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4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42화(342/1105)
342회
59. 공작님과 우정의 자취 (2)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별수 없다.
리에나의 세례명이 휴마누스의 기억에서 잊히길 바라며,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도록 하자.
“아무튼 저는 신의 사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한 번 망했죠. 신 룩스메아가 저장된 데이터를 불러오기 하여, 덮어씌운 결과물이 현재의 시간대입니다.”
“뭐?!”
“휴마누스와 세르펜스가 꿈에서 본 건 그때의 기억입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긴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 룩스메아의 영혼 조각이기도 한 성검의 힘을 직접 빌려 쓰면서, 약간의 혼선이 생긴 게 아닐까 합니다. 아마도요.”
아무리 추측이라지만. 세르펜스가 진짜 성검의 주인인 것 같다든가, 휴마누스는 중간에서 필터 역할을 하여 함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든가.
그런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어차피 확실한 건 없고 추측일 뿐이라면, 듣기 좋은 쪽이 낫겠지.
“아니, 그 전에. 세상이 한 번 망했다고?”
다행히도 휴마누스에게 내 추측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인 듯하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할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 거로 보아, 세상이 망했었다는 얘기에 완전히 꽂혀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그 뒤에 이어진 말을 아예 못 들은 것 같다.
“완전히 망한 건 아니고, 대략 4분의 3쯤? 휴마누스가 본 건 초입부에 불과합니다. 그 이후가 진짜 막장인데···.”
얘한테 어디까지 말해줘도 되는지 모르겠다.
휴마누스는 뭣도 모른 채, 멀뚱멀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얼굴을 눈앞에 두고 차마 제국이 망했다는 소리를 꺼낼 수 없었다.
간략하게 표현하여 ‘제국 멸망’이지, 풀어서 표현하면 ‘너희 엄마 아빠 모두 돌아가시고, 동생도 죽고, 약혼자도 죽음.’이 된다.
‘완전 패드립이잖아!’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다.
세르펜스에게는 [성검의 주인] 줄거리를 읊어줘도 상관없었다.
제국이 망하든, 대륙이 망하든. 그건 세르펜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그가 감당해야 할 것은 오롯이 자신의 허물뿐이다.
그렇기에 세르펜스는 자신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두려워하면서도,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안도하고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와 달라.’
제국에서 살아가는 그의 소중한 사람들. 그가 성검의 주인이 되기 전부터 쭉 그려왔던 삶.
그런 문제들은 일단 미뤄 두더라도.
[성검의 주인]의 내용과 ‘현재’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그 변화를 불러온 주체는 휴마누스가 아니다.이 점이 세르펜스와 휴마누스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다.
나는 망설임 끝에, 얼버무리기로 했다.
“꿈에서 보셨다시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적당히 넘어가겠습니다. 말하기가 좀 그래서···.”
“아! 그런 부류의 신의 사자구나?”
또 나왔다, 그런 부류.
나는 냅다 고개를 끄덕여, 휴마누스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어쨌거나 신의 사자라는 건 믿어주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 부류가 대체 어떤 부류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유용하다.
“시온이 신의 사자라면, 내가 말을 높여야 하···나?”
휴마누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말을 높여야 하느냐는 의문과 다르게, 어미는 여전히 반말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그럽니까? 세르펜스도 저한테 잘도 반말하는데. 휴마누스도 그냥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세르펜스가 네게 반말을 한다고?!”
“네. 둘만 있거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요.”
“······.”
꿈속에서 보았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 것일까?
휴마누스가 입술을 일자로 꽉 다문 채, 복잡한 시선으로 세르펜스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상황 설명도 끝났으니, 이제 해묵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다.
나는 뒤돌아 앉은 세르펜스에게 껌 종이를 내밀었다.
세르펜스가 단물 빠진 껌을 뱉은 후, 다시 정면을 보고 앉았다.
“세르펜스, 너는 대체···.”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에게 따지듯 말문을 열었으나, 그뿐이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내가 알던 너와 꿈에서 본 너.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네가 전부 달라서, 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 너인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휴마누스의 목소리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세르펜스는 그 의문에 답을 내놓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 꿈이라는 거···. 꿈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그럼 네가 정말로···. 제국의 귀족 태반을 마약에 중독시키거나, 도박에 빠져들게 하거나, 불법적인 일에 엮거나, 사업을 부도나게 하거나···. 기타 등등, 다양한 방식으로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 협박한다든가. 혹은, 몰락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척 충성을 받아낸다든가···. 그런 짓을 했다고?”
휴마누스가 제발 부정해 달라는 듯, 꿈속에서 알아냈던 정보를 줄줄이 쏟아냈다.
이미 한차례, [성검의 주인]에서 세르펜스가 긍정했던 내용이다.
“저는 전하께서 꿈속에서 보셨던 것보다, 더한 짓도 저질렀습니다.”
