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3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32화(332/1105)
332회
57. 공작님과 볼타 산맥 (8)
돌연, 한순간 하늘이 훅 어두워졌다가 본래 색을 되찾았다.
평소라면 구름이 잠시 태양을 가린 거려니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어딘가 신경이 거슬리고 불편했다.
정확히는 불쾌했다.
“세르펜스, 방금 그거···.”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던 세르펜스의 시선이 드디어 나에게 닿았다.
녀석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악마가 소환된 징후입니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종종 나왔다.악마가 소환될 때마다, 하늘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는 묘사를.
암흑가에서 악마가 소환됐을 때는 지하라 몰랐었는데. 이런 느낌이었구나.
“악마가 소환되려면 ‘제물’이 필요하지 않아요···?”
유지스의 작은 중얼거림이 확성기를 거친 듯 또렷하게 귓가로 파고들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으나,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카술라 령의 영지민들을···?”
푸로르가 유지스의 말을 이어받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푸로르는 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와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몇 발로 서 있느냐가 아니다.
‘내뱉은 말이 중요하지.’
눈치 빠른 유지스와 감이 좋은 푸로르가 한 말이다.
다시 시선을 세르펜스에게로 향했다.
세르펜스는 검을 뽑아든 채로, 볼타 산맥 너머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흑마력의 파동을 느꼈습니다. 카술라 령 방향입니다.”
“그렇다는 건, 정말 카술라 령 영지민들을 제물로 악마를···!”
세르펜스가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올려 내 말을 막았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 산맥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기운이 꽉 들어찬 결계 위로 검은 점 하나가 솟구쳐 올라왔다.
세르펜스는 멍청히 서 있는 휴마누스를 흘깃 쳐다보고는, 자신의 검에 신성력을 마구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하늘 위 검은 점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 쇄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초승달 모양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신성한 빛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그 모습이 흡사 검이 길게 늘어나다가 똑,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세르펜스가 날려 보낸 신성력이 점이 되다 못해, 육안으로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검은 점이 크게 선회하듯 움직였다. 공격을 피한 거다.
곧이어 점이 팽창하는 듯하더니, 저물어가는 태양만큼이나 거대해졌다.
척 봐도 저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추가 공격을 포기했다.
어차피 거리가 너무 멀어 신성력을 날린다 해도 전부 피해버릴 거다. 괜히 신성력만 낭비하는 꼴이다.
– 콰아아앙-!!!
거대한 구체가 결계에 내리꽂혔다. 저 멀리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파열음에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부의 기운으로 불안정하던 신성 결계다.
방금 그 충격으로 결계에 금이라도 갔는지, 거뭇한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나, 나 때문이야···.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결단을 내렸어도···.”
자조감에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근원지는 아까부터 멍하니 서 있던 휴마누스다.
“결국 나는 카술라 령의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고, 악마가 소환된 데다가, 산맥의 결계까지···.”
“정신 차리십시오.”
세르펜스가 패닉에 빠진 휴마누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은빛의 신성력이 번쩍하더니 휴마누스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세르펜스가 손을 거둬가자, 휴마누스의 눈동자는 바로 어둠에 잠기었다.
“진작 공왕과 대화를 나누어 타협점을 맞춰나갔다면, 공왕이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공왕이 악마 숭배자가 되었다는 걸,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하다못해 복도에서 공왕과 마주했던 그때, 내가 그녀를 베었더라면···!”
진득한 후회의 말이 휴마누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휴마누스는 몰려드는 자괴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괴로워했다.
[성검의 주인]에서 세르펜스가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다.허망함에 잠겨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두 다리로 버티고 설 여력은 남은 듯하지만.
괴로움에 더하고 덜함이 어디 있겠는가.
“결계의 균열이 커지고 있습니다. 곧 마물들이 빠져나올 겁니다.”
세르펜스의 말대로.
뎅뎅거리며 위급함을 알리는 경종이 울려 퍼졌다.
멈춰 서 있는 건 우리뿐. 다들 밀어닥칠 마물들을 막아내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전열을 정비하느라 바빴다.
