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5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52화(352/1105)
352회
61. 공작님과 잠깐의 휴식 (4)
나는 세르펜스에게 와인병을 맡아달라 떠넘긴 후, 탁자와 의자를 원위치로 옮겼다. 그리고 벽 선반에 놓인 평범한 유리잔 두 개를 가져왔다.
“제온에게 와인잔도 갖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상관없다.”
“그렇죠? 역시 편한 게 최고죠?”
내 말에 세르펜스가 피식 웃으며, 탁자 위에 와인병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바로 의자에 앉지 않고, 와인병과 오프너를 집어 들었다.
오프너에 달린 커터로 호일을 벗겨내는 것까지는 쉬웠다.
하지만 진정한 시련은 이제부터다.
“그냥 내가 하겠다.”
내가 코르크 마개와 씨름하기 시작하자, 세르펜스가 내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보고 있기 답답했나 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봐요, 거의 다 돼갑니다! 정 심심하면 세르펜스는 방음 스크롤이나 꺼내서 찢고 있어요.”
···라고 말한 것이 무색하게. 한참을 더 낑낑댄 끝에 와인을 딸 수 있었다. 그래도 첫 시도 치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결과라 스스로를 위안했다.
나는 이마에 맺힌 진땀을 닦아낸 뒤, 세르펜스의 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잔은 그렇다 쳐도, 너무 많이 따르는 것 아닌가?”
“제가 살던 곳에서는 ‘술은 채워야 맛, 잔은 비워야 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술을 가득 따라 놓고 원샷을 때리라는 소리죠.”
“···이건 맥주가 아니다.”
“제 고향 사람들이 주로 마시던 술은 이 와인보다 도수가 높습니다.”
물론 소주잔과 일반 컵은 용량 차이가 꽤 나지만, 내 말 자체에 거짓은 없다.
나는 기막혀하는 세르펜스 앞에 와인병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서로의 잔을 채워주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렇군.”
세르펜스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곧 투명한 유리잔에 붉은 와인이 차올랐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세르펜스는 내 잔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와인병을 거둬들였다.
“천천히 마셔라.”
세르펜스가 반밖에 남지 않은 와인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 문화라니까 일단 따르긴 했지만, 걱정되었나 보다.
나도 유리잔에 가득 담긴 와인을 원샷 할 생각은 없었기에, 알겠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방음 스크롤까지 찢으라 한 거지?”
“일단 짠부터 합시다, 짠!”
내가 잔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내 의중을 살피고 있는 거다.
“아, 뭐해요? 팔 떨어지겠습니다.”
다시 한 번 재촉하고 나서야 세르펜스는 잔을 들어 올렸다. 조심스럽게 맞부딪힌 잔은 ‘달각’하고 둔탁한 음을 냈다.
나는 와인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켠 후 잔을 내려놓았다.
세르펜스도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기는 했으나,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안주도 꺼낼까요?”
“저택에 돌아오고 나서, 계속 먹기만 한 것 같군.”
세르펜스의 저 말은 배가 부르니 안주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라는 뜻이기도 했다.
“세르펜스. 솔직히 말해서, 저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죠?”
나는 녀석이 바라는 대로 대뜸 본론을 꺼냈다.
세르펜스의 어깨가 움찔하며 크게 들썩였다. 녀석은 아직 잔을 손에 쥐고 있던 탓에, 붉은 와인이 출렁이며 흘러넘쳤다.
“그러게 잔은 바로바로 내려놨어야죠.”
내가 손수건을 가져와서, 녀석의 손이며 테이블 위에 쏟아진 와인을 닦아내는 동안에도.
세르펜스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녀석이 목소리를 낸 건, 내가 도로 자리에 앉고 난 후였다.
“나는···, 선우가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 했다. 최선을 다해서 찾았음에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알아요, 알아.”
“정말이다, 믿어다오.”
“믿는다니까요?”
녀석은 내가 돌아갈 방법을 애타게 찾았다. 어떨 때 보면 나보다 더 간절해 보일 정도였다.
그 방법을 찾아냈다면, 녀석은 진작에 나를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냈을 거다.
절대로 숨겼을 리 없다.
이는 신뢰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세르펜스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않더라도. 나와 자신 중 한 명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세르펜스는 자신을 희생할 녀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저런 식으로, 도둑이 제 발 저려 하는 듯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하나뿐이다.
내가 이곳에 남는 걸 내심 바라고 있어서.
돌려보낼 방법을 찾아냈을 때, 자신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지. 본인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르펜스가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버릇은 예전부터 있었다. 따라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한 거지? 이 얘기는 끝난 거 아니었나?”
“어째서 끝났다고 생각하세요?”
“선우가 자기 입으로, 고민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말했잖은가.”
“그래서 세르펜스는 고민을 끝냈어요?”
“······.”
끝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더는 고민하지 말자고 생각한다고, 마음에 자리 잡은 불안감이 지워는 건 아니다.
목이 탔는지 세르펜스가 와인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나한텐 천천히 마시라더니···.’
조금 쏟긴 했으나, 4분의 3가량 남아있던 와인이 바닥을 드러냈다.
세르펜스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취기 오른 숨을 후욱 내쉬었다. 긴 숨을 내뱉는 녀석의 얼굴이 붉었다.
일부러 알코올을 내버려 둔 거다.
반응이 즉각적인 거로 보아, 아까 마셨던 술 또한 정화하지 않았나 보다.
