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6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69화(369/1105)
369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9)
내가 베일의 여정을 들은 횟수가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다.
어제 베일에게서 한 번, 세르펜스가 에일리히와 유지스에게 설명할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베일에게서 또 한 번.
짧은 텀을 두고 똑같은 얘기를 연달아 들으니, 집중력이 떨어졌다.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베일의 얘기를 처음 듣는 알타르는 소소한 것까지 캐물어 가며, 자세히 파고들었다. 에일리히는 처음 듣는 척 시치미를 떼고 앉았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시종일관 안쓰럽다는 표정을 유지하였으나, 속으로는 어제 들었던 얘기와 바뀐 점은 없는지 비교 분석하고 있을 테다.
‘내가 듣기엔 그게 그거 같은데?’
정리된 글을 외워서 말하는 게 아니라, 경험한 일을 토대로 말하는 거다.
기계가 아니고서야 어제와 완벽하게 똑같은 문장을 구사할 수는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자연스러웠다.
가장 중요한 맥락은 어제와 동일했다.
일관적인 내용에 베일을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눈빛에 어린 의심이 다소 희석되는 듯했다.
이제 제온에게서 보고를 받은 후, 베일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게 밝혀지기만 하면 된다. 그럼 세르펜스도 조금쯤은 베일을 믿어주겠지.
“···그렇게 제국의 수도로 오게 된 겁니다.”
어느덧 베일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알타르는 들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중인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말없이 사색에 잠겼다.
잠시 뒤. 알타르가 침착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알타르는 개인적인 의견을 배제한 채, 간결하게 말했다.
세르펜스가 그러했듯. 알타르 또한 확실한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판단은 보류할 생각인가 보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알타르가 차분하다 못해 냉랭한 목소리로 베일에게 질문했다.
그에 베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하다니, 무엇을 말입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베일 바스툴 님께서 방금 하셨던 말씀이 전부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하는 말입니다.”
되묻는 베일의 말에 알타르가 철저하게 선을 그으며 운을 띄웠다.
“베일 바스툴 님께서 이곳에 오시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바스툴 왕실이 그때부터 악마 숭배 세력과 접촉을 시도했다 치더라도, 지금쯤이면 밀접한 관계를 맺고도 남았을 시간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 시종의 말에 속아 넘어가는 바람에···.”
“지금 그것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베일이 자책하며 사과하자, 알타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타르가 그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넨 것은 아니었다.
“베일 바스툴 님께서는 왕실의 뜻에 반발하여 목숨을 위협당했고, 자발적으로 그들을 신고하셨습니다. 이 점을 참작하여, 베일 바스툴 님께서는 면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철저하게 이단으로서 심판을 받게 될 겁니다.”
더욱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있기에. 지난날의 잘못을 탓하느라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는 건 비합리적이므로, 그냥 넘어간 것뿐이다.
냉랭한 표정으로 말하는 알타르의 모습이 마치 판결을 선고하는 판사처럼 느껴졌다.
“이 말인즉슨, 베일 바스툴 님이 유일한 바스툴 왕족의 혈통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런 알타르의 말에 베일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흐읍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알타르는 그런 베일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모르셨던 겁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혹시 왕이 되려고 이런 얘기를 꾸며낸 것 아니냐는, 노골적으로 떠보는 말이다.
이대로라면 베일은 권력 욕심에 가족을 팔아먹은 패륜아로 낙인찍히게 생겼다.
세르펜스는 자못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꾸며내며, 베일의 안색을 살폈다.
“그, 그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어떻게든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그딴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없었습니다!”
베일이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어저께, 그는 세르펜스에게 자신의 말을 믿어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두려웠다든가, 힘들었다든가. 직접 말하지 않았을 뿐, 그는 그러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주지 않아서 이단으로 몰려서 사형을 당하거나.
누구에게도 진실을 알리지 못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거나.
베일이 생각해온 이 여정의 끝은 그 두 갈림길뿐이었으리라.
“그럼 이제부터라도 생각해 보셔야 할 겁니다.”
알타르의 냉정한 말에 베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베일의 그런 반응들을 누군가는 대놓고. 누군가는 은밀하게 관찰했다.
자신을 속속들이 살피며 의심하는 눈빛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하건만. 베일은 오히려 진정을 되찾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프라시더스 님께서는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알타르가 베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이 자리에 베일만 없었더라면, 알타르는 저 질문을 나에게 했을 거다.
하지만 내 대외 신분은 세르펜스의 보좌관에 불과했다.
신의 사자 겸 천사라는 내 설정을 모르는 베일 앞에서, 상관인 세르펜스를 무시하고 내게 앞으로의 일정을 물을 수는 없었다.
“이번 일에 관해, 성검의 주인에게 편지를 보내 놓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나서고 싶지만···.”
세르펜스가 말끝을 흐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휴마누스의 답장을 기다리고, 그가 전쟁터를 비울 수 없다고 한다면. 그때 자신이 나서겠다는 뜻이었다.
그 와중에 세르펜스는 베일과 눈을 마주치는 걸 잊지 않았다.
