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21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18화(218/1105)
218회
41. 공작가의 사람들 (6)
살짝 욕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시종이 떨어져 나간 방문을 수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화를 너무 일찍 끝냈나 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한스와 하하 호호 웃으면서 사담을 나누고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애초에 한스 그 양반과는 추억 비슷한 것도 없고. 다시 내려가도 뻘쭘할 뿐이다.
그냥 욕실에 들어온 김에 씻고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가볍게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나가니, 세르펜스가 바닥에 이불을 펼치고 그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왜 침대 놔두고 바닥에서 그러고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 주인을 밀어내고 내가 침대를 차지하는 건 이상하다.”
“···라고 집주인, 세르펜스가 말하였습니다.”
여태껏 침대에서 잘만 자놓고, 새삼스럽기 그지없다.
“세르펜스가 언제 바닥에서 자봤다고 그럽니까?”
“어렸을 때···, 기절도 잠에 포함되나?”
“될 리가 있겠냐?!”
세르펜스가 오늘따라 계속 헛소리를 해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녀석의 잠자리만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보장해주겠노라 속으로 다짐하며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어서 침대로 올라가세요, 얼른! 아니면 제 방에서 못 자게 할 겁니다?”
“방금은 내 집이라고···.”
“누가요? 제가요? 잘못 들으신 겁니다.”
녀석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쫓겨나는 것은 싫은 모양인지 순순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동안 방음 스크롤을 꺼내어 찢었다.
세르펜스가 자리에 누우려다 말고 멀뚱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느냐는 눈빛이다.
“아까 말을 심하게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따지려고요.”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군.”
“놀고 있네! 자신의 말이 어떤 식으로 들릴지 알고 말한 거잖아요. 지금의 자신이 없을 거라는 말 자체는 변화를 뜻할 수 있지만, 그 뒤에 존재의 의의가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것뿐이었다고 말한다면···.”
“······.”
과연 예상한 바가 맞았다.
녀석은 조용히 입을 다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저야 제가 없었다면 세르펜스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니까, 선택의 날이 끝나자마자 세르펜스가 자신의 목숨을 끊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 차라리 그러는 편이 더 나은 삶을 이어갔지.”
“세르펜스!”
녀석이 자조적인 말을 읊조리는 바람에 나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비명처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음처리를 미리 해 두어서 다행이다.
“그, 그러니까 세르펜스는, 지금···.”
“선우가 더 잘 알지 않는가. 당신이 없었더라면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그래서 꾸역꾸역 살아갔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그런 자신이라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세르펜스가 자살을 택했을 것이라 믿어주길 바란다. 뭐, 그런 겁니까? 다른 가정은 떠올리지 못하게?”
기껏해야 동정심을 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더니.
줄곧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넣고 다녔던 거냐고 따지는 말이 줄줄 흘러나왔다.
저놈의 자기혐오는 언제쯤, 어떻게 해야 나아질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되는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마왕이 선우가 아는 것과 같은 미래를 알고 있다면, 어째서 나를 계속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겠는가? 그만큼 내가···.”
“강해서겠죠! 어차피 뒤통수 치는 거야 알고 있으니 예방하면 그만이고.”
내 대답에도 녀석은 만족하지 못하였는지 이불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발버둥 친 건데, 그 방향성이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실수한 겁니다. 그 틈을 악숭이 놈들이 노리고 더욱 뒤틀어버린 겁니다. 상황이, 그리고 시기가 좋지 않았어요.”
내 말을 귀담아듣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마음까지 도달했는지는 모르겠다.
세르펜스는 무릎을 세우고 팔로 그것을 끌어안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만일 선우가 선택의 날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의 나를 만났다면···. 선을 넘은 이후의 나를 만났더라면. 그래도 지금의 나를 대하듯이 아껴줄 수 있는가?”
“그건···.”
“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당신이···. 그럴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불쌍하다고 동정을 하면서도, 내가 아닌 황태자의 곁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를 죽일 수 있도록 그를 도왔겠지.”
