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25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59화(259/1105)
259회
48. 공작님과 스쳐 지나간 인연 (2)
“그래서 방금 그 사람은 누군가요? 저도 왠지 낯이 익던데···.”
유지스가 손을 들며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바스툴 왕국의 2왕자입니다.”
“아, 그래서 낯이 익었군요! 눈은 좀 더 생기가 도는 것 같지만, 바스툴 왕의 젊은 시절과 많이 닮았네요.”
세르펜스의 대답에 유지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스툴 왕의 젊은 시절은커녕, 현재 모습도 본 적 없기에 공감할 수 없는 얘기다.
그래도 [성검의 주인]을 통해 바스툴 왕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강 알고 있다.
비겁하고 치졸하다는 말로도 모자를 사람이다.
그런 자와 외모는 비슷할지언정 성격이 다르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다.
바스툴 왕의 성격까지 빼다 박은 1왕자와 다르게, 2왕자 베일 바스툴은 [성검의 주인]에서도 정의로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비록 타락펜스의 계략에 넘어가, 악숭 세력의 앞잡이들을 진정으로 믿는 우를 범했지만···.’
그게 베일의 탓은 아니다. 애초에 그들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는 반역이었다.
지금이 평화 시대였다면. 혹은 악숭이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고, 주변을 의심해 봤더라면.
베일은 충분히 성군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작부터, 과정을 거쳐, 그 끝맺음까지. 모두 비운에 잠겨버렸다.
가장 믿는 신하이자, 왕이 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자, 자신이 직접 재상직에 앉힌 이가 건네준 독이 든 술잔에 의해.
그는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 다시 떠올려도 좀 씁쓸하네.’
그때 조금. 정말 아주 쪼~끔! 타락펜스를 욕했었는데, 그건 세르펜스에겐 비밀로 해야겠지.
녀석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운해할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모두 정리됐고, 이제는 따져야 할 때다.
“방금 왔다 간 걔가 걔라고요?!”
내 물음에 세르펜스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스와 윈스톤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성검의 주인]을 알지 못하므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저래선 안 된다.
“바스툴 2왕자라면 그 사람이잖아요!”
내가 말한 ‘그 사람’의 뜻을 어렵지 않게 유추한 세르펜스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까먹은 것도 아니고, 알면서 그냥 보냈다는 뜻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
‘길에서 우연히 원작 주인공의 주변인을 만나면, 인연을 맺고 친해져야 하는 건 당연한 상식 아닌가?’
마침 제 발로 ‘나 잡아 잡숴.’ 하며 혼자 찾아왔는데,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치다니!
“세르펜스가 세르펜스인 걸 밝히고, 프뤼네 왕국에 사람 구하러 갈 거라고 말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으면 좋았잖아요?”
“한 나라의 왕자가 외국에서 혼자 돌아다닐 리 없잖은가? 훈련된 기사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아마도 그자의 호위겠지.”
베일이 혼자였다면 모를까. 다른 사람이 오고 있는 게 느껴져서 모르는 척했다는 뜻이다.
“그럼 일단 인연을 만들어 두고, 다음을 기약하면 됐잖아요. 나중에 찾아오라든가, 찾아가겠다든가. 자연스럽게 만날 계기를 만들어 뒀으면 좋았을 텐데···.”
“그자는 몰라도, 그 주변인은 믿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걸 경고해 주면 좋았잖아요?”
“무엇을 근거로?”
“어어···.”
말문이 막혔다. 세르펜스의 말이 옳았다.
삥 뜯기는 사람을 구하려고 따라갔더니, 제국의 공작과 그의 일행이었고, 그에게서 다짜고짜 주변인을 조심하라는 얘기를 듣는다면.
대체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또 계시가 내려온 건가요?”
“네? 아, 예. 뭐 그렇죠.”
나는 유지스의 말에 떨떠름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잠시 한 눈을 팔았지만, 세르펜스는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당신이 본 미래는 ‘제국이 멸망했을 때 일어날 일’이잖은가? 지금 상황에 그런 얘기를 해 봤자, 혼란만 불러올 뿐이다.”
“네에?! 제국이 멸망한다고요?”
유지스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 윈스톤도 당황하는 기색이다.
세르펜스의 말대로, 그의 발언은 정말 혼란을 불러왔다.
“제국이 위험한데 저희가 외국에 나와 있어도 되는 건가요?!”
자신이 속한 나라의 일이 아님에도 유지스가 기겁하며 물었다.
