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0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09화(309/1105)
309회
53. 공작님의 영입 제의 (13)
우리의 걸음이 늦춰졌던 건 순전히 나와 에드나 때문이었다.
그 문제가 해결되자 발걸음에 날개라도 돋아난 것처럼 나아감에 거침이 없어졌다.
뭐 하러 힘들게 돌무더기를 피해 조심스럽게 걷고, 잔해를 넘기 위해 낑낑댔는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르펜스가 탑승 여부를 물어봤을 때 바로 태워달라 하는 건데.
그런 회의감이 들 정도로 두 성기사와 세르펜스의 이동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여기입니다.”
갖은 애를 쓰며 나아간 거리보다 더 험하고 먼 길을. 훨씬 짧은 시간 만에 도착해버렸다.
에블린이 에드나를 등에서 내려줬다. 세르펜스는 양 옆구리에 끼고 있던 나와 유지스를 한 명씩 조심스레 바로 세웠다.
유지스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그대로 풀썩 쭈그려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기다란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낯가림 설정에 잘 맞아 보이니까 그냥 둘까?’
여기서 말을 붙여봐야 수치심만 더해질 뿐이다.
나는 허리를 쭉 펴고 스트레칭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딜 봐도 폐허라,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다.
“분명 여기 어디서 봤었는데···, 아! 찾았습니다.”
에블린이 잔해 더미 사이에서 종이 몇 장을 찾아, 세르펜스에게 건넸다. 녀석은 언제 꺼냈는지 모를 장갑을 끼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이 세계에서 증거품의 지문을 감식하긴 하는지 의문이나, 그건 둘째치고서라도 종이 상태가 엉망이라 도저히 지문을 검출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즉, 세르펜스는 손이 더러워지기 싫어서 장갑을 꼈다는 뜻이다.
나도 아공간 주머니 안에 세르펜스가 사준 연회용 장갑이 있긴 한데, 아까워서 끼지 않기로 했다.
더러워지면 세르펜스가 새로 사주겠지만, 아낄 수 있는 자원은 아끼는 게 좋다.
나는 장갑을 낀 세르펜스의 옆에 바짝 붙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녀석이 서류를 살짝 내 쪽으로 내밀어 주었다.
가까이에서 본 종이의 상태는 정말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타고 그을려, 마치 수학 시험지에 자주 나오는 찢어진 도수분포표를 보는 것 같다.
심지어 물에 젖어 번진 글자들도 있다.
‘물에 젖은 건···. 유지스가 물의 정령이라도 사용한 거려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악숭이가 지른 불을 끄느라 홀로 분투했을 유지스의 모습이 머릿속에 자연히 그려졌다.
당시의 그녀는 영웅이었으나, 지금은 낯가림 많은 엘프가 되어 있었다.
‘세르펜스 이 녀석, 진짜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녀석의 체면도 있는데 남들 앞에서 훈계를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당장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은 서류부터 살피자.
어디에서 무엇을 얼마 주고 샀다거나, 얼마에 팔았다는 식의 내용이 적혀있다. 에블린의 말대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거래명세서였다.
“시온, 여기에 적혀있는 업체명과 거래자 이름을 따로 기록해주십시오.”
세르펜스는 로시오 상단과 거래한 이들을 전부 조사할 작정인가 보다.
이곳이 제국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봤을 때, 녀석이 직접 조사한다기보다는 교단에 떠넘길 심산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조사하는 게 아니다.
“넵!”
나는 흔쾌히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세르펜스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물에 젖어 번진 글자들을 한 글자씩 천천히 읽었다. 나는 그것을 열심히 받아적었다.
서류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녀석은 서류를 에블린에게 돌려주었다. 에블린은 중요한 증거품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조심히 받아들었다.
세르펜스는 잔해들을 뒤적거리며 또다시 서류뭉치를 발굴해냈고, 나는 그의 옆에 딱 붙어 이것저것 받아적었다.
월권기사와 에블린도 적극적으로 서류를 찾아 세르펜스에게 넘겼다.
