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7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72화(372/1105)
372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12)
베일이 공작저에 온 날로부터 닷새가 흘렀다.
아직 공국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던가, 바스툴 왕실이 악숭이와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던가.
대륙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건 알고 있으나, 그 사실이 체감되지 않을 정도로 공작저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올해 초, 악마가 나타나기 이전과 엇비슷했다.
완전히 똑같지 않고 엇비슷함에서 그친 이유는, 자문회를 안 가도 된다는 점과 저택 내에 새로운 사람이 추가됐다는 것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유지스 혼자 밖에 나가는 걸 걱정한 세르펜스가 오늘 새벽, 그녀와 함께 등산에 다녀왔다. 그냥 둘이서만 다녀온 거라면 부지런하다며 혀를 내두르고 끝날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나를 끌고 갔다.
당연하게도 내가 둘의 페이스를 따라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고, 중간부터는 세르펜스에게 들려 다녔다.
‘그래도 산 정상에서 먹은 도시락은 맛있었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세르펜스는 먼저 도착하여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일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렸나?”
“산에 올라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돌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건가?”
“잘 자는 사람을 깨워서 산에 끌고 간 사람이 뭐라는 거야?”
“황태자에게서 답장이 왔으니, 그거나 확인해라.”
세르펜스가 그렇게 말하며 내 책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는 세르펜스와 말장난하던 것을 멈추고 내 자리로 향했다. 책상 위에 놓인 편지는 이미 뜯어진 상태였는데, 세르펜스가 먼저 읽어 본 모양이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공국과의 전쟁이 마무리되는 대로 뒤따라갈 테니 먼저 가 있으라는 얘기였다.
“전쟁이 언제 끝날 줄 알고···.”
“관련 서류도 책상 위에 올려놨으니, 읽어 봐라.”
내 혼잣말에 세르펜스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차림새를 보면 산에 갔다 돌아온 뒤, 방에서 씻고 온 게 분명하거늘. 언제 전쟁 관련 서류까지 정리해 놨는지 미스터리다.
“평소에 관련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분류해 놓은 거다.”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챘는지, 세르펜스가 내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건 굳이 말을 안 해도 이렇게나 뜻이 잘 통하는데. 어째서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삐딱선을 타는지 모르겠다.
“제가 여태껏 받은 서류 중에는 그런 내용은 하나도 없었는데요?”
“그렇겠지.”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전쟁처럼 흉흉한 사건에 관한 서류는 자신이 다 챙겨갔다는 뜻이다.
“어쩐지···. 세르펜스가 전쟁에 참가를 안 하니 물자라도 내놓으라고 할 법한데, 그런 서류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게 좀 이상하다 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자세히 알아보려 노력할 생각은 안 한 건가?”
“사실 지금 떠올린 겁니다.”
“뻔뻔하긴.”
내 이실직고에 세르펜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세르펜스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집무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제 잡소리는 그만하고 서류나 확인하라는 의미다.
나는 휴마누스가 보낸 편지를 한쪽으로 치우고, 그 밑에 놓인 서류를 확인했다.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고 때로는 위태로운 상황도 벌어졌으나, 결과는 연전연승이었다.
또한 휴마누스가 악마 하나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어? 여기 제일 마지막 장에 공국이 항복했다고 쓰여 있는데요?”
“항복을 받았다고 전쟁이 바로 끝나는 건 아니다. 진짜 적은 공국이 아닌 악마 숭배 세력이다. 앞에서는 항복한 척하고, 뒤로는 어떤 함정을 숨겨두고 있을지 모른다.”
세르펜스가 계속 펜을 놀리면서 대답했다.
어떻게 된 뇌 구조인지, 말하면서 글을 써도 안 헷갈리나 보다.
“그리고 서류를 봐서 알겠지만, 이번에 황태자가 없앤 건 닷새 전에 나타난 악마다. 공왕과 다른 악마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마물도···.”
“네, 네. 밤에 진지를 습격한 마물들도 있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다기보다 그냥 풀어놓은 것뿐이라는 얘기 말이죠? 저도 다 읽었습니다.”
“그런 것 같군.”
세르펜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이 몹시나 진지했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쭉 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역시 항복은 함정일까요?”
“단순히 그 정도에서 그친다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게 다행이라고요? 그럼 다행이 아닌 건 뭔데요?”
“공왕을 비롯한 악마 숭배의 핵심 인원은 진즉에 공국을 떠났고, 싸울 필요가 없는 무고한 자들만 남아 불필요한 피를 흘린 것.”
세르펜스가 어미(語尾)를 생략하며, 명료하게 답했다.
그 말대로라면 연이은 승전보가 무색해진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영광이 적에게 농락당했다는 굴욕으로 뒤집히고, 환성은 원성이 되어 쏟아질 거다
“하지만 마물들도 종종 나타났고, 새로 악마도 소환됐는데···.”
“그러한 공작을 할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서, 전쟁이 이어지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다.”
세르펜스의 얘기가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병사들을 내모는 것쯤은 병권을 쥔 귀족을 세뇌해서 조종하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병사들에게 광폭화 마법 따위를 걸면, 병사들이 항복하는 것 또한 막을 수 있다.
‘아니면 투기장에서 쓴 것과 비슷한 류의 약물을 썼을 수도 있고···.’
내가 읽은 서류는 세르펜스가 뺄 건 빼고 정리한 내용이다. 악숭이가 정직하게 병력을 운영했을 리가 없다.
