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2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23화(323/1105)
323회
56. 공작님의 쇼핑 (5)
페롤 령을 떠난 지 하루 반나절이지났다. 우리는 프뤼네 왕국 최고의 관광지라 불리는 포자크 령에 도착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를 바라보는 에드나의 ‘공작을 탑승 수단으로 여기는 그런 놈’이라는 인식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아니지, 더 나빠졌나?’
유지스와 윈스톤이 세르펜스의 말을 부정하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기 때문이다.
유지스는 본 게 많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윈스톤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따지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동료 기사들에게 ‘보좌관님께서 공작님 어깨에 얹혀서 공작저로 돌아오신 적이 있다. 단순히 다리에 힘이 풀린 것뿐이라 신성력의 도움을 받으면 걸을 수 있지만, 거절하셨다고 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나?
‘우리 윈스톤···. 허구한 날 혼자 검만 휘두르는 줄 알았는데, 동료 기사들과 어울리며 사회생활도 잘하고 있었구나···.’
그보다 내가 신성력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한스만 알고 있는 얘기일 터인데.
이렇게 전부 소문난 줄 알았으면, 적극적으로 세르베이터를 타고 다닐 걸 그랬다.
“어휴···.”
“웬 한숨이십니까?”
포자크 령의 철도 공사 역장과 대화 중이던 세르펜스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내게 물어 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세르펜스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다시 역장에게로 향했다.
“이미 예약이 다 되어있는데, 이것 참···. 갑자기 찾아와 특실을 내어달라 하시면···.”
역장이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프뤼네 왕국으로 올 때는 악숭이들 몰래 움직이느라 적당히 자리 난 곳을 예약했으나, 지금은 모든 행적이 까발려진 상태다.
더는 몰래 다녀야 할 필요가 없어진 세르펜스는 신분을 밝히고, 철도 공사 직원에게 특실을 내어달라며 떼를 썼다.
정확히는 신분을 드러내자마자 역무실로 모셔지고, 역장이 알아서 헐레벌떡 뛰어나왔고, 역장에게 특실 얘기를 꺼낸 거지만.
어쨌든 결론은 그게 그거다.
“3배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두절미하고 웃돈을 얹어주겠다는 세르펜스의 말에, 역장이 언제 곤란해했느냐는 듯 방긋 웃었다.
거래는 정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세르펜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1kg짜리 금괴를 네 개 건넸고, 역장은 함박웃음을 띠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엄청난 돈 지랄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보자.
돈은 어딘가에 묶여있을 때보다, 순환하고 있을 때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
부유한 자가 소비를 많이 해야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고, 세르펜스는 그 역할에 충실히 임한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남의 나라 공기업이라는 사실도 뭐, 더불어 사는 세상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이따 저녁 9시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모쪼록 즐거운 관광 되시길 바랍니다!”
나와 세르펜스는 역장의 배웅을 뒤로하며 역무실을 나왔다.
유지스를 위시한 나머지 일행들은 우리가 표를 예매하는 동안, 기차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세르펜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공사(公社)면 공기업인데, 공기업이 웃돈 받고 이래도 돼요?”
“공기업이 국가의 재정을 우선시하여,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해내는 건 당연하잖습니까?”
내가 살던 세계의 공기업과 이곳의 공기업은 추구하는 바가 다른 모양이다.
공기업의 사전적 정의가 뒤틀린다.
그래도 탈세를 한다거나 수익을 빼돌리는 건 아닌 모양이고, 국가의 재정에 이바지하며, 합법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니 문제는 없···나?
‘에라,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민주화 혁명을 일으킬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으며, 따라 줄 사람도 없다.
혼자 민주주의를 제창해 봐야, ‘나는 역모를 계획하고 있으니, 잡아 죽이쇼!’ 하는 꼴밖에 안 된다.
‘어차피 돈 많은 사람이 잘사는 건 여기나 저기나 그게 그거고···.’
