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24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49화(249/1105)
249회
46. 공작님과 수상한··· (1)
“아···, 배고파.”
나는 허기짐을 느끼며 눈을 떴다.
방안은 어둑했으나, 커튼 틈새로 들어온 햇살 덕분에 지금이 한낮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자는 내내 악몽에 시달리는 건 아닐지 걱정했는데, 그런 꿈을 꿔놓고도 기억 못 하는 건지 어쩐 건지.
펑펑 우는 자괴펜스를 달래주는 꿈만 기억에 남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옆 침대에서 색색 잠든 세르펜스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얘보다 먼저 깬 건 처음 아냐?’
간혹 화장실 가려고 잠시 깬 것을 제외하면 처음이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악마와 싸우고 눈물도 펑펑 쏟아댔으니, 녀석도 알게 모르게 많이 피곤했겠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긴장이 풀린 탓도 있으리라.
나는 머리맡에 두었던 회중시계로 손을 뻗었다.
– 딸각
뚜껑이 열리고, 희미한 시야에 잡힌 시곗바늘은 2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짜로 푹 자 버렸다.
어쩜 이렇게 속 편히 잠들 수 있었는지, 눈앞에 보이는 세르펜스가 잠든 내게 신성력이라도 써준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으니, 원···.’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다가 시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제 문제는 이 녀석을 깨우느냐 아니면 내버려 두느냐인데···.
마음 같아서는 더 재우고 싶지만, 이미 점심때를 한참 지나쳤다. 씻고 옷 갈아입고 하다 보면 간식 시간이다.
지금을 놓치면 저녁 시간까지 애매해진다.
‘저녁 하니까, 어제저녁 토해냈던 도시락이···. 으으···.’
어쩐지 한두 끼 거른 것치고는 과하게 배가 고프더라니. 세 끼를 거른 셈이다.
살을 뺄 생각은 있었으나, 굶는 다이어트는 건강에 해롭다 하였다.
나는 이불 밖으로 발을 빼내어 세르펜스가 잠든 침대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올렸다. 무릎을 몇 번 굽혔다 펴며 침대를 흔들어대자, 녀석이 부스스 눈을 떴다.
“으으음···.”
“어서 일어나서 씻고, 뭐라도 좀 먹죠?”
“···얼마나 더 찔 생각이지?”
“잠 덜 깼어요? 지금 오후 두 시가 넘었습니다.”
내 말에 녀석이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자’가 올 거다.”
세르펜스가 엄중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여, 마왕이라도 나타난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녀석이 말한 ‘그자’가 그저 휴마누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휴마누스가 수도에 올라오면 공작저에 놀러 올 테니, 그 전에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제 욕실로 들어가세요? 창문으로 안 나가시고?”
“···대낮에 잠옷 차림으로 나돌아다닐 순 없잖은가?”
여기서 씻고 옷까지 갈아입겠다는 선언이다.
아주 그냥 가지가지 한다.
* * *
식사를 끝내자마자, 세르펜스는 암흑가 일로 보고서를 써야 한다며 집무실 책상머리에 들러붙었다.
‘휴마누스가 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나, 어쩐다나.’
휴마누스에게서 다섯 시쯤 찾아오겠다는 연통을 받긴 했으나, 그 어디에도 보고서를 작성해 두라는 말은 적혀있지 않았다.
즉, 세르펜스가 멋대로 커트라인을 만들어서 일하는 거다.
‘애초에 보고서를 왜 쓰는 거야?’
연통이 도착한 시간을 봤을 때, 휴마누스는 보나 마나 황성에서 황제를 대면하고 있을 거다.
사이좋은 부자지간이니, 만나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겠지. 당연히 암흑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같은 대화도 오갈 거고.
어차피 휴마누스가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어 댔을 텐데, 뭐 하러 귀찮게 보고서까지 작성해 올리는지 모르겠다.
‘그 시간에 자기 장점이나 생각해 둘 것이지.’
달리 생각하면 저런 착실한 점도 장점이긴 하다.
이러다 녀석이 찾아야 할 장점을 내가 다 찾아주게 생겼다.
“···일단 장기 출장을 다녀온 거잖는가.”
“네?”
못마땅하게 녀석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보고서 따위를 왜 작성하고 있느냐 한탄하는 중 아니었나?”
“어떻게 아셨담? 귀신이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세르펜스가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펜을 놀리며 코웃음을 쳤다.
원인 모를 패배감이 나를 놀리고 도망갔다.
‘이 자식,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
아무튼 녀석의 말은 지금 작성하는 내용은 악마를 처치했다는 보고이기 전에, 장시간 자리를 비운 것에 관한 보고라는 뜻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고서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경마장에서 악마가 소환되기 이전, 암흑가의 동태 등이 줄줄이 쓰여있었다.
“···설마 매번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런 걸 작성해야 하는 겁니까?”
“개인적인 용무로 휴가를 낸 것이 아닌 바에야, 당연한 것 아닌가?”
“으으···! 이래서 다들 개인 사업, 개인 사업 하는 건가? 보고서 쓰기 싫어서?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
차라리 보육 일지를 쓰면 썼지, 저런 흉흉한 내용 일색의 보고서는 쓰고 싶지 않다.
“선우.”
“왜요?”
“일을 안 할 거라면, 나가서 윈스톤 경과 체력 단련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
“한동안 서류 처리를 안 했더니 손이 근질근질하네요. 아, 너무 일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며 도망치듯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입에 담은 말과는 정반대로, 사실 난 일하는 게 너무너무 싫다.
