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8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81화(381/1105)
381회
64. 공작님과 작가님 (4)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그 여유가 선우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의 평온함은 선우의 희생을 토양 삼아 뿌리를 내리고, 그의 눈물을 머금고 자라나, 태양과도 같은 인애를 받고 피어난 꽃이다.
자신을 잡아먹고 자라난 식인 꽃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보며, 선우는 만족스러워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순수하게 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용기를 나는 가지지 못했다.
선우의 존재는 내게 있어 이정표나 다름없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순간을 가리켰다.
그런 그가 사라진다는 건, 그를 만난 이후 엮어낸 모든 인연 또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에.
나는 용기를 낼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포기와 단념뿐이다.
그래서 선우가 내게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환희를 느꼈고,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제가 작가라는 건 언제부터 아셨어요?”
“어제 시온과 대화를 나누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소설 얘기도 어제 들으신 거예요?”
“그거라면 선택의 날에 들었습니다.”
내 대답에 ‘작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자는 기가 차다는 듯 혼잣말로 무언가 웅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정신인가?’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선우를 낯선 곳에 내던져 놓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하기만 한 주제에.
이자는 선우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고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울컥 치솟았던 분노가. 한순간에 차디찬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틀어박혔다.
나는 그가 그리움에 사무쳐 괴로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주제에, 그에게는 말도 없이 이곳에 찾아왔다.
그런 내게 다른 누군가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시온 씨를 많이 아끼시나 봐요?”
“그렇게 되길 바라고, 그를 이 세계로 데려온 것 아닙니까?”
상대는 선우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는 자다. 하지만 내게는 선우를 보내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그 사실이 비참하게 느껴져서, 말이 절로 날카로워졌다.
“맞···긴 한데···.”
“누님을 대신해서, 그가 오게 된 거라는 얘기라면 이미 들었습니다.”
“···이쯤 되면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가 더 궁금해질 지경이네요.”
선우가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상대는 떨떠름한 반응을 내비쳤다.
이자의 반응을 내가 일일이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다.
“본래는 ‘시온 리벨론’이 아니라, 그 신체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겁니까?”
“아, 맞아요! 하지만 그 언니라면 모를까, 남동생은 좀···. 아무리 제가 이곳에 미련이 없다지만, 제 몸을 남자가 쓴다는 건 여러모로 찝찝하기도 하고, 들어오게 될 사람도 충격받을 것 같아서 여차여차 하게 됐죠. 자세한 과정은 말 못 해요. 이유는 아시죠?”
선우는 ‘시온 리벨론’의 몸은 마법도 신성력도 오러도 못 쓴다며 툴툴대고는 했다.
하지만 모든 능력에는 숙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온 선우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우의 누님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
그런 면에서 생각해 봤을 때. 마력 감응도가 떨어지는 마법 스크롤 제작자의 신체는 제격이었다.
감당해야 하는 마력이 적으니 폭주의 위험 또한 적다.
이미 만들어 둔 스크롤을 이용한다면, 새로운 신체에 적응할 때까지 몸을 지킬 수 있다.
게다가 선우의 누님은 작가라고 했었다.
마법 스크롤을 제작할 때 계산의 정밀도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문장이다.
또한 즉석에서 마법식을 계산해 낼 필요가 없으니 빠른 연산 능력도 필요 없다.
선우가 회계 관련 업무에 한해서 빠르게 숙달한 것처럼, 그의 누님 또한 계산에 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눈앞의 자가 그 책을 쓴 ‘작가’라고 추측했고, 그 예상이 완전하게 맞아떨어졌다.
진작에 알아차릴 수 있던 거였다.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이자는 처음 마주쳤던 그 방식부터 부자연스러웠다.
그런데도 내가 이자를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 이유는, 이자가 수도에 도착한 이후 나에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훨씬 눈길을 잡아끄는 사람이 내 곁에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조차 변명에 불과하다.
선우에게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누님과 관련한 사연을 들었을 때.
나는 눈치채야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러한 추리를 늘어놓고, 확인해 보자고 제의했어야 했다.
‘선우에게서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언을 듣기 전에···.’
비열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도 선우라면 이런 나를 용서하고, 이해해 줄 것이다. 내가 눈물이라도 흘리면, 자신은 괜찮다며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여 줄 것이다.
그 사실에 안도와 기대가 가슴속에서 움트고, 또다시 그런 나 자신에게 혐오를 느낀다.
“그런데 제가 작가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혹시라도 연기가 들킬까 봐, 정말 소중한 물건들을 죄다 망가트리면서까지 진심으로 서럽게 울었는데···.”
“그보다, 방금 하신 말씀은 그 신체가 본인의 것이라는 뜻입니까?”
“저는 최선을 다해 협조하고 있는데, 이 정도 궁금증도 못 풀어 주나요?”
“···협조?”
그 기막힌 단어에 누군가 한쪽 입꼬리만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 짧은 헛숨이 흘러나오고 입꼬리가 올라간 쪽 뺨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지금 그쪽은 정체를 숨기다가 저에게 들킨 겁니다. 그런 것을 두고, 그 누구도 협조라 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이 몸’에 얼마나 강한 제약이 걸려있는지 알면···.”
“제가 어째서 그것을 알아야 합니까? 그러는 그쪽은 시온이···. ‘그’가 얼마나 힘겨워했는지 아십니까? 돌아갈 수 있다는 기약도 없이, 저 같은 사람을 보좌하면서, 얼마나 수많은 밤을 외로움으로 지새웠는지. 알려고는 하셨습니까?”
