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2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1화(21/1105)
21회
6. 공작님과 황궁 연회 (2)
저녁에 연회가 있더라도 낮에는 일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나는 오전은 물론 점심식사 후에도 세르펜스의 집무실로 향해야만 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집무실 문에 노크하자, 안쪽에서 세르펜스의···
“왔다, 왔어! 어서 들어와!”
···목소리가 아닌데?
차분하기 그지없는 세르펜스와 달리 활기차고 시원시원한 음성이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지라 누군가 싶어 살며시 문을 열어보니, 강렬한 색채의 머리통이 눈에 확 들어온다.
붉은빛이 감도는 금색···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어릴 적 키웠던 금붕어 색인데?
“네가 세피의 새 보좌관이구나?”
“아, 혹시 황태자 전하···?”
내가 알기로 [성검의 주인]에서 세르펜스를 ‘세피’라 부르는 건 오직 휴마누스 뿐이었다.
‘원작에서는 적황색이나 오렌지 골드라고 언급해서 대체 무슨 색인가 했더니···.’
은청색 머리칼인 세르펜스와 함께 있으니, 둘의 차이가 무척이나 극명하다.
머리카락 색뿐이 아니다.
세르펜스가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리한 느낌의 중성적인 미인이라면, 휴마누스는 잘생겼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선이 굵은 미남이다.
“오? 잘도 알아봤군. 어디서 날 본적이라도 있는 건가?”
“공작님과 전하께서 친하시다고 들은 적이 있어서 찍어봤습니다.”
“그래, 내가 세피와 많이 친하긴 하지! 자네, 뭘 좀 아는구나?”
휴마누스의 뒤편으로 보이는 세르펜스는 절대 아니라는 표정이다.
물론 휴마누스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로 바뀌었지만.
원작에서 항상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던 둘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어딘가 신기했다.
“사실 저 녀석, 저래 보여도 친구가 나 말고는 하나도 없거든. 내가 놀아주는 거다?”
굳이 비밀 얘기라도 하듯 손으로 입가를 가려놓고, 다 들리는 크기로 킥킥대며 장난스레 말한다.
저런 행동에 보통의 친구라면 반박을 하거나, 욕이라도 하면서 투닥거리고 장난쳤을 텐데.
세르펜스는 그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봤지? 재미없는 거. 저래서 친구가 나밖에 없어.”
“아시다시피 저희 공작님이 원체 수줍음이 많으시잖습니까? 어쩔 수 없죠.”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말하자, 휴마누스가 킬킬 웃으며 내게 어깨동무를 한다.
“하하하! 꽤 재밌는 녀석이 들어왔잖아? 너 좀 맘에 든다?”
“예, 저도 전하와 잘 통할 것 같습니다!”
원래 둘이서만 노는 것 보다, 여럿이서 몰려다니는 편이 더 즐거운 법이다.
기차에서도 솔레르티아와 셋이서 놀 때 꽤 즐거웠었지?
휴마누스라면 분위기 메이커로서도 손색이 없다. 더군다나 세르펜스에게도 호의적인 인물이니.
원작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아군으로 만들어야 할 인물 1순위다.
“좋다, 좋아. 내가 준비한 선물이다!”
몰래 촌지라도 건네주듯, 휴마누스가 두루마리 형태의 종이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받아들여 펼쳐보니, 작위 임명서였다.
‘이런 걸 이딴 식으로 준다고?’
어이가 없긴 했으나, 권위 의식이나 허례허식 같은 것을 좋아하지 휴마누스의 성격을 떠올리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필요한 순간에는 좌중을 압도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활달하고 자유로운 영혼이다.
‘애정을 듬뿍 받은 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세르펜스가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다면, 휴마누스는 친근하고 유쾌한 이미지로 뭇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시온 자작, 부족한 친구지만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그가 짐짓 엄숙한 척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친구 앞이라 이러는 건가? 아직 분위기가 밝았던 소설 초반의 묘사보다도, 훨씬 더 장난기가 넘쳤다.
“그런 염려 마시고, 자주 찾아오셔서 우리 공작님과 놀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도 여유만 있다면 그러고야 싶지···.”
그렇게 말하는 휴마누스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햔량같은 행동과는 달리, 황태자라는 직위 탓에 꽤나 바쁜가 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사교 모임을 죄다 빠지고 있는 세르펜스와 달리, 휴마누스는 황제가 됐을 때를 대비하여 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느라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황제를 도와 국정도 일부 보고 있을 테고.
“그나저나 세피, 너 보좌관 하나 맘에 들게 잘 뽑았네! 전 보좌관은···. 아니, 미안. 네 앞에서 말할 건 아니었는데. 내가 실언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세르펜스에게 죽은 보좌관 이야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휴마누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중간에 말을 끊고 바로 사과했다.
