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4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50화(350/1105)
350회
61. 공작님과 잠깐의 휴식 (2)
“하지만 어째서인지···. 감사를 표한다기보다는 죄를 지은 사람의 반응 같아서, 그게 조금 신경 쓰입니다. 시온 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어쩐지 묻지도 않은 걸 척척 잘도 말하더라니.
에일리히가 의견을 묻는 척, 넌지시 나를 떠보았다. 세르펜스보다는 내가 쉬워 보였나 보다.
“감사면 어떻고 사죄면 어떻습니까? 악의를 품은 것도 아닌데, 좋은 게 좋은 거죠. 그렇게 사사건건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는 것도 직업병입니다, 직업병. 은퇴 잘하셔놓고, 이제 와서 무슨 미련이라도 남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제 마음은 여전히 룩스메아 님을 향하고 있으나, 지금은 제 조카가 너무 안쓰럽고···. 오랫동안 외롭게 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더 큽니다. 이런 저를 신께서 용서해 주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내 불퉁한 말에 에일리히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씁쓸한 자조 어린 미소를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신 룩스메아께서도 세르펜스를 아끼시니만큼, 다 이해해 주실 겁니다. 절 보면 알잖아요? 세르펜스를 우쭈쭈 해주라고 사자까지 보내신 분입니다. 에일리히 님의 결정을 찬성하면 찬성했지, 반대하실 일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의 사자이신 시온 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에일리히가 진심으로 안도하는 미소를 지었다.
신의 사자라는 이름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내가 이렇게 남용해도 되는 건가, 살짝 걱정스러워졌다.
어디까지나 아주 살짝만.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짓인데, 제깟 게 허락해 줘야지 어쩔 거야?’
툭 까놓고 말해서 나는 능력도 뭣도 없이 이곳에 던져졌다.
비록 공왕이 악마 숭배 세력에 넘어가 버렸지만, [성검의 주인] 때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상황이다.
이 정도면 룩스메아로서는 남는 장사다.
“시온. 그 서류, 읽지 않을 거라면 건네주지 않겠나?”
뜬금없이 등 뒤에서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에일리히의 설명을 듣는 동안,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내 손에 들린 서류 겉장을 읽고 있었나 보다.
빨리 읽고 다음 장으로 넘기든지, 자기에게 통째로 건네주든지 하라는 뜻이다.
‘어림없는 소리!’
오늘 확인하나 내일 확인하나, 지난 회의 기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팔숨 경이 두고 간 서류 뭉치를 내 아공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내일 아침 출근할 때 드릴게요. 오늘은 쉽시다.”
“···그럽시다.”
세르펜스가 잠깐 에일리히의 눈치를 살핀 뒤에야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에일리히는 서류 내용을 전부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급한 사안이 있다면 알려줬을 텐데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나중에 확인해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린 거다.
“쉴 거라면 차라도 새로 내올까? 수도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 둔 디저트가 있는데 그거라도 같이 먹으면서 대화나 하자꾸나. 아! 물론 세르펜스, 네가 피곤하지 않다면 말이다.”
쉰다는 얘기에 에일리히가 조심스럽게 세르펜스에게 말을 건넸다.
안절부절 말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색한 사이였는데, 오랜만에 만나니 더 어색해진 것 같다.
‘차라리 아까 아르젠토 공작이 있었을 때가 나았어.’
그땐 세르펜스가 대외 설정을 연기하느라, 방실방실 웃어줬기에 화목한 모습이 연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르펜스는 소심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거리며,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마치, 낯선 사람이 주는 츄르를 받아먹어도 될지 망설이는 새끼 고양이 같은 얼굴이다.
그 탓에 에일리히까지 덩달아 긴장해 버렸다.
“그럼 가족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말해도, 전 안 보내 주실 거죠?”
에일리히가 무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세르펜스는 내 어깨를 붙들었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어차피 마력 구속구 건으로 에일리히에게 할 말도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까먹기 전에 얘기해 둬야겠다.