나 자신이 부끄러운 만큼 차올랐던 울분을 눈앞의 상대에게 쏟아냈다.
일종의 화풀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상관없었다. 이자는 선우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니까, 괜찮았다.
어쩌면 선우도 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었다며, 기특하다고 칭찬해 줄지도 모른다.
“으···.”
느닷없이 ‘작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큼지막하게 뜬 눈은 공포로 가득했다.
의도치 않게 살기가 섞여 들어간 모양이다.
이건 아니다. 이런 건 칭찬 받을 수 없다.
나는 다급하게 살기를 거두고, 심호흡하며 분노를 다스리려 애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다른 한 손에는 신성력을 담아 상대의 이마를 짚었다.
“괜찮으십니까?”
“네에···. 이젠 괜찮네요.”
안정을 되찾았으나 살기에 노출되었던 감각이 남은 탓인지, 그자는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시온 씨가 그렇게나 힘들어하셨을 줄은 몰랐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적응도 잘하고, 괜찮아 보이셨는데···.”
“그는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입니다. 그렇게나 정 많은 사람이 가족들과 헤어지고도 괜찮을 리가 없잖습니까? 다만, 다른 사람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티 내지 않은 것뿐입니다.”
“······.”
내 말이 어딘가 이상하기라도 했는지, 상대가 텁터름한 표정을 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뇨, 그냥···. ‘소설’을 읽은 사람이 남동생 쪽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이걸 어쩌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저까지 올 필요는 없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언니가 왔어도 일이 이렇게 잘 풀렸을지 싶기도 하고···. 이런 걸 보면 운명이라는 게 있긴 한가 봐요.”
마음에 들지 않는 자이나, 이번만은 썩 옳은 소리를 했다.
선우는 자신과 내가 영혼의 단짝이라 했다. 그러니 당연히 만나야 할 운명이라는 말에 틀린 점은 없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공작님께 이렇게까지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못해 신기하네요.”
“······.”
“그래요, 대답하지 않으실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아까 ‘이 몸’이 제 것이냐고 물으셨죠? 그 성격에 제 뒷조사는 당연히 해보셨을 테니 알고 계시겠지만, ‘솔레르티아 레세라투스’라는 사람. 그러니까 저는 원래 이 대륙에서 살아가던 사람이 맞아요. 단지···. 아, 제약 진짜 답답하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에 거짓은 없었는지, 그자는 양손으로 본인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건만, 역시나···.’
신 룩스메아를 ‘여신’이라 지칭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예상했던 바다.
이자는 적당히 쓸모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전달자’로서. 그리고 이 세계로 오게 될 사람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서 선택된 것뿐이다.
또한, 이곳에 미련이 없다고 한 것과 죽여달라는 말을 쉽게 꺼낸다는 건.
선우의 세계에 다른 육체가 있으며, 이곳이 아닌 그곳에서의 삶을 선택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그쪽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리라.
“선우의 세상에서 ‘환생’이라도 하신 겁니까?”
“대륙에는 그런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텐데···. 진짜 별의 별걸 다 말했네요. 혹시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쇳덩이나 우주를 떠다니는 기계 장치에 관한 얘기 같은 것도 했어요?”
“그것들이 ‘비행기’나 ‘인공위성’을 말하는 거라면···.”
“세상에···. 그런 지식이 퍼질까 봐, 신께서 ‘이 몸’에 제약을 강하게 걸어 놓았던 건데···!”
‘작가’는 억울하다며 울상을 지었으나, 동정심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반드시 동정해야 한다면, 저렇게나 많은 제약으로 묶인 몸에 들어갈 뻔한 선우를 동정하겠다.
눈앞의 사람이 답답해할수록, 묘한 쾌감이 들었다.
선우가 저렇게 되지 않아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의 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공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의 지식을 이 대륙에 구현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그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밝힐 일은 더더욱 없을 겁니다.”
“부디 그리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자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질문에 대답하자면, 부정은 안 할게요. 이유는 아시죠?”
“악마 숭배자들은 그쪽의 존재를 아예 모르는 듯하던데···.”
“그렇겠죠. 투자자를 잘못 만나서 제대로 투자도 못 받고, 경영은커녕 장부 쓰는 법도 몰라서 쥐도 새도 모르게 쫄딱 망했으니!”
격렬한 반응으로 보아,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질문했다.
“그렇다는 건 그 세계의 시간은 이곳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겁니까?”
“본인이 물어보고 눈썹 하나 까딱 안 하시네요? 뭐, 됐어요. 어차피 그건 제 흑역사니까. 저도 자세히 말하지 않으면 좋다, 이거예요.”
“······.”
“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달렸죠.”
적당히 침묵하자, 그자는 즉각 본론으로 돌아와 질문의 답을 내놓았다.
“두 세계는 별도의 시간선이 존재하며, 신께서는 원하는 지점의 시간을 연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이런저런 일들로 수습할 게 많아져서, 지금은 간당간당한 거로 알아요. 얼마나 회복하셨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질량이 적은 무언가를 보내기만 할 뿐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질량이 적은 무언가는 필시 영혼을 돌려 말하는 것이다.
행여나 내가 그를 지킬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는 안전하게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혹시 ‘그’가 그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은···.”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뿐이에요.”
선우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세상으로.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확답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건,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이었다.
‘이 사실을 선우가 알게 된다면···.’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