일행들의 특출난 능력과 성검의 존재는 일종의 조커나 다름없다.
그 때문에 별동대처럼 따로 움직인다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휴마누스는 피가 배어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며, 성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그러했듯. 휴마누스는 절망하는 와중에도 더 큰 절망을 막기 위해 나아가야만 했고, 나아갈 수 있는 의지를 갖췄다.그가 성검을 뽑아 들려는 찰나. 고장 난 기계처럼 덜컥 멈춰버렸다.
‘왜 하필 지금 발견하는 건데···?’
그의 시선이 세르펜스의 허리춤에 고정되었다.
세르펜스의 손에는 새로운 검이 들려 있었고, 검대에 묶어 놓은 검집도 새것이었으나. 정작 검대는 예전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휴마누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의 등 뒤로, 가뭄 난 땅처럼 갈라지기 시작한 신성 결계의 위태로운 모습이 마치 배경처럼 깔렸다.
세르펜스는 휴마누스의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몸을 돌려 일행들을 돌아봤다.
일행들은 저마다 전투태세를 갖추며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베스티알리스 씨께서는 병사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지원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작 나리의 말씀은 병사들이 상대할 수 없는 마물들을 맡아 달라는 거죠?”
“네, 정확합니다. 직접 마물의 목숨을 끊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병사들이 상대할 수 있도록 치명상만 입혀 주시면 됩니다. 기사들도 있긴 하지만, 기동성을 생각해 봤을 때···.”
“아무튼 저는 혼자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게릴라전을 펼치면 된다, 그 말이잖습니까?”
푸로르의 한 줄 요약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감에서 오는 흥분을 느끼며, 푸로르가 두 주먹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손마디가 하나씩 접힐 때마다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푸로르 님. 조심하세요.”
리에나의 손바닥이 푸로르의 등에 닿았다. 리에나에게서 백색의 신성력이 흘러나와 푸로르의 몸에 스며들었다.
차오르는 활기와 고양감에 푸로르가 리에나에게 씨익 웃어 보인 후, 성벽에서 뛰어내려 병사들 틈으로 사라졌다.
“주교 님께서는 부상자들이 생기면 치료해 주시되, 멀리 벗어나지 말고 이 주변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세르펜스의 시선이 리에나를 향했다.
리에나는 일찍이 주교급 성취를 이룩하였으나, 경력과 나이로 인해 일반 신관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성검의 동료로 발탁되며 주교로 올랐다는 설명을 [성검의 주인]에서 읽은 적 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틈을 봐서 결계를 다시 펼쳐야 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성검의 힘으로 다시 결계를 펼치실 때, 옆에서 보조해 주십시오.”
“아···.”
세르펜스의 부연 설명에 리에나가 얼굴을 붉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성검을 뽑아든 휴마누스도 ‘윽.’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저 반응을 봤을 때, 휴마누스의 결계 생성 능력은 아직도 형편없는 모양이다.
‘저런 무능한···!’
사실 큰 기대는 안 했다.
[성검의 주인] 후반부에 이르러서도, 휴무능스는 공격력만 쭉쭉 올랐을 뿐이니까.근래 들어 집중적으로 수련했다고 한들, 없던 재능이 생겨나서 결계 마스터가 될 리 만무하다.
하지만 볼타 산맥의 마핵에서 나오는 기운과 마물들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성검의 힘으로 펼친 결계뿐이다.
그런 이유로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잡아보고자, 휴무능스에게 결계 수련을 시켰던 거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정신을 차리셨으면···. 음···.”
“저 악마와 싸우면 되는 거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힘을 아끼셔야 합니다. 베스티알리스 씨와 마찬가지로 성벽 아래에서 마물들을 상대하시되, 전력은 다하지 마십시오.”
세르펜스가 직설적으로 경고하듯 말했다.
여유가 있었다면 감히 황태자 전하께 지시를 내려도 될지 갈팡질팡하는 척을 했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산맥을 감싸고 있던 결계는 어느덧 거의 다 무너져 내렸다.
날개가 달린 마물들은 진작에 균열 사이로 빠져나왔다.
