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26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267화(267/1105)
267회
50. 공작님의 마탑 방문 (2)
내가 살던 곳에는 마탑보다 높은 건물이 얼마든지 있었다.
현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대단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곳 가나안 대륙 기준으로는 까마득히 높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회백색의 탑은 마법사들의 자부심이자 오만의 상징이다.
주변에 즐비한 야트막한 건물들 탓에, 먼발치에서 본 마탑은 실제 높이보다 훨씬 높아 보였다.
‘저게 솔레르티아가 말했던 마탑의 부속 건물이겠지.’
열등한 마나 감응력 탓에 마탑에 오르지 못했다는 솔레르티아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높아 봐야 고작 2층에 불과한 건물들 사이로 우뚝 선 탑은 고고하다기보단, 소인을 깔보는 거인의 교만함을 닮아있었다.
그런 주제에 우월한 능력을 갖춘 아니마를 따돌렸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아니마가 무심코 다른 마법사들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지만, 악의를 가지고 그랬던 게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어렸기 때문에 자신과 남들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그랬던 것뿐.
그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녀를 따돌림으로써, 그녀가 자라지 못하게 만든 건 바로 그들이다.
“표정이 좋지 않군.”
나도 모르게 탑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던 모양이다.
빈정거릴 땐 언제고, 세르펜스가 신경 쓰인다는 듯 말을 건넸다.
“그냥 보기에 별로 안 좋잖아요. 자기네 탑은···. 어휴, 저게 대체 몇 층이야? 일, 이, 삼···.”
“61층이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을 들어 한 층씩 세고 있으려니, 세르펜스가 알아서 답을 내놓았다. 가히 움직이는 백과사전이다.
그런 그에게 마음속으로 사전펜스라는 새로운 별명을 하사해 주었다.
“자기들이 사는 탑은 61층이나 올려놓고, 주변 건물들은 꼴랑 2층밖에 안 되는 게 영 좋아 보이진 않네요.”
“시온의 말대로예요. 이 일대에선 3층 이상 건물을 올리면 제재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유지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어쩐지 너무 낮은 건물투성이더라니, 참 별짓을 다 한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다만, 규칙이 생겨난 이후 고쳐지지 않고 폐단으로 남은 거죠.”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자, 그보다 못한 이들을 억눌러 왔다는 것처럼 들렸다.
“고치려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대요?”
“글쎄요···? 해당 규칙을 철회한다는 소식을 몇 번 듣기는 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인 거로 봐서 실패한 것 아닐까요?”
유지스의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마탑이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고여버린 모양이다.
“뭐···. 저희가 여기서 이런 얘길 떠든다고 바뀌는 건 없으니, 어서 들어가기나 하죠!”
“그것도 그렇네요.”
침울해진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일부러 힘차게 말하며,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챈 유지스가 씁쓸하게나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조심히 걸어라.”
팔다리를 크게 흔들며 걷는 내 모습이 불안했는지, 세르펜스가 걱정스레 말했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별걸 다 걱정한다.
“제가 넘어지면 붙잡아줄 사람이 셋이나 있는데, 아무렴 어때요?”
내 태평한 대답에 세르펜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빙판길도 아니고 눈밭에서 넘어져 봐야 얼마나 아프다고 저런 반응인지. 완전 과잉보호다.
“그런 생각이 당신을 계속해서 위험으로 몰아넣는 거다.”
그가 입을 삐죽 내밀며 걸음 속도를 올렸다.
녀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득뽀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삑삑이 신발을 신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실실 웃음이 나왔다.
“지금 웃음이 나오는가?”
“자자! 이제 마탑에 들어가야 하는데, 계속 그런 표정 짓고 있어도 괜찮겠어요?”
세르펜스가 언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얼굴 가득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런 급격한 표정 변화도 이제는 익숙하다.
“어떻게 오셨죠?”
마탑 입구에 다가가자, 어디선가 굉장히 의욕 없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온, 이쪽에서 들리는 거예요.”
유지스가 굳게 닫힌 문 옆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스피커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저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넨 모양이다.
‘초인종도 안 눌렀는데 바로 인터폰이 연결되다니, 이건 대체 무슨 첨단 기술이지? 감지 센서···는 아니고, 감지 마법 같은 게 설치돼 있나?’
내심 내가 살던 세계와 이곳을 비교하며 과학부심을 가졌었는데, 살짝 기가 죽었다.
“에드나 베네볼렌이라는 분을 찾아 왔습니다.”
“약속은요?”
우리를 대표하여 세르펜스가 스피커에 대고 말하자,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말에 성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서비스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마탑에 고용된 누군가라기보다 당직을 서는 마법사로 추정된다.
“약속은 안 되었지만, 프루이토 씨의 부탁으로 찾아 왔습니다.”
“···일단 말은 전해드리겠습니다.”
연결이 끊겼는지, 그 말을 끝으로 스피커에서는 잡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약 십 분쯤 흘렀을까?
마법사의 연약한 팔심으로 과연 열 수 있을지 의문스럽던 육중한 철문이 스르르 열렸다. 어째 무거워 보인다 했더니, 자동문이었을 줄이야.
자동문은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이 세계에서 볼 거라곤 생각도 안 한 탓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놀란 티를 내버렸다.
“많이 신기하신가 봐요?”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여성이 후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마가 말했던 대로 다갈색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상냥해 보이는 사람이다.
“늦게 나와서 죄송해요. 연락을 전달받고 바로 나온다고 나왔는데, 시간이 좀 걸렸네요.”
“이렇게 높은 탑에서 지내시는 것치고는 무진장 빨리 나오신 것 같은데요?”
“마탑에는 자동 승강기가 있거든요.”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면, 엘리베이터가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마법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런 마법을 익히는 자들이 계단 따위를 이용할 리가 없다.