“여기 어딘가에 금고도 있을 거예요. 몰래 숨어들었을 때 봤었어요.”
부끄러움을 떨쳐내고 일어선 유지스의 조언에 따라, 에드나가 마법으로 건물 잔해들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 파묻혀있던 금고를 세르펜스가 꺼내왔다.
금고 안에는 보육원 아이들과 스승을 연결해 주는 대가로 소개비를 빚으로 달아놓은 서류. 그리고 스승들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대충 할 것을 약속받은 계약서가 함께 들어있었다.
“그리고 저쪽 지하에 문서 보관실이 있었어요.”
유지스는 낯가림 설정에 맞춰, 철저히 세르펜스만 바라보며 설명했다. 세르펜스는 또다시 나와 유지스를 옆구리에 끼고 이동했다. 이번에는 유지스도 순순히 그에게 들려졌다.
그 뒤로 우리는 자리를 몇 번 더 옮겼다.
에블린에게 업혀 다닌 에드나는 시키는 대로 마법을 써, 땅을 들추고 잔해를 치워냈다. 그녀의 표정이 많이 복잡해 보였다.
“유지스 님께 낯가림이···. 시온 씨는···, 아이들은 상관없나? 타는 게 아니라 태우는 건 괜찮은 걸까?”
마법사답게 심층적으로 고찰하는 모습이다.
그 밖에도 금고에서 발견된 서류에 대해서도 혼자 계속해서 중얼거렸는데, 미리 듣긴 했지만 실제 서류를 눈으로 보니 와닿는 게 다른가 보다.
그 중얼거림에 수식 계산을 위한 복잡한 셈까지 추가되자, 더 어지러워졌다. 그녀의 영문 모를 혼잣말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에드나가 홀로 고민해서 답을 내릴 수 있는 건 오로지 마법 수식뿐이었다.
“유지스, 서류가 있을 만한 장소가 더 있습니까?”
“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럼···. 마법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었던 장소가 어디쯤인지 기억하십니까?”
끝난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온 김에 완전 뽕을 뽑고 갈 생각인가 보다.
유지스는 세르랜드 놀이기구를 원 없이 이용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승차감이 별로인 듯하다.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된 걸까. 하다못해 자세라도 바꿀 수 없는 걸까. 기타 등등. 약간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혼자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그녀였기에, 들려 다니는 건 그녀의 취향에 맞지 않았나 보다.
“여기는···. 유독 흑마력의 기운이 뚜렷해서 정화에 특별히 신경 썼던 구역입니다.”
“특이사항은 없었습니까?”
“아! 흑마력이 유달리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에는 반드시 시체가 한 구씩 있었습니다.”
세르펜스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에블린이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사람의 형상만 갖추고 있을 뿐, 완전히 타버려서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시체가 몇몇 발견됐기에 그냥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는 그곳에 악숭이들의 계획이 진행되어 에드나가 난동을 부리게 될 때, 흑마력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함정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맞았고, 흑마법을 품고 있던 무언가는 사람. 혹은 사람의 시체였다는 게 밝혀진 순간이다.
보육원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한 에블린에게 월권기사가 이를 설명했다.
세르펜스가 그에게 설명한 내용은 무척이나 간단한 내용뿐이었기에, 드문드문 빈 내용을 에드나가 채워줬다.
그동안 세르펜스는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에블린이 말했던 시체 외에는 특이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철수하는 대로, 도리안 나다니엘 씨와 아이들의 스승이란 자들을 체포하여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월권기사와 달리 무척이나 믿음직스럽다.
신뢰감이 쑥쑥 자란다. 나는 수첩을 북 찢어서 내가 적었던 메모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네. 이 자들도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에 적힌 이들은 제 관할 지역 밖에 거주하는 자들이며, 악마 숭배자와 직접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섣불리 처리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자들에 관한 건, 윗선에 보고를 올려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처리하기 힘든 문제이니, 높으신 양반에게 일 처리를 떠넘기겠다는 소리였다. 월권기사와 달리 선을 정확하게 긋는 모습이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진상 손님의 등장에 점장님을 부르는 알바생의 대처와 비슷한데, 에블린은 그것을 굉장히 합리적이며 전문적으로 보이게끔 표현했다.