결계에 갇혀 낮게 날 수밖에 없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마물들이 산맥 주위를 활개 치며 날아다녔다.
날개 없는 마물들도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산맥 아래에 집결했다.
‘왜 달려들지 않지?’
이상한 일이다.
비록 볼타 산맥의 마물들이 지성이 높고 단결력도 갖췄다 한들, 본능대로 움직이는 마물일 뿐이다.
인간 병사처럼 도열하고 대기하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세르펜스도 진열을 갖추는 마물들이 신경 쓰이는지, 일행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자꾸만 고개를 돌려 산맥 쪽을 힐끔거렸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선빵필승을 외치며 돌진하기도 좀···.’
마물 중에는 땅속을 파고 돌아다니는 두더지나 거대 지렁이 같은 마물도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물들도 큰 변수가 될 거다.
자칫 잘못하면 마물들 사이에 고립되어, 그대로 전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악마의 존재다.
결계를 깨부순 악마가 저 하늘 어딘가에 떠 있다.
여전히 멀리 있어 점처럼 보이는 데다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마물과 구별이 안 된다.
여러 위험을 안고 선공을 취하느니, 성벽 근처에서 후방의 지원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수비하는 게 훨씬 낫다.
“프루이토 씨께서는 마물들이 뭉쳐있는 곳에 집중적으로 공격 마법을 써 주십시오. 베네볼렌 씨께서는 전열을 살피며, 지원이 필요한 곳을 요격해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아니마에게는 마물들이 모여있는 곳을 공격하고, 에드나에게는 사람들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이는 필시 아니마를 경계하고 있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니마가 실수인 척 은근슬쩍 아군을 죽이기라도 할까, 의심하는 모습에 혀가 내둘러진다.
녀석의 진의를 모르는 두 명의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지스는 제가 악마를 상대하는 동안, 지원 사격을 부탁합니다.”
“네, 맡겨주세요!”
암흑가의 악마는 세르펜스 혼자 처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나로서는 소환된 악마의 수준을 알 도리가 없으나, 신성 결계를 깬 일격만 봐도···.
‘아닌가? 그건 무너져가는 댐에 막타를 날린 거라고 봐야 하나?’
긴가민가하니 그건 일단 제쳐 두더라도, 악마는 하늘을 날고 있다.
이는 세르펜스에게 페널티로 작용할 거다.
제아무리 세르펜스가 천사처럼 아름다우며, 신성한 그 모습에 간혹 날개가 보이는 듯도 하지만 그저 착시현상일 뿐이다.
날개는 실존하지 않고, 따라서 하늘을 날 수도 없다.
어디 그뿐이랴?
이렇게 마물들이 넘쳐나는데 악마가 세르펜스와 일대일 대결을 고집할 리가 없다.
‘그럴 거면 일찌감치 날아와서 싸우자고 했겠지.’
마물들이 모이길 기다리는 거로 봐서 아주 비겁한 놈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마물들을 조종하는 게, 이번에 소환된 악마의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윈스톤 경은 모두를 보호해 주십시오.”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윈스톤이 절도 있는 자세로 검을 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세르펜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미안함과 걱정스러움이 마구 뒤얽혀 있었다.
“그리고 시온.”
“네!”
“마음 같아서는 막사에 있으라고 하고 싶지만···. 여기가 더 안전할 겁니다.”
인정하는 바다.
더 안전한 수준이 아니라, 제일 안전하다.
“얌전히 이들 곁에 붙어 있으십시오. 섣부르게 마물을 상대하려 하지 말고, 그저 가만히만 계십시오. 넋 놓지 말고, 정신도 바짝 차리고.”
어쩐지 휴무능스보다 더 무능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가만히 있기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바로 접니다! 그러니 세르펜스나 조심하시죠? 저번처럼 한눈팔지 말고.”
“예, 주의하겠습니다.”
가는 말이 좋아야 오는 말이 좋다는 건 다 옛말에 불과한가 보다.
빈정거리며 말했음에도 세르펜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효과를 노리고 한 말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