그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세르펜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세르펜스가 먼저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줄로만 알았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였다고는···. 이토록 마음이 여린 사람인 줄은···. 이렇게까지 외로움에 사무친 사람인 줄은 저도 몰랐다고요!”
멍청한 무능메아, 이럴 거면 [성검의 주인] 따위가 아니라 세르펜스의 어릴 적 일대기 같은 거나 보여주지.
그랬으면 첫 만남 때 그를 두려워하는 대신에 ‘우리 애 어쩜 좋아!’하면서, 울고불고 끌어안고 우쭈쭈 해주었을 거 아냐!
“그래서, 지금이라면 무언가 달라지는 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해도···. 이미 죄 없는 많은 이들을 죽이고 난 이후라면···.”
“그래도 지금의 저라면 세르펜스의 죽음이 아니라 회개를 바랄 겁니다.”
“···어째서?”
“어쩔 수 없잖아요!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잖아요?”
이제 와서 세르펜스가 가시를 바짝 세우는 모습을 보인다 한들, 그냥 뽀송뽀송한 솜털처럼 보일 뿐이다.
“어차피 세르펜스는 뻔뻔해질 수 없잖아요. 죄책감에 괴로워할 테고, 나서서 죗값을 치르기 위해 사람들을 도우려 하겠죠. 세르펜스는 잘 모르겠지만, 악의 간부가 회개해서 정의의 편에 서는 건 무진장 흔한 클리셰거든요.”
“또, 이상한 소릴···.”
세르펜스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잔뜩 찌그러뜨리고 좌우로 길게 늘인 입술의 꼬리는 내려간 것인지 올라간 것인지 불분명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세르펜스도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느니, 죽었을 거라느니, 그런 험한 말은 입에 담지 마요. 아니,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을 들으면 슬퍼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미안하다.”
“나중에 유지스에게도 사과하고요. 갑자기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리하겠다.”
에일리히에게까지 사과하게 시키는 건 힘들 것 같으니, 일단 이 정도로 넘어가자.
“그리고 세르펜스도 슬퍼하세요.”
“그건 무슨 뜻이지?”
“자기 죽음을 떠올렸을 때 슬프고, 서럽고, 억울하고. 자기 자신을 동정해 주었으면 한다고요.”
“···노력해 보겠다.”
“좋아요, 한 번 믿어보죠!”
바로 그러겠노라 말했으면 되레 의심했을 일이다.
약속은 지키는 녀석이니 앞으로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자! 그럼 호두 이야기인데요.”
“···갑자기?”
갑분호 상황에 세르펜스가 눈을 번쩍 뜨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울한 기분으로 잠들면 꿈자리도 뒤숭숭한 법이거든요! 그리고 세르펜스에겐 갑자기일지 몰라도 제게는 아주 심각한 얘깁니다.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전 잠도 못 자요.”
“그, 그건 안 된다.”
세르펜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침대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몸이 옆으로 틀어지며 세워서 접고 있던 무릎이 침대에 닿고, 최종적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자세가 되었다.
“무릎 꿇고 들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얘기는 아닌데요···?”
녀석이 깔고 앉아있던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바닥에 앉아있는 나를 보기 위해 침대 가장자리를 짚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는 터라, 경청하는 자세치고는 평소보다 자연스러운 자세가 되었다.
저기서 다리만 꼬면 완전 화보가 따로 없을 텐데.
“딴생각하지 말고, 어서 말해라.”
내가 딴생각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세르펜스가 나를 재촉했다.
“그럼 묻겠는데, 제게 호두는 왜 자꾸 먹이시는 겁니까?”
어째서인지 세르펜스가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호두를 주제로 무슨 기대를 한 건지 모르겠다.
“선우, 당신이 좋아하니까.”
“어디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완전히 명백한 악의가 느껴졌거든요?”
그런 이유였다면 내가 더는 호두를 먹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적어도 내 입에 호두 피낭시에를 욱여넣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먹는 것을 그렇게나 중요시하는 당신이 어떤 특정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잖은가.”