녀석의 시기적절한 시선 처리 덕분에 ‘나는 너를 믿고 있으며,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선뜻 도울 수 없어서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녀석은 직접 나서고 싶다고 표현했을 뿐. 베일을 돕고 싶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세르펜스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건, 만에 하나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베일이 악숭이로 판명 난다면, 피해를 입는 건 그를 돕겠다고 말한 세르펜스 뿐만이 아니다. 녀석의 주변인들까지 피해를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신의 사자를 자처하는 내가 가장 곤란해지겠지.’
그렇기에 녀석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아···. 악마 숭배자들이 퍼트린 소문을 믿는 우매한 자들 때문에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알타르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깟 소문 때문에 세르펜스라는 유능한 전력을 반쯤 썩혀야 한다니. 정말 대륙적으로 큰 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현 성검의 주인이신 황태자 전하께서는 계속 성장하고 계십니다. 머지않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실 테고, 그때가 된다면 모든 이들이 룩스메아 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겁니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프라시더스 님 같았으면,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을 텐데···.”
세르펜스가 독실한 신자가 할 법한 말을 줄줄 내뱉자, 알타르가 씁쓸한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말을 중얼거렸다.
만일 얼굴을 말하는 거라면 백 번 천 번 동의하겠으나, 정황상 그건 아니었다. 분명 내면을 말하는 걸 테다.
모든 이들이 세르펜스 같으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타이틀을 갖다 버려야 한다.
서로를 의심하고 배제하며,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려 할 텐데. 퍽이나 살기 좋은 세상이다.
“저는 이만 보고를 올리러 돌아가겠습니다.”
“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세르펜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알타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일리히도 알타르를 배웅해 주겠다며 따라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응접실에는 또다시 나와 세르펜스. 그리고 베일. 세 명이 남았다.
“그럼 저도 슬슬 일어나 보겠습니다.”
“저···. 바쁘신 일이 없으시다면,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누다 가시지 않겠습니까?”
세르펜스가 처연한 표정을 꾸며내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베일을 붙잡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베일에게 바쁜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아니, 그냥 할 일 자체가 없었다.
반쯤 일어났던 베일이 도로 소파에 앉았다.
“이단 심문관님이 저하를 이렇게까지 의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미리 얘기해 두는 건데···.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의심받는 건 진작에 각오했습니다. 그러니 제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직접 나서서 도와주고 싶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베일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웃으며, 세르펜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째서인지 내 양심이 따끔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연기펜스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녀석의 말이 ‘내 계획대로 움직여 줘서 참으로 고맙다.’라고 번역되어 들렸다.
세르펜스를 키워온 사람으로서, 베일에게 몹시나 미안해졌다. 하마터면 앞으로는 자식 교육을 똑바로 하겠노라 사과할 뻔했다.
“그건 그렇고 이단 심문관님이 저하께 마지막으로 하셨던 얘기에 관해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게 한 마지막 얘기라면···. 그런 거 아닙니다!”
세르펜스가 말한 ‘마지막 얘기’를 떠올린 베일이 퍼뜩 놀라 소리쳤다.
“알고 있습니다. 저하께서 왕위를 욕심내실 분이 아니며, 순수한 의도로 바스툴 왕실을 고발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 얘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
베일이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들짝 놀랐다.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표정만 변한 게 아니라 움찔하며 몸까지 들썩였다.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세르펜스는 자신의 연기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녀석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풍성한 청은색 속눈썹이 살포시 내려앉으며, 녹색 눈동자가 반쯤 가려졌다.
“타국의 귀족인 제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이상하게 들린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 대륙을 위해···, 그리고 바스툴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내뱉으며, 세르펜스는 반개했던 눈을 완전히 떴다.
그와 동시에, 에메랄드처럼 맑은 빛으로 반짝이는 세르펜스의 눈동자가 베일을 직시했다.
‘에드나를 영입할 때도 그러더니···.’
퀘스트 NPC 놀이가 적성에 맞았나 보다.
“이대로 현 바스툴 국왕에게 왕국을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공국의 상황을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공국민을 그토록 생각했던 공왕조차도. 악마 숭배자들의 꾐에 넘어간 후로는 그들의 목숨을 소모품처럼 이용했습니다.”
세르펜스는 눈동자를 초롱초롱 반짝이며, ‘공왕도 그 정도인데, 원래 개차반이던 너희 아버지는 어떻겠냐.’라는 패드립을 시전했다.
“바스툴 왕국의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오직 저하뿐입니다. 만약 저하께서 왕위를 포기하신다면, 바스툴 왕국은 이 대륙에서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나라는 사라지는 게 낫습니다.”
베일이 세르펜스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베일은 이번 일로 바스툴 왕실에 크게 실망한 모양이다.
아까 자기소개를 했을 때부터 그런 기미가 보이긴 했다.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기 위해 ‘바스툴’이라는 자신의 성을 붙여 소개한 것일 뿐. 그런 게 아니라면 이름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왕국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귀족 중에서는 왕을 자칭하는 자가 생겨날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서로를 헐뜯을 겁니다. 개중에 악마 숭배자들의 유혹에 넘어간 자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아니···. 모두가 악마 숭배 세력의 손에 놀아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땅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