그만큼 대륙의 존망에 신성 루멘 제국이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거겠지.
“시온이 본 미래에 의하면, 제국이 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내부에 있습니다. 지나치게 깨끗함을 추구한 나머지 너무 많은 이들을 쳐낸 탓에 균형이 무너졌고, 대귀족들이 빠진 자리에 그간 기를 펴지 못하던 중소 귀족들이 끼어들어, 과욕을 부리다 악마 숭배자들의 꼬임과 이간에 넘어가게 된 겁니다.”
지금은 괜찮다는 뜻이다.
“아르젠토 공작가에는 현재 황실의 사람이 감시로 붙어있습니다. 아르젠토 공작은 전적이 있으니, 의심을 받지 않도록 악마 숭배자들을 누구보다 경계할 겁니다.”
아르젠토 공작가에 감시가 붙었다는 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면 싸게 먹힌 거다.
“또한 황태자가 성검의 주인인 이상, 황실이 대륙을 저버릴 일은 없습니다.”
휴마누스가 성검의 주인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신성’ 제국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여튼 황실과 공작 가문이 멀쩡히 권위를 유지하고 있으니, 휘하의 귀족들도 허튼짓은 못 할 거라는 얘기다.
프라시더스 가문은 에일리히가 잘 지키고 있을 테고. 문제 될 것은 없다.
‘역시, 이래서 바깥 일을 하기 전에 집안부터 평안하게 만들어야 한다니까?’
그런데 이런 얘기를 왜 하필이면 뒷골목에서 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이게 다 베일이 난입해온 까닭이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시온이 본 미래는 정확히 어떤 것이었나요?”
“제국이 멸망하자 바스툴 국왕이 성검의 주인을 배척하였고, 성검의 주인을 지지하는 2왕자가 반역을 통해 왕위에 올라, 악마를 숭배하는 신하의 손에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세르펜스의 핵심 요약에 유지스는 할 말을 잃었다.
윈스톤은 인상을 찌푸리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는데, 아마도 마지막에 ‘신하의 손에 죽게 된다.’는 말 때문이리라.
지금은 신성 루멘 제국에 적을 두고 있지만, 원래는 바스툴 왕국 출신의 기사다. 이래저래 신경 쓰일 수밖에.
“시온의 말대로 미리 경고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들이 대륙을 배반하고 신임하는 이들이 배신하게 될 거라는 말을 믿을 것 같진 않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소리다.
악숭이가 그 신하에게 접촉했는지, 아직 안 했는지. 그조차 불분명하다. 바스툴 왕이 싹수가 노랗긴 한데, 아직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제국이 건재하니, 등을 돌리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아예 만나지 않았으면 모를까, 그냥 보내기엔 뭔가 좀 아쉬운데···.”
“후우···. 알았다, 나중에 시간 나면 바스툴 왕국도 들르면 되잖은가?”
“정말요? 언제?”
“볼타 산맥 일이 해결되면?”
이번 여정 중에는 들를 계획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제 바스툴 왕국의 2왕자에 관한 이야기는 끝난 건가?”
“예? 뭐, 일단은?”
“그럼 묻겠는데, 어째서 나를 이런 골목으로 끌고 들어온 거지?”
군청색 머리칼 청년의 정체 때문에 잠깐 그 문제를 깜박했다.
세르펜스의 말 덕분에 본래의 목적을 상기할 수 있었다.
“제게 세르펜스의 걱정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이 있거든요! 이 방법을 쓰면 세르펜스가 자유롭게 얼굴을 내놓고 다녀도 아무도 몰라볼 겁니다!”
“그런 방법이 있나요?”
“···어째 불안하군.”
관심을 보이는 유지스와 달리, 세르펜스는 뚱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녀석도 나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듣게 된다면 생각이 바뀌리라.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뒤져, 솔레르티아에게 특별 주문한 세르펜스 전용 스크롤을 꺼냈다.
“이걸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건 무슨 스크롤이지?”
“일단 써봐요. 쓰면 알게 될 겁니다.”
세르펜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내가 건넨 스크롤을 펼쳐 그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르펜스를 두고 의심이 많은 게 아니라 하다니! 윈스톤은 참, 사람 볼 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세르펜스의 양손을 겹쳐 잡고 스크롤을 찢어버렸다. 스크롤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오며 세르펜스의 귓가에 머물다 사라졌다.
녀석이 자신의 귀를 더듬는 동안, 나는 거울을 꺼냈다.