“딱히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별생각 없이 가볍게 흘린 말에 세르펜스가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솜사탕을 물에 씻기라도 한 것처럼.
열심히 노력했건만 손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흩어져 사라진 양, 허망하고 덧없다는 얼굴이다.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은 아니지 않아요?”
“···선우는 모른다.”
“제가 뭘 모르는데요?”
어처구니없다는 내 질문에 녀석이 눈을 흘겨 떴다.
“선우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챙기려 하지 않았는가. 간식도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챙기고···.”
“저도 맛있게 잘 먹고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얼마나 잘 먹었는지 살까지 붙어서 그거 빼느라 제가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안 먹고 똑같이 움직이면 빠질 거라는 걸 알지만, 눈앞에 두고 안 먹을 수 없어서 빼는 데 한참 걸렸다.
“뭣보다, 제가 먹고 싶은 건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있는데요?”
“···뭐?”
세르펜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마치 내가 밖에 나가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고양이의 털이라도 묻혀온 것처럼 배신감이 역력한 표정이다.
“세르펜스도 종종 봤잖아요, 제가 매운 거 주워 먹고 다니는 거.”
“내게는 추억을 운운하며 함께 즐기자더니···.”
“꼭 같은 음식을 같이 먹어야만 추억입니까? 게다가 세르펜스는 매운 거 못 먹잖아요!”
“그 정도 고통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매운맛에 익숙해져서 혀가 단련되면···. ”
“고통이라고 말한 순간 이미 글렀거든요?”
그냥 가볍게 얘기하려고 꺼낸 주제였는데, 어째 세르펜스는 더 울적해진 것 같다.
자기 전이라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 때문에 괜히 더 청승맞아 보인다.
“혹시 선우는 당신의 추억을 나와 나누고 싶지 않은 건가?”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요?”
“이곳에 오기 전. 시온 리벨론이 아닌 유선우라는 사람으로서 쌓아온 추억과 그 시간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 내가 그쪽 세계에서의 삶에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서···.”
어쩐지 집요하게 호두를 먹이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악의가 느껴진다 했더니, 삐져서 그런 거였나 보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럴 거면 제가 세르펜스에게 왜 제 본명을 알려주고, 불러달라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틈틈이 제가 살던 세계의 얘기도 해줬고···. 아, 그래! 제 진짜 생일도 알려줘서 그날 같이 케이크도 먹었잖아요!”
“하지만 초를 붙이지 않았잖은가.”
“뭐···, 유지스도 있었으니까요. 설마 고작 그거 때문에 이래요?!”
뭐지, 이 녀석. 어린애인가? 맞다, 어린애였지!
원래 어린애는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안 켜주면 무진장 서러워하는 법이다.
“하다못해 생일 선물이라도 제대로 챙겨 주고 싶었는데···. 선우는 그마저도 필요 없다고 하더니, 결국 효도권이라는 영문 모를 종이쪼가리만 받아가질 않나···.”
이건 얘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이 녀석은 효도권의 무서움을 모른다.
“세르펜스, 잘 들어요. 효도권은 엄청나게 대단한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물건인 줄 알면, 세르펜스는 분명 후회할걸요?”
역시나.
세르펜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잘 들어요, 세르펜스. 사실 효도권이라는 건 백지수표나 다름없는 물건입니다. 아니, 백지수표보다 훨씬 낫죠! 돈으로 땡 치는 게 아니라 무려 행동의 제약까지 걸 수 있는 물건입니다! 이런 걸 무려 열 장이나 뿌리다니! 하하하, 어리석구나!”
“···진심으로 기뻐 보여서 참 다행입니다.”
내가 통쾌하게 웃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르펜스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리를 침대에 올리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뭡니까 그 반응은?!”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자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 불이나 끄십시오.”
대충 이해는 한 것 같지만, 그 대신에 나를 무진장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흔히 있는 일이다. 그냥 잠이나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