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8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88화(388/1105)
388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3)
내 시선을 눈치챈 세르펜스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길고 풍성한 청은빛 속눈썹이 살랑살랑 움직임에 따라, 맑은 녹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감춰지길 반복했다.
그 속에서 꿈틀거리던 질투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제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어, 그러니까···. 공작님의 가명은 뭔지 궁금해져서요?”
내 대답을 들은 세르펜스가 생그레 미소 지었다. 다른 의도로 자신을 쳐다봤음을 알아챘지만, 그냥 넘어가겠다는 뜻이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됐나 보다.
지금 넘어가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녀석이 아니라 나다. 그리고 나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
‘남들 앞이라서 잠깐 미뤄둔 것뿐이지.’
그런데도 녀석은 마치, 내가 자신의 전용 장난감으로 베일과 놀아준 것을 용서하는 양 굴었다.
매우 방자하다 아니 말할 수 없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르펜스는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다들 알고 있어야 하니,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가짜 신분증의 나이 때문에 옆길로 새어 나가지만 않았어도, 내가 먼저 제안했을 일이다.
내 가명을 포함하여 총 여섯 명의 이름을 새로 외워야 한다.
누구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달달 외우는 것보다, 처음 만난다는 기분으로 자기소개를 듣는 편이 덜 헷갈리겠지.
“우선 제 이름은···.”
“잠깐만요!”
유지스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외쳤다.
그로 인해 도중에 말이 끊긴 세르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보다 눈을 조금만 더 크게 떴을 뿐인데, 깜짝 놀란 것 같으면서도 순진하고 호기심이 왕성해 보였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는 게 어때요?”
유지스가 거실 한쪽에 쌓여있는 옷 상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과 이름을 매치할 거라면, 변장까지 마친 후에 하자는 뜻이었다.
설정놀음에 진심인 유지스답게 자기소개부터 몹시 본격적이다.
“좋은 의견입니다.”
세르펜스 또한 유지스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그녀의 의견을 곧바로 수용했다.
윈스톤은 우직한 기사라서 주군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고, 베일은 세르펜스가 좋은 의견이라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눈치였다.
오직 에드나만이 고작 자기소개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루미나티가 설정에서 시작된 집단이라는 걸 아직 모르는 탓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에드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옷 상자를 들었다.
“머리카락 색은 제가 마법으로 바꿔 드릴게요. 교단에서 준비해 준 건 반영구라서, 잠깐 쓰고 효과를 지워버리긴 아깝잖아요.”
옷 상자를 열어본 에드나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염색 시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시간 낭비는 참아도 돈 낭비는 참지 못하겠나 보다.
“그럼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이곳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세르펜스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옷 상자를 찾아들고 흩어졌다.
서쪽 별관은 단체 손님을 위해 준비된 곳답게 빈방이 많았기에, 그냥 아무 방에나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나는 그중에서 거실과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
상자 안에는 두 개의 상자가 또 들어있었다. 그중 하나는 예복, 또 하나는 활동복이라 쓰여 있었다.
‘예복이 지급되는 건 주교급부터랬지?’
예전에 세르펜스에게 들었던, 룩스메아 교단 관련 강의 내용이 떠올랐다.
내가 예식용 옷을 입을 일이 있기나 할지 의문이나, 만일을 대비하여 그것을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또 다른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하얀 바탕에 화려한 금색 자수가 놓인 신관복이 곱게 개어 있었다.
상자의 깊이가 꽤 되어 뒤적거려보니 같은 옷이 네 벌이나 들어있었다.
그중 한 벌의 어깻죽지 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자, 긴 옷자락이 스르륵 펼쳐졌다. 굉장히 눈에 익은 디자인이다.
‘리에나가 입는 옷이랑 똑같네.’
룩스메아 교단의 신관복은 남녀 공용이었고, 직위 또한 그녀와 동일한 주교였으니 예상했던 바다.
나는 주교용 신관복을 잠시 내려놓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신관복의 상의는 길고 치렁치렁하여 정강이 중간까지 내려왔지만, 활동복이라는 명칭답게 골반쯤부터 양옆이 트여 있었다.
그 아래에 긴 바지를 받쳐 입고, 마무리로 자수가 놓인 기다란 천을 허리에 맸다.
환복을 마친 후, 방의 한쪽 벽면에 걸린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오! 그냥 신관복 주워 입은 시온 리벨론이다.”
평소에 안 입던 옷을 입는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여기에 염색을 하면 그냥 머리카락 색만 바꾼 시온 리벨론이 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엘로윈 보육원에서 결심했던 것을 실행해야 할 때가 왔다.
나는 벗어놓은 옷더미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찾았다. 그리고 펜을 한 자루 꺼내 눈 밑에 점을 찍었다.
문득, 내가 꾸준히 같은 자리에 점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점이 오른쪽, 왼쪽 제멋대로 이동하면 의심받겠지?’
나는 닫았던 펜 뚜껑을 다시 열고 반대쪽 눈 밑에도 점을 찍었다.
완벽하다. 이로써 안면 인식 기능을 왜곡하는 효과도 두 배다.
뿌듯한 발걸음으로 거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세르펜스가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빠르기도 해라.”
세르펜스의 신관복도 내 것과 비슷하게, 옆이 트인 긴 상의에 바지와 허리띠 구성이었다.
다만 자수를 비롯하여 세부적인 디테일 면에서 차이가 났다.
녀석이 새하얀 옷을 입은 모습은 자주 봐왔지만, 일반 신관의 복장은 수수하여 평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화려한 얼굴에 맞춰 밸런스 있게 화려한 옷을 입었는데, 지금은 심플한 옷에 화려한 얼굴로 포인트를 주셨네요.”