룩스메아도 내게 혁명을 기대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 누나가 왔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걸 바랐으면 다른 사람을 불렀을 거다.
무엇보다 혁명은 강제로 일으킨다고 일으켜지는 게 아니다.
이 세계 사람들이 필요를 느껴서, 자의로 목소리를 높여야 비로소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
외부인인 나는 눈앞의 세르펜스 키우기에나 집중하자.
“그래도 특실을 예약할 정도면 전 예약자도 귀족이었을 텐데···. 철도 공사 측에 불이익이 생긴다거나, 그런 건 없대요?”
“상대가 귀족이기에 괜찮은 겁니다.”
“아···.”
귀족은 그 직위 덕에 많은 것을 누리는 만큼, 더 높은 사람에게 숙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얘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국의 공작인 세르펜스라서 괜찮다는 뜻이기도 했다.
새삼 가나안 대륙에서 제국이 가지는 위상과 세르펜스의 위치가 크게 와닿았다.
‘그래 봤자 내 눈에는 디저트 사러 갈 생각에 들뜬 어린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푹 눌러쓴 후드 아래로 보이는 세르펜스의 입매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예약하는 데 꽤 오래 걸렸네요? 줄이 많이 길었나 봐요?”
나와 세르펜스를 발견한 에드나가 속 편하게 말을 붙였다.
남이 예약한 특실을 가로채느라, 역장과 면담하는 바람에 늦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네. 다행히 표를 겨우 구하긴 했지만, 저녁 9시까지 자리가 꽉 차서 그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번만 갈아타면 국경까지 한 번에 가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보급품을 구매해 두는 게 좋겠어요.”
일부러 저녁 9시 표를 구한 가증펜스가 애석하다는 듯 말하였고, 그 내막을 뻔히 아는 유지스가 바람잡이 노릇을 했다.
세르펜스는 그렇다 쳐도, 진실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가 저래도 되는 건가 싶다.
‘그냥 간식을 사러 가는 거라고, 왜 말을 못 해!’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나 또한 매한가지다.
“세르펜스. 저 간식 좀 사고 싶어서 그런데, 호위해 주세요.”
“예, 기꺼이.”
내 말에 세르펜스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바라 마지않던 말이니, 당연히 기꺼울 수밖에.’라고 빈정거리며 지도를 펼쳐 들었다.
유지스는 세르펜스가 자신의 간식거리를 마음껏 고를 수 있도록, 에드나의 팔을 잡아끌며 말문을 열었다.
“에드나 님은 저랑 같이···, 음···.”
그냥 말문을 열기만 했다.
앞서 보급품을 산다고 했으나, 아공간 주머니 안에 침대까지 넣고 다니는 형편에 더 필요한 게 있을 리가 없다.
“뭐든 사러 가죠!”
끝끝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나 보다.
“네? 뭘 사신다고요?”
“아무튼 가요!”
막무가내가 따로 없다.
세르펜스는 윈스톤에게 저녁 7시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 저녁을 함께 먹자고 얘기하며, 유지스와 에드나를 호위하라고 명했다.
윈스톤이 황급히 달려,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을 뒤쫓았다.
“세르펜스.”
“본명으로 부르지 마라. 누가 들으면 어쩔 셈이지?”
“세르펜스나 페르센트나. 아니면 뭐, 오랜만에 시온으로 불러드릴까?”
“그게 낫겠군.”
농담을 다큐로 받아들이는 녀석이었을 줄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스럽다.
“아무튼 윈스톤 말이에요.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테라룸 왕국 들르는 김에 윈스톤 갑옷도 드워프제로 맞춰주는 게 어때요?”
내 권유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다.
하긴. 녀석도 양심이 있으면 여기서 고개를 가로젓지는 못하겠지.
“그럼 이제 출발하는 건가?”
세르펜스가 나를 재촉했다. 간식 살 생각에 몸이 달았나 보다.
나는 지도에 표시된 가게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녀석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목적지 입력 완료 신호다.