‘대체 전 보좌관이 어땠길래, 다들 전 보좌관은 어떻고 하면서 운운해대는 거지?’
모르긴 몰라도, 한스 그 양반처럼 원리원칙을 들먹이며 깐깐하게 굴었음이 틀림없다.
“그보다 전하께선 제 임명서 때문에 오신 겁니까?”
“한, 4분의 1쯤은? 겸사겸사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럴 테다.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고작 자작 위를. 그것도 다른 이의 보좌관에게 직접 내리러 찾아온다는 이야기는 듣도보도 못했다.
“저는 이따 저녁 연회에서나 뵐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내 말에 휴마누스가 세르펜스는 연회에 가면 나이 많은 귀족들이랑 어려운 이야기만 해서 어울리기 힘들다며 혀를 찼다.
“나처럼 젊은 나이대와 함께 하는 게 훨씬 즐거울 텐데 말이야.”
“전하께서 어울리는 분들은 젊은 영애들뿐이잖습니까.”
“하하하, 내가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미안, 세피가 끼어들긴 좀 힘든가?”
약혼녀가 있는걸 알고 있는데 저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세계를 구하는 여행을 다닐 때도 하렘을 차리던 사람이다.
일부다처제 사회이기도 하고, 제 버릇 개 못 주는 거겠지.
그보다 세르펜스는 끼어들기 어렵다니, 이건 또 무슨 얘기지?
“공작님께서 여성분들을 어려워했던가요?”
적어도 솔레르티아와 있을 땐 그런 기색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 의문을 담아 휴마누스에게 물으니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시온 경, 혹시 모르는 거야?”
“리벨론 경께서는 다소···. 상식적인 면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경향이 있습니다.”
나를 바라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휴마누스의 모습 뒤로, 질색하는 표정의 세르펜스가 보인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설정을 잊지 않고, 무식하다는 이야기를 어떻게든 포장하려는 척하는 게 더 얄미웠다.
“시온 경, 잘 들어.”
“네, 네?!”
휴마누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두 눈을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성검의 주인 자격. 알고 있어?”
“성검이 나타나던 해에 태어난 신성력 보유자···잖습니까?”
“그거 말고는?”
그 외에는 ‘신성력이 가장 강대한’ 이란 조건이 있긴 한데, 이건 깨질 예정이다.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지만, 이 타이밍에 이걸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룩스메아 교단의 신관들은 혼인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것은 알고 있다.
원작의 결말에서도 휴마누스의 여행을 거치며 ‘성녀’란 이명을 얻게 되는 ‘리에나 G. 프레클라루스’ 또한 그러했다.
그녀는 최연소 추기경이 될 기회 대신 휴마누스를 선택했다.
이건 교단 내 직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사항으로, 언젠가 교황이 사랑에 빠졌다며 돌연 자기 자신을 파문한 사건도 있었다나?
그 때문에 부랴부랴 새 교황을 뽑느라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때는 그 정도로 리에나가 휴마누스를 사랑한다는 걸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생각해보니 신성력은 유전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잖아?
가끔 격세유전이나 돌연변이처럼 느닷없이 나타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나 매우 드물었다.
어차피 결혼하든 말든 있는 신성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결혼 안 하고 신전에 들어간다고 없던 신성력이 생겨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신 룩스메아는 왜 이딴 규정을 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싶으면 속세와 인연을 끊으란 거야, 뭐야?’
그럴 거면 유전 형질을 띄게 만들지나 말았어야지.
아무튼 그런 탓에 제국의 대귀족들은 대대로 신성력의 명맥을 이어가며,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자식을 교단에 귀의시켰다.
물론 세르펜스처럼 가문을 이을 사람이 달리 없을 때는 제외다.
“그렇다는 건 설마···?”
소설 [성검의 주인]에서도 휴마누스는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연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주의* 본 소설은 전체 이용가 심의 규정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몰라서 하는 소리임?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그냥 주인공이 고자잖아ㅋㅋ] [다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ㅠㅠㅠ 작가가 모쏠이라, 주인공만 좋은 일 시키기 배 아파서 저러는 거잖아요. 불쌍한 사람이니 동정ㅋ해줍시다.]저딴 식의 댓글이 달렸었는데···. 참고로 난 마지막 의견에 동조했다.
아무튼, 그게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그래서 나도 레니에와 결혼도 못 하고···.”
여기서 레니에는 휴마누스의 약혼녀인 ‘레니에 T. 오풀렌스’를 말한다.
그나저나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해당 사항이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지켜야 한다는 거···맞나?
아까 휴마누스가 굉장히 남 얘기하듯 말했는데?
“약혼은 괜찮은 겁니까?”
“에이, 어차피 누가 선택될지 자명한데. 혼인 불가는 그냥 불문율 같은 거라 어쩔 수 없다지만, 그 외에는···. 그딴 걸 누가 지키겠어?”
