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3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40화(340/1105)
340회
58. 공작님의 어린 시절 (2)
♠
세피와 만난 지도 어언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와 세피의 나이도 이제 두 자릿수에 접어들었다. 그 때문인지 요즘 들어 세피는 부쩍 어른스러워졌다.
내게는 몹시 유감스러운 일이다.
‘예전에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눈을 초롱초롱 빛냈는데···.’
요즘에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일 따름이다.
나도 그렇고 세피도 그렇고 황궁과 공작저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니까, 대화의 주제가 항상 엇비슷하고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권태를 느끼는 게 아닐까 한다.
참고로 권태란,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을 말한다. 최근에 배웠다.
이 어려운 단어를 세피에게도 알려줬더니, ‘역시 전하께서는 참으로 영민하십니다.’라며 감탄했다.
아무튼, 지금은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마침 그저께 시녀들이 흘린 사교계 소문을 주워들었다. 정말 놀랍고 자극적이며, 다소 충격적인 얘기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할 세피의 모습을 상상하자, 킥킥 웃음이 났다.
“프라시더스 공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리크가 세피의 도착을 알렸다.
나는 들어오라고 말하는 대신, 손수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늘 있는 일인지라, 리크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에 반해 세피는 아직도 부담스러워했다.
“굳이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작 몇 걸음 가지고 뭘 그래? 세피는 항상 황궁까지 찾아와 주잖아.”
내 말에 세피가 말없이 웃었다.
세피는 다 좋은데, 할 말이 없으면 미소로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일단 들어와. 앉아서 얘기하자.”
시종은 이미 물린 터라 세피가 직접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내가 먼저 소파에 앉고 난 다음에야 세피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가볍게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로 서두를 열었다. 세피는 우아한 자태로 차를 마시며 간간이 미소를 지었다.
세피의 찻잔이 반쯤 비워졌을 때, 나는 갑자기 떠오른 척 말했다.
“아! 그건 그렇고, 그 소식 들었어?”
“최근 들려오는 소문이라면, 벨로에 남작이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 말입니까?”
“응? 그건 또 뭐야?”
“벨로에 남작이 향료 사업에 투자했었는데, 주력으로 내건 제품이 알고 봤더니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성 재료를 주원료로 하는 터라, 구매자들에게 대규모 컴플레인이 걸렸고, 사업주가 도망가 버려서 남작이 혼자 덤터기를 쓰게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세피는 귀족들의 사업 흥망이나 국제 정세, 최근에 대두된 학설 등등에 묘하게 빠삭했다.
그래서 세피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런 화제가 가끔가다 튀어나왔는데, 꼭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든 느낌이다.
하지만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어른과 달리, 세피는 나를 동등한 대화 상대로 대했다.
그러한 탓에 세피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면 나 또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세피와의 대화를 즐기는 이유 중 하나다.
‘그래도 오늘은 이런 얘기를 나누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나는 벨로에 남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그거 말고, 엊그제 열렸던 황실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아버지께서 이번 연회에서는 건질 만한 정보가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프라시더스 공작은 무척이나 인자해 보이는데, 가끔 세피의 얘기를 듣다 보면 팍팍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아바마마께서는 프라시더스 공작을 ‘너무 원리원칙에 얽매여서 사람이 좀 따분하다.’라고 표현하셨다.
세피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보는 아니고 그냥 가십이야.”
내 말이 의외였는지, 세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오랜만에 보는 세피의 순진한 모습이다.
“어제 복도를 걷다가 시녀들이 떠들어대는 걸 몰래 들었는데, 카놀라 남작가의 둘째 아들이 에스피 백작가의 막내딸에게 실수로 와인을 엎었대.”
“아, 네···.”
“중요한 건 와인을 엎은 게 아니라, 그 이후야. 에스피 영애가 카놀라 영식의 뺨을 쫙-! 하고 갈겼다지 뭐야?”
세피가 놀라서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내 얘기에 완전히 몰입했나 보다.
“그랬더니 카놀라 영식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카놀라 가문은 비록 남작가이긴 하나, 현 카놀라 남작은 인맥이 넓어 에스피 백작가를 능히 상대할만합니다. 고작 와인을 쏟은 것만으로 남들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명분 또한···.”
분명히 가십이라 말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세피는 내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나는 틀렸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카놀라 영식은 영애에게 청혼했어.”
“···예?”
“자신을 때린 여자는 영애가 처음이라나?”
“네?!”
여간 놀란 게 아닌가 보다. 의문을 표하는 세피의 음성이 조금 높아졌다. 딱 내가 바랐던 반응이다.
기둥 뒤에 숨어서 시녀들의 대화를 몰래 훔쳐 들은 보람이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야. 청혼을 받은 영애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모, 모르겠습니다···.”
“때리는 손맛이 찰지다며 청혼을 수락했지 뭐야?”
“대, 대체 왜···.”
“시녀들 말로는, 때리고 맞는 행위로 애정을 주고받는 취향? 아무튼 그런 게 있대. 그들도 아마 그쪽인 것 같다더라.”
세피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커다랗게 뜬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입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빼도 눈치 못 챌 것 같았으나,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므로 그런 유치한 장난은 하지 않기로 했다.
“폭력이···, 애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까?”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나 봐. 무슨 전문 용어까지 있다는데? 하필이면 그때 시녀장이 오는 바람에 시녀들이 흩어져서 거기까지는 못 들었지만.”
내 얘기가 끝났음에도 세피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이 쏙 빠진 모양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더 재밌다.
세피가 프라시더스 공작처럼 재미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앞으로 특이한 가십거리가 생기면 세피에게 꼭 알려줘야겠다.