나와 세르펜스가 소파에 앉자, 에일리히가 사용인을 불러들였다.
잠시 후.
시녀들이 테이블 위에 놓인 마시다 만 찻잔들을 치우고, 새로운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크렘 브륄레를 가져왔다.
이미 간식을 즐긴다는 걸 들킨 지 오래건만. 세르펜스는 그들이 나간 후에야, 작은 디저트용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세르펜스가 숟가락으로 크렘 브륄레 표면의 설탕 층을 톡톡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다가 퍼석, 얇은 설탕막이 깨졌다. 숟가락이 푸욱,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을 파고들었다.
숟가락을 쥔 세르펜스의 손이 움찔하고, 녀석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다.
단순히 먹는 거에서 그치지 않고, 재미 요소가 더해졌을 때 저리 좋아하는 걸 보니 말이다.
세르펜스 어린이가 디저트에 정신 팔려있는 동안, 나는 에일리히와 어른의 대화를 나눠야겠다.
“에일리히 님, 혹시 요즘도 교단 사람들과 자주 연락 하세요?”
“아무래도 교단을 나왔으니 사적인 친분을 내세우기는 좀 힘든 터라, 연락은 삼가고 있습니다.”
이놈의 교단은 들어갈 때도 연을 끊어야 하고, 나올 때도 연을 끊어야 하고.
에일리히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룩스메아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는 욕을 퍼부었다.
‘이단 심문관이었으니, 친한 사람이라고는 전부 교단 사람들뿐이었을 텐데···.’
세간에 퍼진 이단 심문관의 이미지는 무시무시했다.
이단 심문관을 앞에 두면, 사람들은 죄가 없어도 괜스레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행여나 말실수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말을 아꼈다.
지금은 은퇴한 에일리히에게 아르젠토 공작이 쫄아서,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다.
죄 없는 사람도 괜히 찔끔하게 되는데, 걸리는 구석이 있는 아르젠토 공작과 팔숨 경은 오죽할까.
‘아르젠토 공작이 말벗 운운한 걸 보면, 한두 번 온 게 아닌 것 같은데···.’
저택에 혼자 남아 심심한 에일리히가 만만한 아르젠토 공작을 불러서 함께 놀았나 보다.
“그런데 이런 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
나를 바라보는 에일리히의 눈빛이 어딘가 껄끄럽다.
내가 대놓고 세르펜스를 애 취급한 나머지, 자신까지 어린애로 대하며 교우 관계에 간섭하려 든다고 착각했나 보다.
아무리 에일리히가 세르펜스와 닮았다 한들, 그런 짓은 안 한다.
나는 오해가 커지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마력 구속구를 합법적으로 구하고 싶어서요.”
내 말에 에일리히가 ‘아~!’하고 안도 섞인 탄성을 흘렸다.
“그런 거라면 알타르 님께 전달해 두겠습니다.”
“왜 필요한지, 이유는 안 물어봐도 돼요?”
“신의 사자께서 필요로 하신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
세르펜스가 악숭이의 마력 타래를 끊어냈다거나, 물놀이를 했다거나. 그런 얘기를 다 해야 할지, 적당히 얼버무려야 할지.
그런 내 고민이 무색하게도 에일리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악마 숭배자들에게 쓰려고 구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말해 보겠다는 것도 아니라 전달해 두겠다니, 말만 하면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당연히 가져다드려야지요.”
“이야~, 신의 사자가 좋긴 좋네요!”
“···그런 경박한 언행은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일리히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경고했다.
언뜻 보면 웃는 것 같기도 한데, 미소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 밖에 더 전달해야 할 사항은 없습니까?”
“아마도 없을걸요?”
“아마도?”
내가 내뱉은 말에서 ‘아마도’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는지, 에일리히가 좀 더 제대로 생각해 보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럴 시간에 조카와 대화나 할 것이지.
“어···, 교황 성하께서는 강녕하시죠?”