이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세르펜스는 또다시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부정하길 바라는 마음이 부정당한 휴마누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꿈속의 상황을 말하는 거야?”
“일단은 꿈 얘기입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우니까, 헷갈리게 말하지 말아 줘.”
안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휴마누스가 한탄하듯 말했다.
그에 세르펜스는 노력해 보겠노라 대답했다.
“지금이 아니라 꿈에서. 내가 용사의 무구를 얻기 위한 시련을 치르는 동안, 네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휴마누스가 꿈을 강조하며 물었다.
“제 꿈은 전하의 꿈과 조금 다릅니다.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분짜리의 기억이 뒤섞여서···.”
“결국 모른다는 거네.”
장황하게 늘어놓는 세르펜스의 말을 휴마누스가 중간에서 끊어냈다.
그런 휴마누스의 표정은 어찌 보면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단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르펜스가 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괜찮을 거라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건 저 자신이었으니···. 아마도 당시의 저는···. 모두를 지배하에 둔다면, 그 누구도 자신을 억압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힘겹게 끄집어낸 듯한 세르펜스의 느릿한 음성에, 휴마누스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세르펜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남에게 강요되는 삶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짓을 한 것 같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누가 널 억압하고 강요한다고···.”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이번에는 세르펜스가 휴마누스의 말허리를 잘랐다.
휴마누스가 흠칫, 내뱉으려던 질문을 삼켰다.
“제게는 짐이었고, 족쇄였습니다.”
“그건 꿈속에서 네가 느꼈던 감정이야? 아니면 네가 느끼고 있는 걸 말하는 거야?”
“제가 직접 느꼈던 감정입니다. 과거보다는 낫지만···. 저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있고, 그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세르펜스가 자신의 불안감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휴마누스의 얼굴이 마치 낯선 이를 마주한 것 같다.
“그, 그래···. 나도 성검의 선택을 받고 나서야 알았어. 내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기대가 참 부담스럽고 무겁더라. 황태자로서 받는 기대와 관심과는 또 다르더라고. 이런 걸 25년이나 짊어져 왔으니, 당연히 힘들었겠지.”
“어설프게 이해하려 들지 마십시오. 전하의 그런 행동 때문에, 제가 얼마나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는지. 전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세르펜스의 목소리에서 노골적인 원망이 느껴졌다.
항상 너그럽고 이타적인 세르펜스의 모습만 봐왔던 휴마누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네 말대로,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 말의 앞뒤가 안 맞잖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권력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그들이 믿고 있는 정의까지 주무를 수 있습니다.”
나는 세르펜스가 말한 권력의 의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안다.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이라는 지배자가 군림했던 공작저에서. 사람들은 모두 침묵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자 자신의 정의를 고쳐 썼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입이 충격으로 벌어졌다.
“네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얻고 싶었던 삶이라는 게, 대체 뭐야?”
“모릅니다.”
“아까처럼 추측이라도 좋으니까, 알려주면 안 돼?”
답변을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는 친우의 모습에, 휴마누스가 반쯤 사정하다시피 물었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이랬다.휴마누스는 세르펜스를 향해 끝없이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단 한 번도 그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당시의 세르펜스는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지 오래였으며, 자신의 감정에 정의를 내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아무래도 제가 답변을 잘못 드린 것 같습니다. 모르는 게 아니라, 없었다고 대답했어야 맞는 대답일 겁니다.”
“그건 무슨 뜻이야?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한 건, 바로 너잖아!”
“저는 그 무엇도 원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며 멀리해 왔습니다.”
대답 없이 홀로 떠돌던 물음들이 서서히 제 짝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원하는 삶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을 겁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니까, 제 주변을 거리낌없이 망가트릴 수 있었던 겁니다.”
“왜, 왜 그렇게 살아왔는데···?”
“성검의 주인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세르펜스의 답변에 휴마누스가 경악했다.
그럴 만도 했다. 휴마누스가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그에게 그딴 것을 강요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약점이 될 수 있으니, 소중한 것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정에 치우치면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니, 관계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부터 그런 얘기를 들어왔던 거야?”
“감정에 휘둘리는 일도, 욕구에 허덕이는 것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짓조차. 제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천에 차단하고자···.”
“대체 누가 그런 걸 네게 강요했느냐고 물었잖아!!”
휴마누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를 지른 후에야, 세르펜스의 입이 닫혔다.
한동안 분노로 씩씩거리는 휴마누스의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 입니다.”
세르펜스가 어색하고도 원망스러우며 두려운,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무척이나 고된 일을 겨우 끝마쳤다는 듯. 세르펜스는 긴 숨을 몰아서 내쉬었다.
나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세르펜스의 등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조금씩 진정을 찾아가는 세르펜스와 다르게, 휴마누스의 얼굴에는 혼란이 더해졌다.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때보다 훨씬 더 짙은 분노가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거렸다.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