그가 안타깝다는 눈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르펜스만 해도 성검의 주인이 될 자라면서, 별다른 직책도 받지 않은 상태.
그에 비해 휴마누스는 떡하니 황태자 위를 받았고. 성검을 염두에 뒀다면 그 또한 미뤘어야 옳다.
어차피 다들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 성검에 완전 신경을 끄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 선택의 날조차, 귀찮게 신전에 출석해야 하는 날 정도로 여기고 있는 거 아냐?’
그나저나 휴마누스가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저 나이 먹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나 했더니, 이런 뒷사정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저렇게 말하는 휴마누스도···.’
세르펜스는 그런 이유라도 있었지, 휴마누스는 결혼이 확정된 사랑하는 약혼녀도 있는데 뭐 하느라···.
‘그러고 보니 레니에의 세레명이 테나치아(tenacia. 완고, 고집)였지?’
그녀도 성검의 날에 태어난 신성력 보유자로, 어엿한 성검의 주인 후보자다.
융통성 없이 올곧은 그녀였으니, 고지식하게 그 규칙을 모두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려나.
다만 휴마누스는 카사노바 기질이 있고, 아까 대화만 들어도 연회에서 여러 영애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은데 아직이란 건···.
‘혹시 레니에한테 잡혀 사나?’
어느 독자가 [성검의 주인] 작가에게 ‘그래서 휴마누스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여주인공 네 명 중 누구예요?’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네 명 모두 똑같이 사랑합니다. 하지만 다섯 명 중 고르라면, 죽은 약혼녀인 레니에?]···라는 답변을 했었지.
게다가 휴마누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무척이나 약했다. 아마도 그녀의 고집에 맞춰주고 있는 게 아닐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그렇다고 면전에 대고 ‘님, 동정임? 어쩌다가?’라, 물을 수도 없잖아?’
괜히 찔러봤다가 경험 많은 척하는 휴마누스가 충동적으로 사고 쳐서, 성검의 선택을 못 받게 된다면 대륙은 망한다.
물어본다면, 선택의 날이 지나고 나서다.
‘정말 아직인 거면 무진장 비웃어 줘야지!’
물론 나도 아직이지만···.
아무튼 그런 조건 때문에 기차에서 세르펜스와 솔레르티아가 그다지도 태연했었나 보다.
솔레르티아가 말했던 ‘단둘’은 나와 그녀를 콕 짚어 지칭했던 거고.
세르펜스가 나를 불결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것은, 아마도 내가 그녀에게 이상한 생각을 품었다고 오해한 거겠지.
‘왜 원작에선 이런 내용을 안 다뤄줘서, 사람을 쓰레기로 만드는 건데!’
아니면 시온의 기억이라도 완전히 내 것이 되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치 종이책으로 된 사전 같은 느낌이라, 직접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 덕분에 내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이점도 있으나, 실이 너무 뼈아프다.
‘그런데 애초에, 성검이랑 그거랑 관련 있는 거. 확실하긴 한가?’
신성력이 가장 강대한 자가 성검에게 선택된다는 가정도 틀렸잖아?
‘영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찌 됐건 휴마누스는 제 약혼녀의 에스코트가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그런데 공작님은 이상형 같은 거 없습니까?”
“딱히 관심 없습니다.”
휴마누스가 떠난 뒤, 문득 궁금해져서 세르펜스에게 물었다.
매우 능숙하기 짝이 없는 빠른 속도의 답변이 저건 분명 준비된 멘트라는게 느껴진다.
자판기도 그것보단 느리겠다!
“진짜 없어요? 몰래 마음에 두고 있는 영애라던가, 저 정도면 내 취향이다 싶은 외모라던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성을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건 있잖습니까?”
“따뜻한 마음과···”
“그딴 가식적인 답변 말고!”
“···얼굴?”
하필?
세르펜스 얘는 성검 문제가 아니더라도 모태솔로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본인 얼굴이 뛰어나다 보니 평범한 수준은 눈에 들어차지도 않을 테니.
‘나름대로 가장 먼저 고려해 봐야 할 여건이 맞나?’
종일 그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화장실에서 거울이라도 볼라치면 너무 못생겨 보여서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혹시 그동안 보아왔던 여성 중 그나마 좀 예쁘장하다거나, 다른 이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 보인다거나 한 경우는 없습니까?”
“다들 비슷비슷합니다.”
하기야, 거울만 보면 천상계의 절세 미인이 있는데, 어디 인간계의 외모로 성에 차기야 하겠는가.
‘아···. 얘는 아마 안될 거야.’
내가 봤을 땐 인간 루트는 빠르게 손절하고 엘프 루트를 잡거나, 앞으로 등장할 여주인공 중 한 명을 가로채지 않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