“교단을 나온 뒤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악숭이가 죽이려 들지 모르니까, 밖에 나다니지 말라는 얘기를 경박하지 않은 언어로 포장해서 전해 주실래요?”
“······.”
에일리히의 표정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었다.
언어 포장을 에일리히에게 부탁하지 말고 직접 할 걸 그랬다.
“무언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그냥 조심하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십니까?”
에일리히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추궁하듯 물었다. 저 직업병은 못 고칠 직업병인가 보다.
아무튼 내 말투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였나 보다.
“그게···. 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암흑가가 과거의 잃어버린 지하 성지라면, 당대의 성지는 제국의 수도라 할 수 있다.
땅 위로는 대신전이 있고 땅 아래에는 지하 성지가 있다고 알려졌으니,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 지하 성지는 다른 곳에 있지만···.’
어쨌거나 성검이 내려오는 곳이 대신전이니만큼, 이곳이 룩스메아 교단의 성지라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룩스메아 교단에서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장소다.
그래서 [성검의 주인]에서 제국이 무너진 후.
교황은 이곳을 지키다 죽었다.
‘일단 제국이 무사하니까, 죽을 위험이 줄어들긴 했는데···.’
교황도 자신이 중요하다는 걸 아니까, 알아서 몸을 사리긴 할 거다.
하지만 [성검의 주인]에서 교황이 죽은 뒤로 일어난 혼란을 생각하면, 악숭이들은 이번에도 교황을 죽이려고 할 게 분명하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말이다.
“정말로 뭔가 있는 겁니까?”
에일리히의 표정과 목소리에 깃든 불안함이 선명해졌다.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잣말을 흘린 뒤 그대로 고민에 빠져들었더니,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했나 보다.
본의 아니게 불안감을 조성해버렸다.
“시온이 얼마 전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는데, 그 꿈 내용이···. 너무 불온하여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터라, 망설이고 계신 듯합니다.”
야금야금 크렘 브륄레를 아껴 먹던 세르펜스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잘 먹다 말고 느닷없이 웬 헛소리인가 싶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녀석 앞의 작은 도자기 용기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속이 텅 비어있었다.
그새 다 먹은 거다.
“신의 사자께서 이다지도 신경 쓰신다면, 예사 꿈은 아닐 게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일리히와 세르펜스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아도 썩 달갑지가 않다.
세르펜스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이고, 막힘없이 대화할 주제가 생겨서 달가워하는 듯한 에일리히의 태도도 신경 쓰인다.
이 사람들은 심각한 화젯거리가 없으면 제대로 대화를 못 하나 보다.
“시온은 교황 성하께서 서거하시고, 내부에서 세력 다툼이 일어나 교단이 분열되는 꿈을 꾸었다고 하였습니다.”
녀석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누군가 그런 꿈을 꾸게 된다면 내가 아니라 세르펜스 혹은 휴마누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꿈을 누가 꿨느냐가 아니므로, 나는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덕였다.
“그럼 이 얘기도 함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일리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더 할 얘기가 있느냐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버튼을 꾹 누르면 천기를 누설하는 자판기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안타깝게도 나에겐 더 이상 에일리히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얘기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다른 걸 묻기로 했다.
“그런데 에일리히 님께서는 교단 사람들과의 연락은 삼가고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불편하시면 세르펜스더러 연락하라고 할까요?”
“괜찮습니다. 제가 교단을 나올 적에 교황 성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준비요?”
“신의 사자께서 교단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도록, 알타르 님과 접선할 방법을 일러주셨습니다.”
교황 그 양반도 보통이 아니다.
에일리히를 그냥 놓아준 게 아니라, 신의 사자 옆에 붙여둔다는 개념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이번에는 교단 측에서 도움받는 꼴이 되었지만, 앞으로도 교단에 연락할 일이 생긴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 예에···.”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에일리히의 말에 대충대충 대답하며, 크렘 브륄레를 한 수저 퍼서 입에 쑤셔 넣었다.
버석버석한 설탕막이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며,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과 어우러졌다.
세르펜스가 열중해서 먹을 만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