더는 필요 없어진 지도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세르펜스 내비게이션. 줄여서 세르게이션만 믿고, 느긋하게 주변을 구경하고 다니면 된다.
“오, 세르···, 아니, 페르···도 아니라. 시온! 저거 봐요!”
“얼음 조각상이군. 갖고 싶나?”
“그냥 예쁘다고요. 저런 거 사서 뭐 합니까? 방에 두면 다 녹을 텐데···. 엇! 크레페 가게다!”
그저 크레페 가게가 있다고 말한 것뿐이건만. 먹고 싶으냐는 확인 질문조차 없이, 세르펜스의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물론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내 손목을 꼭 붙잡은 채다.
마치 나들이 나온 아이가 부모님의 손을 잡아끌며, 군것질거리를 사달라 조르는 듯한 모양새다.
“무슨 맛으로 먹을래요?”
“으음···. 당신과 같은 맛?”
“제가 안 먹으면, 시온도 안 먹으려고요?”
“······!”
손목을 잡고 있는 세르펜스의 손이 움찔했다.
거의 콧잔등까지 가려진 후드 아래로 드러난 녀석이 입이 붕어처럼 벙긋거렸다.
“바라는 게 있으면 똑바로 얘기하셔야죠.”
“······.”
“자, 어서! 본인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 보시죠!”
세르펜스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날 붙잡지 않은 손으로 메뉴판 한 곳을 가리켰다.
“입은 뒀다가 뭐 합니까? 말로 안 하면 안 사줄 겁니다?”
“하, 하지만···. 여기는 메뉴명이···.”
“메뉴명이 뭐요? 일반적이기만 한데.”
메뉴판을 다시 봐도, 손님이 알아보기 쉽도록 들어간 재료에 충실한. 지극히 평범하며 직관적인 메뉴명이다.
“처음부터 너무 고난도를 요구하는 거 아닌가?”
“그럼 여긴 걸러요?”
“그, 그런, 매정한···!”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다친 사람을 보고도 모르는 척 지나가자고 한 줄 알겠다.
크레페 가게 주인이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 아니다. 전부 그만둡시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걸, 어떻게 입안에 넣어요? 제과점에 들러서 뭐 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돌아갑시다!”
“지, 진심···인가?”
“몇 번을 말해야 알죠? 전 항상 진심입니다.”
평소의 세르펜스라면 한발 뒤로 물러나서 다음을 기약했을 거다.
간식 시간에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 내가 버티지 못하고 간식을 꺼낼 것을 알기에.
하지만 지금 내 수중에는 간식거리가 없다. 오늘 기차를 타면 국경에 다다를 때까지 쭉 기차 안에서 생활해야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기전을 생각하기엔 세르펜스가 달다구리에 너무 굶주렸다.
얼마 전 유자 머핀과 케이크를 먹었다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녀석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오히려 녀석을 감질나게 하였을 뿐이다.
“부···, 디···. ······레페···가 먹고 싶다.”
결국. 드디어!
녀석이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네? 뭐라고요? 다시 한 번 정확하게!”
“부, 부드러운 디플로마트 크림이 듬뿍 들어간, 초코에 퐁당··· 빠진 바나나가 쏙쏙 크레페···로 주문해다오.”
세르펜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그나마 드러났던 얼굴 하관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고작 재료명을 나열하는 것뿐인데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다.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녀석이 이렇게 된 것에는 전 프라시더스 공작 놈의 교육 탓도 있겠지. 아니, 전적으로 그놈 때문이다.
식사는 최소한의 영양분 섭취로 족하다. 식탐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달콤한 것은 사치이며 죄악이다. 기타 등등의 말로 녀석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였을 거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녀석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들었죠? 이 녀석이 말한 메뉴로 두 개 주세요.”
“아, 안 먹겠다더니?!”
“왜요, 뭐요. 나 사주는 게 아까워요?”
“······.”
“돈이나 내요.”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본 크레페 가게 주인이 아까보다 더욱 심각하게, 황당무계하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그쪽이 내는 거였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