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6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70화(370/1105)
370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10)
세르펜스가 말을 끝마친 뒤에도 베일은 한참을 침묵했다. 세르펜스는 답답해하는 기색 없이 다소곳하게 앉아, 그의 답을 기다렸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마침내 베일이 입을 열었으나, 결론을 내린 건 아니었다. 그의 표정에서 고뇌가 가득 묻어났다.
아무래도 혼자서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망설이는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순간적인 정의감에 휘둘려서. 혹은 타인의 강요에 떠밀려 섣불리 결정한다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올 거다.
그도 그러할 게 무려 한 국가를 짊어지는 선택이다.
흔들리지 않겠다는 굳건한 각오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베일은 너무 지쳐있다.
“알겠습니다. 만일 혼자 고민하는 게 버거워지시면, 언제든 좋으니 집무실로 찾아와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다정스레 베일에게 말을 건넸다. 베일은 그런 녀석의 눈을 차마 마주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을 피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베일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세르펜스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베일이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계속 이곳에 있을 생각인가?”
내가 가만히 앉아 있자, 세르펜스가 나에게 말을 붙였다. 일하러 안 갈 거냐는 물음이다.
고개를 돌려 세르펜스를 바라보니, 녀석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좀 더 이후에나 권할 줄 알았는데···.”
“말이 나온 김에, 조언을 건넨 것뿐이다.”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세르펜스가 대답했다.
알타르가 먼저 왕위 얘기를 꺼냈으니, 자신은 그에 편승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선우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나?”
세르펜스가 도로 자리에 앉으며 내게 물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은 특유의 처량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런 녀석의 처연한 얼굴 때문에, 나도 모르게 녀석을 질책했던 건 아닌지 기억을 되짚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은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언젠가 마주해야 할 문제라면, 일찍 말해두는 편이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 더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알아요. 세르펜스도 다 생각이 있었다는 거. 그리고 그게 틀리지 않는다는 것도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지?”
“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어요?”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냉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행동이 더 수상하게 느껴진다는 걸, 녀석은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설마 베일에게 미안해서 저러나?’
세르펜스가 베일을 믿어주는 척 의심한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녀석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어쨌거나 세르펜스의 그런 언행으로 베일은 큰 위안을 얻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녀석이 베일에게 한 말은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왔다.
세르펜스는 베일이 혼란스럽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가 안정을 취할 새도 없이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책임을 강요했다.
긴 세월 책임에 짓눌려 살아왔던 녀석이니만큼, 그게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세르펜스의 반응을 봤을 때.
자신이 어째서 미안함을 느끼는지 이유를 찾지 못해서, 그것이 미안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막연하게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 점을 짚어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내가 세르펜스 행동 분석의 권위자이긴 하나, 내가 내린 답이 언제나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세르펜스는 이제 감정을 배워나가는 단계를 지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단계에 와 있다.
타인의 감정을 멋대로 정의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감정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세르펜스 본인이 해야 한다.
내가 하나하나 가르쳐 줄 시기는 지났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우리 애가 잘 크고 있구나 싶어서요.”
“······.”
내 말에 세르펜스가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라고 묻는 듯한 얼굴을 했다.
원래 아이는 부모의 마음을 잘 모르는 법이다. 언제쯤 세르펜스가 나의 깊은 뜻을 이해해 주려나 모르겠다.
“그보다 웬일이래요? 저는 베일이 악숭 세력과 관련이 없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온 후에야, 세르펜스가 왕위 얘기를 꺼낼 줄 알았는데.”
“···그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세르펜스가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객관적인 증거를 확인하기도 전에 낯선 사람의 말을 믿어주다니. 비록 만에 하나를 놓지 않고, 계속 베일을 경계했으나 이게 어디랴.
나는 녀석의 성장이 놀랍기도 하고 반가워서 짝짝짝 손뼉 쳤다.
그런 내 행동에 세르펜스가 민망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그만하라는 듯 홰홰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자가 완전히 악마 숭배 세력과 관련이 없다고 믿는 건 아니다.”
“왜죠?”
“선우가 읽었던 책에서도 그자는 자각 없이 이용당했잖은가.”
“뭐, 그랬죠···.”
다른 누구도 아닌 세르펜스가 그 점을 지적하니, 어째 떨떠름하다.
녀석도 머쓱했는지 괜스레 헛기침을 해댔다.
“흠, 흠! 하지만 그자를 왕으로 내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아까 세르펜스가 베일에게 말했던 그 이유 때문에요?”
세르펜스는 베일에게 바스툴 왕실이 사라졌을 때, 생겨날 수 있는 비극을 말하였다.
녀석이 한 말은 가정이 아니다. 정해진 결말이나 다름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할 줄 알았던 세르펜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뭐가 더 있느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녀석이 알아서 설명을 부연했다.
“현 바스툴 왕국은 근본부터 썩어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지도자가 필요하다.”
“세르펜스가 말한 그 제대로 된 지도자라는 게, 베일을 말하는 겁니까?”
“달리 없잖은가.”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게 이런 말이었나 보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왕이 그 꼬락서니인데, 아래 귀족들의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있을 리가 없다.