그 전에, 만성 운동 부족인 마법사들이 61층에 달하는 고층 탑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밖에서 얘기할까 했는데···, 구경시켜드릴까요?”
아니마의 말대로다. 에드나는 정말 다정하고,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나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반응에 에드나는 쿡쿡 웃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우리가 건물 안에 들어서자, 문이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스르르 자동으로 닫혔다.
“저희가 정말 프루이토 씨의 부탁을 받아 온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까?”
“네, 아니마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거든요. 저를 찾아올 손님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 사람의 머리카락 색이 다르긴 하지만, 그 외에는 편지에 쓰여있던 그대로라서 알아보기 쉬웠어요.”
세르펜스의 질문에 에드나가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좋으신 분 같아요.”
유지스가 소곤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기대감이 잔뜩 묻어났다.
사실, 나와 세르펜스는 에드나의 출신 보육원에 먼저 들려 그쪽 일을 처리한 후 그녀를 만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을 틀어 마탑으로 먼저 온 것은, 유지스가 그러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에드나를 스카우트하고 싶다나?’
무려 수장과 보좌관까지 스카우트한 일루미나티의 인사 담당자의 제안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에드나와 함께 보육원 일을 해결하며 그녀의 실력과 됨됨이를 직접 확인해 보기로 한 거다.
‘테스트라고 해봤자···.’
유지스와 윈스톤에게는 아니마가 마탑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마의 아픔이고, 아니마와 에드나 사이에 쌓아올린 추억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세르펜스에게는 어쩌다 보니 오해가 생겨 자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함부로 떠들어도 좋을 얘기가 아니다.
그런 사정을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지스는 에드나가 좋은 사람이라 반쯤 결론지었다.
유지스가 아니마를 만난 횟수는 몇 번 안 되지만, 그 몇 번의 만남만으로도 아니마가 에드나를 얼마나 믿고 의지하며 애정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존재가 나쁜 사람일 리 없다는 게, 유지스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지.’
에드나의 인품은 [성검의 주인]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다.
또한 그녀는 아니마만큼 천재는 아니지만, 아니마가 없었더라면 성검의 동료로 채택되었을 유능한 인재였다.
그러니 이번 일은 에드나를 테스트한다기보다는, 우리가 대륙 평화를 위해 악숭이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쇼에 가까웠다.
‘그 밖에도 보육원 일이 해결된다고 해서, 악숭이가 에드나를 가만히 둘 거란 보장이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고.’
그렇다고 대륙에서 악숭 세력의 싹을 뽑아버릴 때까지 그녀더러 마탑에만 처박혀 있으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다.
그뿐 아니라, 인질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 능력을 썩히기엔 너무 아까웠다.
‘물론 에드나의 의견도 확인해 봐야겠지만···.’
될 수 있으면 그녀가 우리와 함께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쨌거나, 유지스는 여러 이유를 들어 에드나 영입을 적극 주장했다.
나야 당연히 환영했고, 윈스톤은 우리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반응이었고. 낯가림이 심한 세르펜스마저 유지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저번에 내가 에드나에 대해 얘기했던 것 때문이려나?’
이유가 어쨌든 녀석이 누군가를 만나보기도 전에 경계심을 낮춘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내심 기뻤다.
실제로 본 에드나가 무척이나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서 마음이 놓였다.
“이게 아까 말씀드렸던 자동 승강기에요.”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걷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바닥에 눈에 잘 띄는 색으로 동그란 선이 그려져 있고, 그 중심에 푸른 보석이 박혀있을 뿐이었다.
건물 중앙에 그려진 동그라미는 내가 익히 보아왔던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넛처럼 건물 최상부까지 천장이 뻥 뚫려있다.
딱, 우리 앞의 원 크기만큼.
‘···이거 설마, 아니지? 승강기라며?’
어리둥절한 마음에 에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부터 신기한 게 나타날 거라며,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원판에 올라서서 푸른 보석을 발로 밟았다.
우웅 소리를 내며 원안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리고 바닥인 척하던 동그란 원판이 1cm가량 둥실 떠올랐다.
“이제 여기에 올라서서···.”
“킥.”
어디선가 들려온 비웃는 소리에 에드나의 말이 뚝 끊겼다.
시종일관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에드나의 표정이 단박에 싸늘해졌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약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마법사가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린 자세로 앉아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웃는 거죠?”
“애 뒷바라지도 모자라, 이젠 그 애가 보낸 사람들 시중까지 드는 모습이 참···. 천상 시녀체질이구나 해서?”
재밌는 것도 없건만, 남자는 혼자 킥킥대며 말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아니마가 그런 취급을 당했는데, 에드나가 다른 마법사들이랑 잘 어울렸을 리가 없잖아?’
아니마는 마탑주의 손녀라는 타이틀이라도 달았지, 에드나는 쥐뿔도 없는 고아 출신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니마의 편을 들고 나섰으니, 그녀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외로움에 파묻혀, 한 사람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그 사람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오른 소녀의 이야기에 안타까워했을 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던, 그녀의 구원자인 ‘에드나’라는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입안이 쓰고 떫다. 마음에 묵직한 돌이 얹힌 것 같다.
나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혹시 나의 무의식은 아직도 이곳이 소설 속 세계라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읽히지 않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지,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시녀가 뭐 어때서요? 시녀는 사람이기라도 하죠. 문지기 일이라도 해야 겨우 마탑에 붙어 있을 수 있는 벌레 새끼 주제에, 어떻게 감히 사람을 비웃을 수가 있죠? 그 전에 사람이 되기 위한 실력을 갖추는 게 먼저 아닌가?”
···네?
굉장한 막말에 나도 모르게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