“별다른 간섭이 없다면 무려 일주일이나 유지되는 환영 마법입니다! 티 안 나게 형태 자체를 바꿀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신체 내부에 작용하는 거면 신성력 운용에 거슬릴까 봐 그냥 환영 마법으로 대체했습니다.”
“좋은 방법이라는 게, 엘프처럼 귀를 길게 만드는 거였나?”
거울을 본 세르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5년 전에 만났다고 해서 살짝 고민하긴 했는데, 역시 이거라면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세르펜스의 얼굴이라면 누가 봐도 엘프라고 생각할걸요?”
여러 번 재고해봤지만, 이건 될 거다. 무조건 통한다.
“당신은 도대체가···.”
“2왕자가 세르펜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만류귀종이라고, 무엇이든 극에 달하면 하나로 통일되는 법이라지 않습니까? 그냥 완벽한 황금 비율을 이루고 있어서 비슷해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며 넘어갈 겁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세르펜스가 나를 미친놈 보는 눈으로 바라봤다. 어느 정도 자신이 잘생겼다는 자각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아직 부족한 모양이다.
나는 녀석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아니, 진짜래도요?!”
“개소리.”
얘가 내 말을 못 믿나 보다.
“만약 걸리면 어쩔 셈이지? 엘프가 인간 흉내를 낸다면 시선을 끌기 싫어서라 생각하겠지만, 그 반대는 다르다. 엘프가 거짓말을 안 한다는 것을 이용하려는 사기꾼이라 생각하겠지.”
“이제 머리색만 엘프처럼 초록색 계통으로 바꾸면 됩니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건가?”
세르펜스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뱉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의 장점 1번을 취소하고, 벌칙을 수행하도록 시킬 수밖에 없음을. 녀석은 왜 모르는 걸까?
“안 들키면 어쩔 건데요?”
“들키는 게 당연하잖은가?”
“좋아요, 내기하죠! 오늘 하루 세르펜스가 가짜 엘프라는 걸 눈치채거나 의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공작저로 돌아갈 때까지 제게 형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런 내기에 내가 어째서 응해야 하는 거지?”
“대신 세르펜스도 제게 뭔가 시키면 되죠!”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는지, 녀석이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이건 비겁한 게 아니다.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한 교육이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세르펜스는 모두가 입 모아 찬미하는 엘프의 외모와 자신의 얼굴이 동일 선상에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내가 조용히 하라고 하면···.”
“다시 말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닥치고 있으라고요? 뭐, 좋습니다. 기한은 똑같이 공작저로 돌아가기 전까지면 됐죠?”
세르펜스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석게도 녀석은 질 것이 뻔한 승부에 응하고야 말았다.
어차피 내가 이길 테지만, 잠시 꿈을 꾸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세르펜스는 신성력을 이용하여 기존의 염색 시약 효과를 제거하고, 머리카락을 상큼한 민트색으로 물들였다.
역시 세르펜스는 칙칙한 색보다 이런 화사한 색이 잘 어울린다.
“···내가 지금 잘하는 건지 모르겠군.”
후드를 걷은 세르펜스가 민트색으로 염색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도 내기를 받아들인 걸 보면, 어지간히도 내 입을 닥치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안 들킬 거예요.”
활달하게 말하는 유지스를 보며, 세르펜스가 ‘그건 그거대로 안 괜찮은데.’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윈스톤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으, 음···. 주군, 잘 어울리십니다.”
“세르펜스도 들었죠? 윈스톤은 빈말 같은 거 못합니다. 아시잖아요?.”
내기는 아직 시작도 안 되었는데, 세르펜스가 벌써 내 입을 닥치게 하고 싶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윈스톤 경이 보기에, 공작가의 돈으로 이런 고가의 스크롤을 구매한 시온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횡령이라 생각합니다.”
윈스톤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답하였다.
세르펜스가 ‘당신도 잘 들었지?’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되로 주고 말로 돌려받은 기분이 든다.
“세르펜스가 쓸 스크롤을 세르펜스의 돈으로 사는 게 뭐 어때서요?! 이게 왜 횡령입니까? 대리 구매지. 안 그렇습니까?”
“내 허락이 없었잖은가.”
“언제는 필요한 스크롤이 있으면 마음껏 사라더니!”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크롤 값을 청구할 생각은 없는지, 녀석은 홱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마음에 드는 장인을 찾으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어서 대장간 순회나 하자는 뜻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