개중에는 베일처럼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어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사람이 금수도 아니고, 어떻게 욕망에 따라 본능으로만 살려 하겠는가. 사람다운 삶을 원하며, 현실이 변하길 바라는 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지···.’
실로 착잡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바스툴 2왕자는 그 자리에 비해, 가진 권력이 없다.”
“그야 뭐, 현 바스툴 국왕과 성향이 다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나라를 위해 이런저런 의견을 내도 묵살당하는 거겠죠···.”
내가 답답한 마음에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세르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선우는 모르는 건가?”
“뭘요?”
“그자가 무시당하는 가장 큰 원인은 기반 세력의 부재 탓이다.”
“그야 베일을 지지하면 왕에게 밉보일 테니까···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네요.”
나는 급하게 말을 돌렸다.
세르펜스의 표정을 보건대, 다른 이유가 더 있음이 틀림없다.
“내가 그자를 처음 본 건, 5년 전 황제 폐하의 탄신 연회였다.”
“네, 그렇게 말했었죠.”
“그자는 다른 나라도 아닌, 신성 루멘 제국의 연회에 보내진 거다.”
“두 번 말한다는 건, 중요한 부분이니 강조한다는 뜻이죠?”
“그렇게 말하는 건, 강조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내가 이해를 못 한 건 사실이므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는 단순한 사교 활동의 장이 아니다. 정치적인 이득을 꾀하며 인맥을 쌓고, 타인을 견제하기 위한 장소지.”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어째서 연회에 참여를 안 하실까?”
“나는 이득을 얻는 쪽이 아닌, 이득을 주는 쪽이잖은가.”
세르펜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신은 그런 곳에 참여 하든 안 하든, 어차피 사람들이 굽실대며 접근한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라 차마 반박할 수 없다. 이럴 땐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어쨌든 제국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다는 건, 제국의 귀족 혹은 황족과 인맥을 쌓을 귀중한 기회다. 또한 선진국의 발전된 제도나 문화를 접하며 견문을 넓히는 등, 부가적인 이득도 상당하다.”
“유학도 아니고 잠깐 방문하는 건데, 그 정도씩이나···.”
“노력한다면 하루 만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10년의 세월이 주어져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법이지.”
어쩐지 세르펜스의 말이 공부하라는 잔소리로 들렸다.
내가 이 세계에 온 지 2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정계에 어두운 것을 콕 찍어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세르펜스의 말은 5년 전까지만 해도, 베일에게 그럭저럭 세력이 있었다는 얘기죠?”
“그래. 비록 그자가 2왕자이긴 해도 1왕자와는 달리, 왕비의 소생이었으니까.”
“예?!”
“역시 몰랐나 보군.”
화들짝 놀라는 내 반응을 보며, 세르펜스가 혀를 쯧쯧 찼다.
아무래도 세르펜스의 말이 잔소리로 들렸던 게, 잔소리가 맞아서 그랬나 보다.
“바스툴 왕국의 1왕자는, 거 뭣이냐···. 첩의 자식이라는 겁니까?”
“그랬었지.”
“왜 아까부터 과거형인 거죠?”
“지금은 1왕자를 낳은 첩실이 왕비가 되었다.”
“그럼 베일의 어머니는···. 아,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충 예상이 가니까.”
굳이 물어 확인할 필요도 없이, 베일의 친어머니는 죽었다는 뜻이다.
“어쩐지 바스툴 왕실 사람 중, 베일만 따로 논다 했더니···.”
베일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해도 어머니의 가문은 남았을 테니, 베일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베일에게 기반 세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 전 왕비의 죽음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으며···.
‘바스툴 국왕이 그것을 묵인했거나, 죽은 왕비 가문의 위세를 꺾으려고 직접 암살을 지시했거나.’
그 둘 중 하나라는 거겠지.
“왜 이런 중요한 내용이 [성검의 주인]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건지 모르겠네! 베일이 아예 비중 없던 인물도 아닌데!”
“······.”
내가 툴툴거리며 혼자 열을 내고 있으려니, 세르펜스가 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그냥···. 그대는 하려고 하면 이렇게 잘하는데, 평소에는 어째서 안 하는 건가 싶어서···?”
“지금 저더러 생각 없이 산다고 비꼰 겁니까?”
“······.”
세르펜스가 조용히 내 시선을 피했다. 짙은 배신감이 몰려들었다.
내가 누구를 키우느라, 팔자에도 없는 디저트 가게의 신상 목록을 꿰고 사는데. 그러다 보면 바빠서 정치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가계가 쪼들리는 것도 모르고, 값비싼 메이커 패딩을 사달라고 조르는 자식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제가 만약 세르펜스가 먹다 남긴 찬밥을 먹고 있으면, 구질구질하다며 화낼 거죠? 배은망덕하게!”
“배가 고프면 새로 사 줄 테니, 다른 사람이 먹다 남긴 건 먹지 마라.”
“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세르펜스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도 몰라주고!”
“아, 알았다. 먹게 해 주겠다. 그러니 섭섭해하지 마라.”
“그게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
내 외침에 세르펜스가 뭘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