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3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31화(331/1105)
331회
57. 공작님과 볼타 산맥 (7)
“아니, 일단 들어봐!”
“들어요? 뭘요? 휴마누스의 아집이 세르펜스를 괴롭혀온 지난 세월 이야기를?”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마음만은 착한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세르펜스도 이런 식으로 휴마누스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일까?
한때 휴마누스를 세르펜스의 친구 후보로 올려뒀던 과거의 나를 어리석다 욕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 그땐 나도 어렸고···.”
휴마누스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가 모든 걸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 말해주고 싶다.
“처음 만났을 땐 서로 애칭도 부르고 말도 편하게 했었단 말이야!”
“···예?! 서로? 그럼 세르펜스가 휴마누스를 애칭으로 부르고, 반말도 하고 그랬단 말씀이십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휴마누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휴마누스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했거나. 둘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전대 공작이 그러도록 놔뒀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 그런데 두 번째 만났을 땐 꼬박꼬박 일황자 전하라 부르면서 존댓말을 썼다니까? 서운하기도 하고···. 오기가 생겨서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하다 보니···.”
“···아.”
애석하게도 내 추측은 틀렸다. 휴마누스의 말은 진실이었다.
어린 세르펜스는 휴마누스가 시키는 대로, 그를 편하게 부르다가 전대 공작에게 들킨 거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너무 뻔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단 말이지?”
안타까움에 잠겨있는데, 휴마누스가 불쑥 의아하다는 듯 운을 뗐다.
이 휴마눈새가 드디어 눈치를 탑재하여, 뒤늦게나마 의혹이 생겨난 걸까?
“난 세피가···.”
“세르펜스요.”
“세피가 입에 붙어서 그만···. 아무튼, 나는 세르펜스가 세피라는 애칭을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내가 휴마눈새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나 보다.
실망감이 몰려들었다. 하마터면 휴마누스에게 옆에 있는 베개를 집어던질 뻔했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친하지 않았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뚝 떨어져서 꾹 참았다.
“왠지 모르게 그런 개념이 머리에 팍! 꽂혀서···.”
“착각입니다.”
“아닌데···. 이상하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지?”
휴마누스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하나도 안 귀엽다. 아주 징글징글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나 보죠.”
“정말 싫어하는 거 맞아?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너무 기가 막히면 감탄이 나온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했다.
‘이딴 놈이 주인공인 소설을 내가 열심히 읽었다니···!’
나 자신의 인내력과 너그러운 마음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가 종종 보였던 고구마 같은 모습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이제까지 [성검의 주인] 작가를 열심히 욕했었는데.
슬슬 재조명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이딴 놈을 주인공으로 잡고 소설을 쓰면서, 악플을 받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지를 쳐내고 또 쳐내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다를 부르짖는 독자들을 보며,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수도 없이 찾아왔을 연재 중단의 충동을, 대체 어떻게 이겨낸 것일까?
“직접 들은 겁니다.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께서는 세르펜스에 대해 다시 공부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덟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면서, 어떻게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죠?”
“왜 갑자기 호칭이 전하로 돌아온 거야?”
“그리고 눈치도 기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저기? 시온?”
휴마누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얼굴 가득 당혹스러움이 묻어났지만, 신경 써주고 싶지 않다.
“급격히 피곤해져서 그러니, 이만 나가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중요한 작전에 돌입해야 하니, 이제 그만 돌아가셔서 쉬시지요.”
“가, 갑자기 왜 이래···?”
“눈치를 기르면 알게 되실 겁니다. 자, 어서 나가요!”
나는 휴마누스를 직접 일으켜 막사에서 쫓아낸 뒤,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 여기 있죠?”
“···눈치챘나?”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험 삼아 던져 봤을 뿐인데, 정말로 세르펜스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언제 어디로 들어온 겁니까?”
“황태자가 들어오기 직전에. 저기로.”
세르펜스가 겉옷을 벗어 흙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침대 뒤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녀석이 가리킨 곳을 자세히 살피니, 드리워진 천막 아래로 무언가 끌린 자국이 미세하게 남아있었다.
천막을 들추고 몰래 기어들어 와, 줄곧 침대 밑에 숨어있었다는 뜻이다.
성검의 주인도 눈치 못 챌 은신 실력이라니.
이쯤 되면 카술라 령에 잠입하는 것도, 우르르 몰려갈 필요가 있는지 재고해 봐야 한다.
‘그냥 세르펜스 혼자 숨어들면 다 끝나는 일 아닌가?’
내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세르펜스는 끌린 자국을 발로 문지르며,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럼 다 들었겠네요?”
“···선우는 원래 그렇게 충동적으로 친구를 사귀나?”
“안 그래도 반성 중입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알면 됐다.”
세르펜스가 흙 묻은 겉옷 대신, 아공간 주머니에서 깨끗한 겉옷을 꺼내 걸치며 무심한 투로 말했다.
입술이 샐그러진 거로 봐서는 삐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바로 절교했잖아요.”
“···그건 잘했다.”
녀석이 입술을 앙다물며,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참 잘 삐지고, 잘 풀리는 녀석이다.
