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7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75화(375/1105)
375회
63. 공작님과 바스툴 2왕자 (15)
베일과의 만남 후. 세르펜스는 바로 에일리히에게 알타르를 불러달라고 부탁했고, 다음날 알타르가 찾아왔다.
이제는 알타르가 이단 심문관이 아니라, 그냥 심부름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단 심문관이 하는 일이라고 해봤자, 흉흉한 것들뿐이잖아?’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는 보람은 떨어질지 몰라도, 몸도 편하고 정신 건강에도 이로우니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듯하다.
아예 잘리거나 좌천당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장기 휴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득 아닌가?
게다가 알타르 또한 자신의 본업이 이단 심문관임을 망각한 듯하다.
“그러지 않아도 얼마 전 시온 님께서 부탁하셨던, 베일 바스툴 님의 사망과 관련해 보고차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서쪽 별관으로 불려온 알타르가 나에게 서류를 내밀며 말하였다.
이 자리에 베일이 없었다면, 부탁이 아닌 ‘지시’라 칭했겠지. 아주 심부름꾼이 다 됐다.
“시온 경? 내 사망과 관련한 보고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베일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이가 없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알타르를 만나서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 몰래 내 이름을 팔아서, 이런 짓을 꾸밀만한 녀석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친히 예고까지 했으니 모를 수가 없다.
며칠 전, 세르펜스는 베일의 죽음을 위장하자는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가증펜스로 둔갑하더니, 자신은 그런 무서운 말을 할 수 없다며 발칙한 소리를 해댔다.
‘그 뒤로 알타르가 방문하지 않길래, 베일의 외국 행적 조사가 끝나서 그가 보고하러 올 때 겸사겸사 부탁하려는 줄 알았는데···!’
알타르를 저택 안으로 불러들일 것 없이, 그냥 에일리히를 통해 지시만 전달한 모양이다.
정황 파악도 됐겠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알타르가 내민 서류를 건네받았다.
“이렇게 빨리 해결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룩스메아 교단입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알타르가 거뜬하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회의감이 든다.
종교 단체에서 사람의 죽음을 위장하기 쉽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시온 경? 방금 그 얘기는 대체···.”
“별것 아닙니다. 그냥 저하께서 죽어야, 바스툴 왕실이 마음 편히 본색을 드러낼 것 같아서요. 덤으로 추격도 흐지부지될 테고, 일거양득이죠.”
“······.”
내 대답에 베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거다.
나는 베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알타르가 건넨 서류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어째서 알타르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신원 불명의 시체가 발견되면, 룩스메아 교단에 신고 접수가 들어가게 되어 있나 보다.
교단에서는 우선 소지품을 확인하여 행방불명으로 접수된 사람과 대조해보고, 사흘 내로 가족을 찾지 못할 시 약소한 장례 후 화장(火葬)을 해 주는데, 여기서 일주일을 더 기다렸다가 뼛가루를 강에 뿌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짓는 모양이다.
‘보통 이런 건 국가에서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보다 룩스메아 교단에서 하는 일이 많다.
이래서 [성검의 주인]에서 교단이 제 역할을 못 하게 된 후, 대륙이 개판으로 굴러갔나 보다.
진작 교황을 만나서 외출 금지령을 내려두길 잘했다.
아무튼 교단에서 그런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기에, 간단한 일이 되어버렸을 뿐. 누군가의 죽음을 은폐하는 데 도가 터서 그런 게 아니었다.
교단에서는 좋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속으로 회의감이니 어쩌니 했던 게 조금 미안해졌다.
‘세르펜스도 이걸 알고 있으니까, 교단에 일을 맡긴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세르펜스를 쳐다봤다.
녀석은 서류의 내용이 궁금하긴 한데 베일 때문에 체면을 지키느라, 내가 빨리 서류를 읽고 넘겨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슬쩍 베일을 바라보니, 그 또한 자기 죽음이 어떤 식으로 위장되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나 같아도 궁금할 것 같긴 했다.
“제국과 접하는 펠로 왕국의 국경 부근. 20대 초반의 한 남성이 밀입국하려고 위조 신분증을 구하느라 뒷골목을 찾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에서 패싸움이 벌어졌고, 남성은 그에 휘말려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이게 왕자 저하의 설정값입니다.”
내 설명에 베일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 죽음도 아닌 위장에 불과할지라도, 명예롭고 당당한 죽음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어쩐지 머쓱해져서, 나는 다음 장으로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 ‘그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군청색 머리칼과 소지품인 검 한 자루뿐’이라고 되어 있는데···.”
나는 다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베일을 쳐다봤다. 그가 앉은 의자 옆에 기대어 둔, 검 한 자루가 눈에 띄었다.
세르펜스와 내 검과 달리 화려한 맛은 없지만, 그럭저럭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거 테라룸 왕국에서 맞춘 검이죠?”
“사망자의 물품이니 당분간 교단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차후 일이 마무리되면 돌려드리겠습니다.”
알타르가 베일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누가 봐도 내놓으라는 뜻이다.
그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베일은 사망자가 되었고, 그의 검은 유품이 되어버렸다.
‘저 검에는 수많은 추억이 함께하겠지···.’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인에게나 해당하는 얘기다.
현대 미술만 봐도 특이한 재료와 도구를 사용해서 작품을 만드는데, 그것 자체만으로 예술로 승화되곤 한다.
하지만 전사에게 무기란 생사가 걸린 도구다.