* * *
◈
황자 전하께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아버지 몰래 그 ‘특이 취향’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몰래 움직이는 게 어려웠을 뿐, 자료를 찾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다. 연회장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취향을 과시한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나와 황자 전하만 몰랐을 뿐, 사실은 공공연한 취향이었던 게 아닐까?
‘이 정도면 얼추 들어맞는 것 같은데···.’
자료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나를 차갑게 대하는 것도, 어쩌면 두 분께서 그런 취향이라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지하실에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수련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만, 거기에 애정이 담겨 있는 거라면.
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시간이 되어 창고의 지하실로 향했다.
아버지께서는 먼저 도착하여 여러 도구를 꼼꼼히 점검하고 계셨다. 조사한 자료 중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내가 철제 의자에 앉자, 아버지께서 가까이 다가오셨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어 내 발목에 손수 족쇄를 채우셨다.
슬슬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사랑하십니까?”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아버지께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녹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돌아올 대답을 기대하며 숨도 멈춘 채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손에서 땀도 났다.
“한낱 애정 따위에 매달리지 마라. 구차하고 나약해 보이는구나.”
“아···.”
한심스럽다는 듯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냉정함을 되찾았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어째서 아직도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걸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기대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견디기 힘들었다. 평소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몸이 아픈 것인지, 다른 어딘가가 아픈 것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힘겹다. 이제 이런 건 그만하고 싶다.
* * *
♠
아바마마도 그렇고 기사들도 그렇고, 다들 나를 너무 과보호해서 탈이다. 가끔은 그게 도를 지나쳐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바로 오늘 오전에 있었던, 벤자민 경과의 대련이 딱 그런 느낌이다.
“져 주려면 최소한 티라도 안 나게 져 주던가!”
벤자민 경의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황궁에 들어온 지 무려 17년이나 되었다. 신중하고 검술의 기본기가 탄탄한 거로는 황실 소속 기사단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가 내 검술 교사로 발탁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벤자민 경이 고작 열두 살짜리 아이와 대련을 하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니.
그딴 말은 아무도 안 믿는다.
“진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죽했으면 놀러 온 세피를 붙들고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을까.
세피에게는 존경받는 형으로 남아있고 싶었으나, 도저히 분이 가시질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씩씩거리며 혼자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데, 어쩐지 세피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피?”
“······.”
“세피!!”
“아! 네, 네?!”
내가 고함을 지르는 것에 가깝게 큰 목소리로 세피를 부르고 나서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어쩐지 안색이 안 좋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거야? 무슨 고민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자세히 물어볼까 했지만,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말았다.
그러고 보면 세피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속을 털어놔도 좋을 텐데.
“저, 오늘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으음···.”
세피가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어쩐지 안색이 안 좋은 것 같더라니, 이제는 식은땀까지 흘려 댔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나빠 보이는데, 어째서 ‘그런 것 같다.’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아? 신관 불러 줄까?”
“그냥···, 돌아가서 쉬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뭐···. 얼른 돌아가서 푹 쉬는 게 좋겠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세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서 손을 뻗었으나 세피가 뒤로 물러난 탓에 헛손질만 했다.
사람을 불러 주겠다는데도 괜찮다, 부축해 주겠다는데도 싫다. 하다못해 마차까지 배웅해 주겠다는 것도 한사코 거부하는 통에, 세피를 혼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부디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 * *
◇
어리석었다.
어떻게 하면 황자 전하와 같은 귀한 분께서 나와 같은 처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의 미련함에 비웃음조차 안 나온다.
‘아버지께서도 한심해하실 만도 해.’
황자 전하께서는 속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서 멋대로 동질감을 느끼며 위안을 얻었을 뿐이다.
전하와 나는 달랐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또 외면했지만, 현실은 변함이 없었고, 결국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더는 외면할 수가 없다.
가슴에 바람구멍이 생긴 듯 허전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다.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해 빠진 거지?’
정말로 내가 성검의 주인이 되어, 다가올 재앙으로부터 대륙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두려워졌다.
바깥에는 꽃이 만발하건만. 어쩐지 추위가 몰려들었다. 옷을 단단히 여몄다.
자꾸만 기대고 싶어지는 걸 꾹 참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
프라시더스 공작 부부가 살해당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감식 결과, 악마 숭배자의 소행이라고 한다.
장례식은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조문객 하나 없이, 공작가 내부의 인원만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작위를 물려받는 바람에, 세피가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던 탓이다.
장례식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공작 부부의 장례가 치러지고 나서,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세피는 바깥출입을 완전히 끊었다.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공작저에 틀어박혀 모든 방문을 거절했다.
거절당한 요청 중에는 내 것도 있었다.
‘하나뿐인 친구인데, 의지해주면 어디 덧나나?!’
친구가 가족을 잃은 상실감도 추스르지 못하고 일에 파묻혀 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바마마에게 외출을 허락받아 프라시더스 공작저로 쳐들어갔다.
‘이제까지는 항상 세피가 찾아와 줬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찾아갈 거야.’
편지는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당당하게 황실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를 타고 공작저 앞에 멈춰 섰다.
입구의 경비병들이 당황했으나 상관없었다. 아바마마께서 호위로 붙여주신 기사가 그들을 가로막는 사이, 나는 저택 본관으로 향했다.
제국의 황자인 나를 힘으로 제압하여 내쫓을 수 없었는지, 곧 집사라는 자가 나타나 안내를 자처했다.
권위를 내세우는 건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집사에게서 세피가 있는 집무실의 위치만 전해 듣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세피!!”
나는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높다랗게 쌓아 올려진 서류 산 사이로, 오랜만에 보는 세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친구 사이에 그럴 수도 있지!”
내 말에 세피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