었다.
이제 정말 그의 책상은 만년필 한 자루와 꽃병이 전부다.
“할 일 없으면 엎어져서···. 그건 자세가 너무 불편한가? 저쪽 응접실 소파에 누워서 낮잠이라도 자요.”
“아니다. 사양하지.”
“응접실이 싫으시면 책상도 비었겠다, 그 위에서 주무시던가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직 생각 정리도 안 끝났고···.”
녀석이 말 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세르펜스어 초심자라면 ‘그럼 생각이 끝나면 자는 건가?’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나, 그런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저 자식이라면 분명히 이 핑계 저 핑계를 만들어내며 내뺄 것이 분명하다.
“심각한 문제다.”
“알아요, 알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안다니까 그러네?”
녀석을 바라보는 내 눈초리에 담긴 생각을 읽었는지, 아직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세르펜스가 먼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 자. 그럼 형이 일하는 동안, 이거라도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셨죠?”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예이, 예. 찬찬히 생각하고 계세요.”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판 초콜릿을 하나 꺼내 흔들었고, 세르펜스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제에 초콜릿은 착실하게 챙겨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간식 얘기를 주방에 미처 못 했네. 알아서 올려보내 주려나?’
괜히 말했다가 애가 실망할지도 모른다.
우선 기다려보고 올라오는 간식이 없다면 아공간 주머니에 쟁여놓은 쿠키라도 꺼내면 되겠지.
“선우는 얼른 가서 일이나 하지?”
“아차, 내 정신 좀 봐!”
나는 급하게 자리로 돌아와 서류 작업에 착수했다.
한참 일하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세르펜스를 살피니 아주 가관이다.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초콜릿의 한 귀퉁이부터 야금야금 아껴먹는 모습이 나뭇잎을 갉아 먹는 애벌레가 따로 없다.
어디 그뿐이랴?
어디선가 꺼낸 또 다른 손수건으로 초콜릿을 감싼 후, 손가락 끝으로만 가볍게 그것을 쥐고 있었다.
초콜릿이 제 손의 체온에 녹지 않도록 한 조치일 테지.
“···초콜릿이라도 입에 물려주길 잘했네.”
우울할 땐 초콜릿을 먹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건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최소한 저 초콜릿을 다 먹기 전까지는 혼자 땅을 파고 내려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선우는 내 쪽일랑 신경 쓰지 말고 일에나 집중해라.”
“보채지 않아도 빨리 끝내고 놀아줄 테니까, 세르펜스야말로 얼른 숙제 끝내놓으시죠?”
역시나 아직 고민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하였는지, 녀석이 끄응 소리를 내며 초콜릿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저러고 나서 다 먹고 아깝다며 후회하는 거 아닌지 몰라?
* * *
세르펜스의 계획성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녀석은 초콜릿을 먹는 속도에 적당히 완급을 조절해가며, 간식이 올라오는 3시가 되기 정확히 10분 전. 초콜릿을 먹는 행위를 끝냈다.
남은 10분은 그 여운을 즐기고, 이후에 먹을 간식을 기대하는 시간일 테지.
그의 입술은 꾹 다물려있었지만, 턱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혀를 굴리며 입안에 녹진하게 배어든 초콜릿의 단맛과 잔향을 즐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곧 유지스도 올라올 텐데, 생각은 끝냈어요?”
“그건···, 후우─.”
그가 심란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기해 보겠다.”
“직접요?!”
결론을 내리기는 했으나, 아직 용기가 나지 않는지 녀석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딱 한 번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만일, 내가 얘기를 못 할 것 같다면···.”
“괜찮아요,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유지스도 차분하게 기다려 줄 겁니다.”
“······.”
애가 모처럼 큰 결심을 했는데 응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꼬리 말고 도망치겠다는 것을 도와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한 치의 물러남이 없는 내 태도에, 녀석은 벌써 후회스럽다는 얼굴로 빈 초콜릿 포장지를 꽈악 움켜쥐었다.
“너무 불안해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 만.”
나는 어물거리는 녀석과 눈을 맞추며 펜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10분간 남은 일을 모두 끝마치는 것은 무리다.
차라리 하던 일은 티타임 이후로 미루고, 지금은 세르펜스를 살피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유지스도 말만 안 했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요, 뭘.”
“그, 그게 무슨 소리지?”
세르펜스의 어깨가 흠칫, 크게 들썩였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세르펜스가 이제껏 성검의 주인으로 추켜세워진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산속에서 혼자 틀어박힌 것이 아니라면, 이 대륙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게다가 공작저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던데, 그러다 보면 자연히 제가 오기 전까지 세르펜스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도 전부 들었을 테고. 단 거에 이렇게 환장하는 사람이 간도 안 된 음식만 먹으면서 밤낮없이 일만 하고 살았다는데. 이상한 점을 눈치 못 채면 그게 더 이상하죠.”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
세르펜스가 입술을 앙다물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고 쉽게 결론을 내렸을 텐데, 하는 원망이다.
이럴 것 같아서 말을 하지 않은 거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어디 결심인가? 그냥 자포자기일 뿐이지.
“저도 짐작한 걸 세르펜스가 왜 모릅니까? 본인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한 거면서, 제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원래 아이란 그러하다.
부모의 깊은 속을 헤아려 볼 생각도 안 하고 원망부터 내뱉고 보지.
우리 아이는 언제쯤 커서 내 속을 알아주려나?
“아무튼.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라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 겁니다. 기왕 결심한 거, 마음 편히 가져요.”
“···알겠다.”
“슬슬 시간도 다 되었으니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죠?”
녀석이 여전히 속은 것 같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