오래 일을 쉬었더니, 노는 게 너무 재밌어서 더 놀고 싶다. 컴퓨터도 스마트 폰도 없지만, 노는 건 늘 새롭고 짜릿하다.
암만 생각해 보아도, 나는 노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건 하나 없다 했던가?
보좌관이라는 죄로, 공작저라는 교도소에서, 집무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서류 처리라는 벌을 받으며.
오늘도 나는 퇴근이란 이름의 석방을 기다린다.
‘크으···! 눈물이 앞을 가리네!’
하지만 서류를 제때 끝내놓지 않으면 세르펜스의 못된 병이 재발할 거다.
제 버릇 개 못 주고 쌓여있는 서류를 향해 슬금슬금 마수를 뻗치겠지.
살이야 간식 안 먹고 올바른 생활 루틴을 유지하면 빠질 테고, 지금은 서류 처리에 집중해야 할 때다.
‘그리고 운동을 해야 한다면 윈스톤보다 세르펜스랑 하는 게 낫지.’
윈스톤은 무자비한 하드 트레이너다.
감량 효과는 죽여줬지만, 다른 의미로도 죽는 줄 알았다. 내가 기차를 타고 향하는 곳이 공작령인지 다이어트 캠프인지 분간이 안 됐었다.
‘그때, 두 번 다시 살찌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다. 고개를 흔들어 애써 그때의 기억을 떨쳐내며 펜을 들었다.
나도 세르펜스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사각거리는 소리만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수능이 발등에 떨어진 고등학교 3학년 자습 시간에나 들릴 법한, 펜 머리가 책과 책상에 강하게 부딪히며 내는 치열한 소음이 아닌.
부드럽게 종이를 긁는, 느긋하며 간질간질한 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집중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다.
한창 서류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세르펜스도 보고서 작성을 끝내고 서류 작업에 들어간 지 오래다.
보고서 작성을 왜 서둘렀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현재 시각은 다섯 시. 휴마누스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걸 테다. 나와 세르펜스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어젯밤에···, 아니. 자정을 넘겼으니 오늘인가? 아무튼 일찍 올라가길래 자문회에 참여하려는 줄 알았더니, 안 왔다더라?”
곧이어 도착한 휴마누스가 자리에 앉으며, 안부를 묻는 듯한 어투로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아, 맞다! 자문회!”
“···네, 본래는 그럴 요량이었으나, 막상 수도에 도착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려 했더니, 돌연 어지러워져서···. 억지로 머리를 부여잡고 보고서를 작성하다 중요한 내용을 빼놓을까 우려되어, 푹 쉬고 맑은 정신으로 정리하여 내일 보고드리겠다는 연락을 드렸습니다.”
내게 있어 자문회란, 격투기 관람회 그 자체였다. 그 탓에, 그곳이 중요 사안을 논하기 위한 자리였음을 잠시 망각하고야 말았다.
물론 내가 그랬다는 것뿐.
세르펜스는 잘도 기억하고 황실에 편지까지 보내 놓았다.
‘녀석이 깨어난 건 오후 늦은 시각이니, 내 방에 자러 오기 전에 써서 보낼 것을 지시한 건가?’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옆 통수가 따갑다. 주변을 둘러보니, 휴마누스를 비롯하여 그 일행들이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입을 좀 닥칠 필요가 있는 듯하다.
“혹, 편지가 도착하지 않은 겁니까?”
“아냐, 편지라면 잘 도착했어.”
“그렇다면 폐하께서 많이 불편해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갈수록 일취월장하는 세르펜스의 가련한 표정 연기에 휴마누스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게 아니라! 예전에는 안 그랬···, 아니. 이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전에는 피곤했을 때도 바로 보고를 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알면서도 당하는 공격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휴마누스가 그것을 당해낼 재간이 있을 리가.
휴마누스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듣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재작년만 해도, 토벌을 마치자마자 수도에 올라와서 악숭이를 때려잡고, 자문회도 참가하고. 할 거 다 했었지.’
아마 그 사건 전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번은 특히 더 피곤한 듯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장소에서 오래 생활하느라 저도 모르게 피로가 쌓였었나 봅니다.”
“지금은 좀 괜찮아?”
죄스럽다는 듯 말하는 세르펜스를 보며 휴마누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전에는 피곤한 상태로도 꾸역꾸역 할 일을 마쳤던 세르펜스였다.
그런 녀석이 자진해서 휴일을 늘렸다는 소식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말이 앞섰던 모양이다.
“네. 이제는 괜찮아져서, 내일 폐하께 올릴 보고서 작성도 끝낸 참입니···.”
“울었다며.”
휴마누스의 말에 세르펜스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녀석은 먹통이 된 전자기기처럼 움직임을 잠시 멈췄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눈꺼풀뿐.
긴 속눈썹이 두어 번 오르내린 후, 판단을 끝마친 세르펜스가 얼굴을 슬쩍 붉혔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순진펜스를 연기하는 거다.
“그, 그것이···, 으음···.”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나도 처음엔 엄청나게 힘들었어. 울지는 않았지만.”
“역시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악마 숭배자 놈들은 죄 없는 이들을 수도 없이 죽이거나,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이야. 그런 놈들에게 네가 일일이 마음 쏟을 필요는 없어.”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세르펜스의 아첨 같은 맞장구에 휴마누스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가만 보면 휴마누스 저 자식, 은근 세르펜스 앞에서 젠체한단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르펜스를 라이벌로 대한다거나 열등감을 가졌다는 건 아니다.
평범하게 세르펜스의 대단한 점은 높게 사고, 그 외의 부분에서 잘난 척을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