손에 맞지 않는 무기는 실력을 감퇴시키고, 이는 결정적인 순간 목숨을 앗아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일도 저 검을 차마 처분하지 못하고, 거적때기로 둘둘 말아서 숨겨 들고 다녔던 걸 테다.
베일이 저 검을 얻은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낸 전우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바스툴 왕궁을 탈출하고, 추격자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그의 목숨을 수도 없이 구해줬으리라.
‘핫! 유지스에게 옮았나?!’
하마터면 베일의 일대기를 써내려 갈 뻔했다. 베일의 여정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감정을 이입해 버린 모양이다.
나는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냈다.
“직접 맞춘 드워프제 무기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임시로 사용할 만한 검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위로하는 척 베일에게 말을 건넸다.
알타르가 저번에 저택을 방문했을 때 베일의 검을 눈여겨본 걸지도 모르나, 검을 운운한 건 매우 높은 확률로 세르펜스일 거다.
그러니까 알타르를 서쪽 별관으로 부른 거겠지. 베일의 검을 뺏으려고 말이다.
그러한 뒷사정도 모른 채.
베일은 자신의 검을 알타르에게 넘기며, 애꿎은 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서류를 또 한 장 넘겼다.
어쩐지 서류가 좀 두껍다 싶더라니. 그 이후는 베일의 행적 조사 결과가 줄줄이 쓰여 있었다.
딱히 문제 삼을 내용은 없었다.
“여기요.”
나는 다 읽은 서류를 세르펜스에게 넘겼다.
세르펜스는 서류를 바로 읽어보지 않고 거꾸로 덮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안 읽어봐도 돼요?”
“시온 경에게서 대략적인 얘기를 듣기도 했고, 무엇보다 교단에서 처리한 일이지 않습니까?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 아! 혹시 신경 쓰이는 내용이라도 있었습니까?”
세르펜스가 말하다 말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놀란 척하며, 덮어 두었던 서류를 다시 들어 확인했다.
그 간단한 행동으로 세르펜스는 교단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고, 나는 교단을 못 미덥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뇨, 아뇨! 없어요, 없어! 그냥 물어본 것뿐입니다.”
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멋쩍은 표정을 꾸며내며 서류를 도로 덮어 두었다.
“그보다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타르는 내가 눈앞에서 서류를 읽은 것에 별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바스툴 왕국에 갈 예정이라, 신분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려고요. 저랑 공작님은 저번에 제국에서 발급한 위조 신분증이 있긴 한데 좀···. 오래 써서요. 왕자 저하의 신분증을 발급받는 김에 겸사겸사?”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말실수할 거라고 생각한 세르펜스가 가명을 너무 본명처럼 지어놓은 탓이었다.
엘로윈 보육원에서 내 가명을 들은 악숭이가 장난치지 말라며 화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교단에서 발급할 수 있는 건 성직자용 신분증뿐입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는데, 왕자 저하께서 왕위에 오르기로 결심하신다면, 나중에 책잡힐 수도 있고···. 대충 뭐, 그렇잖아요?”
“아아─! 과연 시온 님께서는 참으로 영민하시며, 배려가 남다르십니다.”
내가 세르펜스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자, 알타르가 과도할 정도로 나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런 알타르의 칭찬보다 부담스러운 게 있었으니. 바로 나를 바라보는 베일의 시선이다.
나와 세르펜스가 신분증 관련으로 대화를 나눌 때, 그 자리에는 베일도 함께 있었다.
지금 베일의 눈에는 내가 세르펜스의 공을 가로챈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혹시 이번 일은 제국 모르게 진행하는 겁니까?”
“그냥 제국의 도움만 받지 않는 것뿐입니다. 공작님은 제국의 귀족이 아니라, 일루미나티의 단원으로서 참여하는 겁니다. 교단과 일루미나티가 합동해서 진행하는 일에, 제국 황실이 지분을 내놓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죠.”
굳이 바스툴 왕국에서 무언가를 뜯어내지 않아도, 제국은 잘 먹고 잘사는 나라다.
황제는 그런 작은 이득보다는 휴마누스의 평판을 더 값지게 여길 거다.
그러므로 세르펜스의 활약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하겠지.
“아 참. 그리고 황태자 전하도 나중에 따라오겠다고 하시긴 했는데, 그쪽도 상관없을 겁니다. 대륙을 위한 일에 자국의 이득 따위를 들먹이실 분은 아니거든요.”
“하하, 맞는 말씀이십니다. 룩스메아 님께서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하신 분이니,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나는 분명 휴마누스를 칭찬했는데, 알타르는 룩스메아의 위대함을 칭송했다.
어쩐지 자신의 드높은 신앙심을 뽐내며 내 비위를 맞추는 듯 보여서 더 어처구니가 없다.
“그럼 준비해야 할 신분증은 몇 개입니까?”
“우선 저랑 공작님, 유지스, 윈스톤, 에드나 씨. 그리고 왕자 저하까지 하면 총 여섯 명 몫이 필요한데···.”
유지스의 귀는 굳이 스크롤을 사용할 것 없이, 에드나의 마법으로 해결될 거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정체를 숨겨야 할 일이 생기면, 아니마가 종종 마법을 써주고는 했으니까.애초에 신성력도 없는데 성직자를 사칭하는 마당에, 엘프가 인간 행세 하는 건 별문제도 아니다.
굳이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이렇게 몰려다니면 좀 수상하려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당한 변명 거리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알타르가 시원시원하게 말하였다. 머리를 쥐어짜 낼 사람은 그가 아닐 텐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쉽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