“더 마실래요? 아니면 그만?”
내 물음에 세르펜스는 말없이 빈 잔을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와인병을 기울였고, 무색투명한 유리잔이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
세르펜스의 손이 잔에서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또다시 녀석에게 질문했다.
“정 불안하면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거리를 둘까요?”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세르펜스가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했다.
초조하여 어디로든 나아가고 싶은데, 그 길이 맞는 길인지 몰라서. 녀석의 마음이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이, 내 눈에는 훤히 보였다.
“진심일 리가요. 분리불안이 걱정되긴 하지만, 이런 방법은 안 되죠.”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지?”
녀석이 따지듯이 물었다.
울컥 치밀어 오른 화를 억누른 듯, 녀석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냥 세르펜스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해서요.”
“솔직하지 못한 건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럼 함께 솔직해지면 되겠네요.”
그러려고 술도 준비해왔다.
중요한 얘기를 술기운에 의존하여 쏟아내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술기운이라도 빌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어차피 세르펜스와 내 마음속에는, 몇 번이고 생각하여 가다듬은 정제된 말이 있다.
술에 취했다고 해서 말실수할 일은 없다.
나는 말 하기에 앞서, 와인으로 입을 축였다.
“저는 돌아가든, 돌아가지 못하든. 상관없어요.”
“솔직해지자고 말해놓고, 시작하자마자 거짓말을 하다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헛소리.”
나를 자세히 살피면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녀석은 나를 외면한 채, 술잔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물론 가족들이 그립기야 하죠. 원래 세상에서 사귀었던 친구들도 보고 싶고.”
“그러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하지만 그건 돌아가도 마찬가집니다.”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던 세르펜스가 이어진 내 말에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녀석의 초록색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유지스나 윈스톤은 물론이고. 에드나 씨, 에일리히 님. 제온이랑 공작저 식구들, 모두 모두 보고 싶을 겁니다. 휴마누스도 뭐···, 쬐끔?”
“···나는?”
“당연히 세르펜스가 가장 그립고, 보고 싶겠죠. 저 없이도 간식은 잘 챙겨 먹는지. 또 혼자서 땅 파고 있는 게 아닐지. 엄청나게 걱정되고 신경 쓰일 겁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이 녀석의 귀에는 작별 인사처럼 들리나 보다.
세르펜스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소중한 사람이 늘어갈 테고, 이미 친한 사람들과는 더 정이 들겠죠. 오랫동안 못 본 사람들과 만나면 반갑고 기쁠 거라는 걸 아는데, 당장 눈앞의 사람들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이래서 정이라는 게 무서운 거다.
분명 처음에는 별거 아니었는데. 아차 하는 사이 눈덩이 굴러가듯 불어나서,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를 잡는다.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어떻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
한동안 내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세르펜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선우를 떠나보낼 자신이 있었다. 그대를 본래 세계로 돌려보내도, 이 세계에 온 당신이 그러했듯이. 버티고 버티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선우가 없는 일상이 두려워져서···.”
말이 길어질수록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울음을 억지로 삼키느라, 중간중간 말이 끊겼다. 그럼에도 세르펜스는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추억이 쌓여가고,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해져서 그런 겁니다.”
“미안하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세르펜스의 손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아래만 보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올려 나를 바라봤다.
“선우, 당신은 어떻게 버틸 수 있었지?”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얼떨떨하기도 했고, 돌아갈 방도가 없는 것도 그렇고···. 어쩔 수 없으니 그냥 그렇게 살아지더라고요.”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이게 뭐 좋은 거라고 배우려고 들어요?”
“하지만 당신이 돌아간다면, 결국에는···.”
세르펜스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와인을 들이켰다.
그 행동이 마치 말을 끝맺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처럼 보였다.
“룩스메아도 양심이 있다면 돌아갈 땐 선택할 기회를 주겠죠.”
“그건 대체, 무슨 의미지?”
“다 알아들었으면서 뭘 물어요?”
말하다 보니 목이 타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랬더니 목이 타오르는 듯하다.
“···이곳에, 남겠다고?”
“선택권이 주어진다면요.”
세르펜스가 나와의 이별을 그리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세르펜스와의 이별이 어떤 형태일지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다.
“돌아가나, 이곳에 남으나.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하는 건 매한가지잖아요. 그렇다면 저를 더 필요로 하고, 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 곁에 남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요.”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식으로라도 합리화하려는 것···. 아닌가?”
“아주 약~간 그런 점도 없잖아 있긴 한데···. 고민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결국 이곳에 남는 쪽을 택할 것 같아요.”
“나 때문에?”
“아하하···.”
솔직하게 말하기로 한 이상 거짓말은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난감한 질문이라,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웃음이 못마땅했는지, 세르펜스는 두 번째 잔을 비웠다.
“천천히 좀 마셔요.”
“선우우···. 당신의 고향에서느은-. 도수가 더 높은 술로, 이렇게 마신다고 하지 않았, 나···?”
완전 취했는지, 세르펜스의 말이 묘하게 늘어졌다.
사실은 조금 전부터 취한 것 같긴 했다. 자꾸만 뭉개지려는 발음을 똑바로 하려는 듯, 짧게 끊어서 말해댔으니.
티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바닥에 떨어질 미트볼을 불쌍해했을 때보다, 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걱정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르펜스는 자신의 빈 잔을 내게 들이밀었다.
어서 채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