“그건 그렇고. 방금 휴마누스가 했던 말, 있잖아요?”
“황태자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랬던 건, 사실이다.”
“맞았어요?”
“······.”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세르펜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때린 주체에 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으나, 세르펜스는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요?”
내 질문에 세르펜스가 자신의 왼뺨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 보았다.
‘키는 커다란 게, 머리통은 왜 이렇게 작아?’
지금도 이렇게 귀까지 전부 덮일 정도다. 어렸을 땐 더 작았겠지.
녀석은 뺨을 가리켰을 뿐이지만, 사실상 머리 옆면 전체를 후려 맞은 거라고 봐야 한다.
세르펜스가 어린 시절,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이 검술을 가르쳤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그 양반도 무력으로 한가락 했다는 뜻이다.
인간이 지닌 신체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극도로 단련한 초인이 고작 여덟 살배기 어린아이를···.
“이런 미친 새끼···.”
열 살이 되던 해에는 더한 짓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을 들어도 속상하고, 울컥하고, 가슴이 꽉 막혀 온다.
“많이 아팠겠다···.”
신체에 남은 상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가슴에 남은 상처는 아직 그 자리에 남아있으리라.
나는 과거의 상처를 보듬는다는 마음으로, 세르펜스의 뺨과 옆머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제 그런 거로 세르펜스에게 상처 줄 사람은 없어요. 타인을 대할 때, 그렇게 선을 긋지 않아도 괜찮아요. 세르펜스의 인간관계는 세르펜스가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거기에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황태자는···.”
“알아요, 휴마누스를 기피하는 데엔 다른 이유가 더 있다는 거. 그냥 앞으로 누군가를 사귈 때, 거리를 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알고 있지만, 쉽지는 않군.”
세르펜스가 쓰게 웃었다.
녀석의 입가가 일그러지며, 손바닥 아래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졌다.
“모든 사람을 가까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랑은 친하게 지내고, 아니면 말라는 거죠.”
“···너무 가볍게 말하는 것 아닌가?”
“세르펜스가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무거울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어요.”
“어렵군···.”
“충분히 생각하고, 천천히 준비해서, 세르펜스가 내킬 때 나아가도 됩니다.”
세르펜스는 생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고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는 마지막으로 녀석의 정수리를 툭툭 토닥거린 후, 손을 거둬들였다.
“음···?”
턱을 괸 자세로 사색에 잠겼던 세르펜스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녀석의 얼굴이 제법 심각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심장이 약동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아무래도, 카술라 령에 잠입할 필요가 없어진 것 같다.”
“네?! 그게 무슨···.”
입으로 의문이 먼저 튀어나왔지만, 본능적으로 세르펜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우리보다 공왕과 악숭이들이 먼저 움직인 거다.
“검을 챙겨라.”
나는 침대 위에 올려뒀던 세니어를 부랴부랴 허리춤에 메고, 세르펜스를 따라 막사를 나왔다.
세르펜스가 심각한 얼굴로 내 막사에서 튀어나오자, 군영 내부를 돌며 순찰하던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 뎅─, 뎅─!
커다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비 초소에서 울린 거다.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은 병사들이 황급히 어디론가 뛰어갔다. 막사 안에서 대기하던 인원도 밖으로 나와, 각자 배정된 위치로 향했다.
걸음을 서두르던 세르펜스가 갑자기 뒤돌아 내게 다가왔다. 나를 들고뛰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다.
‘진짜 긴급 상황인가 본데?!’
날 들어 올린 세르펜스가 한달음에 막사들을 지나쳐, 성벽까지 뛰어올랐다.
휴마누스도 비슷하게 도착했다.
“세피!! 아, 아니. 세르펜스, 너도 방금 느꼈어?”
“···네, 느꼈습니다.”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르펜스가 나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이면 자기들끼리만 알지 말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나를 위해 상세하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세르펜스가 내 고개를 꺾어 산맥 쪽을 바라보게 했다.
붉게 노을 진 하늘 아래, 눈에 거슬리는 새까만 빛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지갯빛이 일렁거리는 신성 결계 안쪽이 새까만 연기 같은 것들로 가득했다. 결계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작년에 교단 측에서 산맥에 조사단을 파견해서 뭔가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달리 생각한다면, 그래서 결계가 아직 버티고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세르펜스?”
세르펜스가 말없이 산맥을 노려보았다.
어찌 보면 산맥이 아니라 그 너머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휴마누스에게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나는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둘은 같은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세르펜스는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는 듯했다.
반면에 휴마누스는 어딘가 멍해 보였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두 눈에 초점이 흐릿하고 생기가 없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의문이 쌓여가는 사이, 일행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유지스는 정령의 도움을 받아, 솟구쳐 오르듯 수직으로 도약하여 성벽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푸로르는 늑대와 닮은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성벽을 타고 네발로 뛰어올랐다. 리에나는 푸로르의 등에 매달려 왔다.
아니마와 에드나는 비행 마법으로 날아왔으며, 윈스톤만 정직하게 계단을 통해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