휴마누스가 악마 하나 해치웠다고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만약 이 사실···. 아니, 아직 사실이라고 판명 난 건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가능성을 빨리 알아챘으면···.”
“그렇다 해도 공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공국에 남은 이들이 전쟁을 멈출 권한이 있었다면, 진작 항복하거나 휴전을 요청했을 거다. 하지만 제국과 교단의 연합군이 공국의 수도를 목전에 두고서야 항복했지.”
이전에도 비슷한 대화가 오갔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공국이 먼저 공격했을 테니, 우리가 먼저 공국에 쳐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얘기였다.
“공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가장 의문스러워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싸우는 이들이다. 지휘부에서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거다. 다만, 모르는 척하는 것뿐일 테지.”
“사기가 떨어질까 봐요?”
“잘 알고 있군.”
그렇다는 건 휴마누스도 알고 있을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눈치 없는 휴마누스가 직접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주변에서 알려줬을 테니까.
‘즉, 휴마누스는 그걸 알면서도 전쟁에서 공국군과 싸워나갔다는 뜻인가···.’
나도 모르게 한쪽에 치워 뒀던 휴마누스의 편지로 눈길이 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휴마누스치고 편지에 잡설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세르펜스에게 보내는 편지이니만큼, 자신이 악마를 잡았다는 얘기도 늘어놨을 법도 한데 그러한 얘기는 일절 없었다.
“황태자가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건, 공국이 빈껍데기나 다름없다는 걸 일반 병사들에게 숨기기 위함일 거다.”
세르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혀를 찼다.
녀석도 휴마누스가 걱정되기는 한 모양이다.
“세르펜스라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이미 반쯤 지난 일이 되어버렸지만, 세르펜스라면 다른 해결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질문이 튀어나왔다.
내 질문에 세르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고 뚜렷한 방안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황태자와는 다른 행동을 했을 거다.”
“다른 행동이라면···?”
“사라진 공왕의 행방을 찾아 떠났겠지. 남은 이들이 불안해하든, 죄책감을 떠안든. 내가 할 일은 악마 숭배자를 처리하는 거니까.”
내 물음의 의도는 ‘그 장소에 있었다면’을 전제로 한 것이나, 돌아온 건 ‘성검의 주인이라면’을 가정한 답이었다.
어쨌거나 다른 방도가 없다는 건 같았으므로 재차 질문할 필요는 없었다.
질문을 정정하길 포기했더니,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세르펜스의 대답에 무어라 말을 얹기도 껄끄럽고, 그렇다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더 늘어놓아 봤자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짧은 망설임 끝에 나는 다른 화제를 꺼내기로 했다.
“황태자 하니까 떠오른 건데, 서쪽 별관의 왕자님 말인데요.”
“바스툴 2왕자 말인가?”
“네, 베일이요.”
베일의 행적에 관한 2차 보고는 어제 받았다.
제국 밖에서의 일은 교단에서 조사 중이며, 그 결과가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제국 내에서의 행적은 진실로 밝혀졌다.
아마 외국에서의 행적 또한 진짜일 거다.
조사하면 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이단 심문관 앞에서 태연하게 늘어놓았을 리는 없을 테니까.
“갑자기 그자 얘기는 왜 꺼내는 거지?”
“이대로 계속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베일은 세르펜스에게 고민해 보겠다는 말을 남긴 후, 서쪽 별관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온에게 물어보니 오래 굶었던 기억 탓에 꾸역꾸역 식사는 하는 것 같은데, 의욕도 없어 보이고 정신도 반쯤 나간 게, 처음 올 때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인다고 했다.
눈도 반쯤 죽어있다나, 뭐라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식사 자리에 베일도 끼워줄걸···.’
그럴 때일수록 혼자 두면 안 되는데.
우리 애가 하고 싶다는 대로 그냥 놔둔 게,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몰랐다.
“흐음···. 마침 적당한 핑곗거리도 생겼으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세르펜스가 내 책상 구석에 놓인 휴마누스의 편지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말을 정정해 주기로 했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가봐야 하는 겁니다. 세르펜스도 베일의 상태에 관해 얘기 들었을 거 아닙니까?”
나는 제온에게 물어봐서 들은 거지만, 세르펜스는 에일리히에게 자세한 보고를 받았을 거다.
그런데도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설마 에일리히 님이 조카와 대화한다는 게 마냥 기뻐서, 실실 웃으면서 보고한 겁니까?”
“백부님께서 이단 심문관 출신이긴 해도 공감 능력이 없으신 건 아니다.”
세르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히도 내 우려는 그저 우려에서 끝났다. 에일리히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조카 바보는 아니었던 거다.
“그럼 진작 만나러 갈 생각을 해야지, 왜 핑곗거리를 찾고 있어요?”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멋대로 위로해 주겠다고 찾아가는 건 민폐지 않은가?”
세르펜스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나는 녀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파악하기 위해,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해답은 금방 나왔다.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네요.”
“어디 당신만 할까.”
내가 혀를 내두르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남 말 하지 말라며 쏘아붙였다.
기가 차서 헛숨이 다 나온다.
“나 참, 어이가 없으려니까! 저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끼친 거고, 휴마누스는 반대잖습니까? 동일 선상에 놓지 마시죠?”
“미안하다. 내가 큰 실례를 저질렀군.”
“알면 됐어요.”
나는 휴마누스의 편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는 건가?”
“당연하죠!”
“일은?”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다.”
세르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상 위 서류들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