“그럼 이제 일 끝난 겁니까? 밥 먹고 쉴 수 있어요?”
“으음···. 아직 설명해 드려야 할 얘기가 남긴 했지만···.”
내 질문에 세르펜스가 피로한 표정으로 힐끗 월권기사를 바라보았다.
“그 얘기는 제가 마차에서 듣고, 보고를 올리면 됩니다! 신전에 식사와 방을 내어드릴 테니, 도착하는 대로 푹 쉬십시오!”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가 신전을 여관처럼 이용했던 걸 생각하면, 특별할 거 하나 없는 이야기다.하지만 월권기사가 저런 말을 하니, 이상하게 신전의 빈방을 사적으로 빌려주는 것 같고, 좀 그렇다.
이래서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한가 보다. 한 번 월권기사라는 인식이 박히자, 뭘 하든 다 월권 같다.
우리는 월권기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마차를 타고 신전에 가기로 했다.
에블린이 마차를 운전할 사람을 한 명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낯가림 설정이 붙은 유지스는 자진해서 고삐를 잡았다.
마차가 출발하고, 월권기사는 두 번째 악숭이를 생포했을 때의 상황을 물어왔다.
세르펜스는 어떤 식으로 지친 척을 해서 어떻게 악숭이들을 방심하게 했는지, 설정값을 늘어놓지 않았다. 대신 쌈박하게 과정과 결과만을 설명했다.
검은 번개가 쏟아졌을 때 사라진 녀석이 뭘 했는지 이제야 듣게 되었다.
생포한 악숭이는 하나뿐이었지만, 실제로는 흑마법사가 좀 더 많았다든가.
검은 번개는 그들이 협동해서 만들어낸 마법이며, 잡아온 악숭이는 그 마법 구성의 핵심 인물이었다든가.
“오오, 그렇군요. 베네볼렌 님께서 마법으로 동료들을 지키는 동안, 프라시더스 님께서 흑마법사들의 공격을 뚫고 그들에게 반격을 가해서···.”
나라면 마법에 집중하는 흑마법사들의 무방비한 뒤통수를 후렸다고 표현했을 텐데.
공격을 뚫고 반격을 가했다고 표현하니, 정정당당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가 보다.
‘이제 끝난 건가?’
본격적인 조사는 이제부터 시작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단에서 처리할 일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 에드나를 설득하고 나면 드디어 돌아갈 수 있다.
포근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제공되는 공작저로.
‘아, 그 전에 보육원에 한 번 더 들려야겠지?’
그곳에 남겨두고 온 윈스톤도 회수해야 하고, 보육원에 설치된 경비 마법도 걷어야 한다. 아이들이 조심할 수 있게 통제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잘못 건드려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페롤 령의 과자 가게에도 들려서 아이들 간식도 잔뜩 사다 줘야겠다.
세르펜스 먹일 간식도 급했다. 슬슬 사탕 병에 사탕을 공급해 줘야 하는 시기도 다 와 간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사탕만은 절대 끊기면 안 된다.
‘또 해야 할 게 뭐가 있지?’
크레아토에게 맡겼던 신성석도 찾아야 하고, 윈스톤 갑옷도 맞춰주자고 세르펜스에게 얘기해 봐야 한다.
디저트 계통에 종사하는 드워프 마을도 있다는 것 같은데. 시간 나면 그쪽도 들리는 게 좋겠다. 그리고 또···.
‘그리고 세르펜스가 악숭이랑 물놀이를, 아니 물고문을 해서···. 유지스가 낯가림을···.’
자꾸만 눈이 감겼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생각을 이어나가려는데, 정리가 안 되고 멋대로 뒤엉켰다.
아무래도 아까 잠깐 잔 거로는 부족했나 보다.
신전이 코앞인데. 진짜 배가 너무 고파서 뭐라도 먹고 자고 싶은데.
졸리고 피곤하고 배가 고프니, 몸이 멋대로 절전 모드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