“어째서 눈 밑에 낙서를 하고 오신 겁니까?”
세르펜스가 내 패션 평가를 무시하고 제 할 말을 했다.
헛소리 그만 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베일이나 에드나가 들으면 안 되니 그냥 말을 돌린 거다.
“낙서가 아니라 점을 찍은 겁니다. 공작님도 하나 찍어 드릴까요? 이게 안면 인식 장애를 유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거든요.”
“그다지 효과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점이 대칭된 곳에 있는 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입니다, 일부러. ‘남의 눈을 속이려 점을 찍는데, 누가 부자연스럽게 좌우 대칭으로 찍겠어?’라는 허점을 노린 거죠.”
내 변명에 세르펜스가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그런 표정이 ‘본인이 점 위치를 까먹을까 봐서 그런 게 아니라?’라고 읽히는 건, 내 양심이 아직 건재하다는 증거이리라.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남이 못 알아봐 주길 바라는 것보다는 낫겠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2층에서 유지스가 겉옷에 한쪽 팔을 끼우며 뛰어 내려왔다.
느긋하게 옷을 갈아입다가 나와 세르펜스의 대화를 듣고, 허겁지겁 챙겨입고 나온 게 분명하다.
그녀는 거실에 발을 디딘 후에야 겉옷을 마저 챙겨입고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이단 심문관 복장은 신관복과 명백하게 구분되었다.
우선 상의가 치렁치렁하게 내려오지도 않았고, 자수도 없었다. 그 대신 후드가 달린 긴 로브를 덧입었다.
앞으로 유지스는 밖에서는 저 후드를 항시 뒤집어쓰고 다닐 예정이었다.
다시 말하여 자신도 점을 찍고 싶다는 게 아니라, 세르펜스의 얼굴에 점을 찍는 걸 찬성한다는 뜻이었다.
“공작님 얼굴 어디에 점을 찍어야, 자연스럽게 이미지 변신을 꾀할 수 있으려나요?”
“평상시는 청아한 느낌이니까, 살짝 도발적으로 가보는 건 어때요?”
“좋은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성스러운 외모에 신관복까지 더해져서 주체가 안 되는데, 중화도 시킬 겸···.”
나와 유지스가 세르펜스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토론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세르펜스와 똑같은 복장의 에드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거실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에드나 씨도 찍을래요?”
“아, 아뇨. 괜찮아요.”
에드나가 나의 제안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하지만 세르펜스에게는 거부권이 없었으므로, 얌전히 얼굴을 내놓아야만 했다.
나는 녀석의 턱을 잡고 이쪽저쪽 돌려보았다.
이런 완벽한 조형에 감히 내가 손을 대어도 괜찮은 것인지, 배덕을 저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용 그림에 마지막 눈동자를 그려 넣는 화공이 된 기분으로 작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세르펜스의 입술 왼쪽 아래 방향에 점을 콕 찍었다.
“후우-. 힘들었다.”
“수고하셨어요.”
내가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은 이마를 소매로 닦는 시늉을 하자, 옆에서 유지스가 짝짝짝 박수를 쳐 주었다.
에드나는 그런 우리를 소꿉놀이하는 어린아이 보듯 쳐다봤다.
“그런데 베일 저하랑 윈스톤이 좀 늦네요?”
“두 분은 성기사 역이라, 갑옷을 입어야 해서 늦어지는 듯합니다.”
내 중얼거림에 세르펜스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 기다리는 동안 세르펜스에게 씌울 안경이나 골라봐야겠다.
“윈스톤이야 성기사 역할을 맡는 게 당연하지만, 저하는···. 괜찮을까요?”
나는 크레아토가 선물한 안경들을 뒤적거리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갑옷이 장난 아니게 무거울 텐데. 심지어 이동하는 내내 입고 다녀야 한다.
비쩍 마른 베일의 모습을 떠오르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내가 성기사면 괜찮지 않을 이유라도 있는가?”
철컥거리는 갑옷 소리와 함께 베일이 거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것 같다.
“다른 게 아니라 사이즈 때문에 한 말이었습니다! 갑옷은 사이즈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살이 붙을 걸 고려하면,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요. 천 옷은 그렇다 쳐도 갑옷은 여러 벌 준비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거라면 상관없네. 갑옷 안쪽에 두꺼운 패드를 여러 겹 덧대어 하나씩 빼면 되도록, 교단에서 준비해 주었으니까.”
어쩐지 갑옷을 입기 전에 비해 묘하게 건장해 보인다 했더니. 그냥 큰 갑옷 안에 두껍게 껴입은 거였다.
이제 6월인데 덥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을 내비친다면, 베일이 나를 더 싫어할 것 같아서 속으로만 삼켰다.
“그건 그렇고, 윈스톤이 좀 늦네요?”
화제 전환을 겸해서 가볍게 던진 물음이었는데, 베일이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했다.
갑옷을 입은 탓에 철그렁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서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혹시 갑옷 입으시는 거, 윈스톤이 도와준 겁니까? 그리고 윈스톤은 이제 자기 갑옷 입느라 늦는 거고요?”
“······.”
“원래 그런 전신 갑옷은 혼자 입기 힘들죠. 당연한 건데, 뭘 부끄러워하십니까? 오히려 그걸 혼자 입는 윈스톤이 신기한 거죠.”
“크흠···!”
재빨리 변명을 쏟아내며 베일을 달래보려 애를 썼지만, 베일은 불편한 헛기침을 흘려댈 뿐이었다.
‘숙달된 기사인 윈스톤과 자신을 비교하는 건 아닐 테고···.’
이제 윈스톤은 어엿한 루멘 제국의 사람이지만, 한때는 바스툴 왕국의 사람이었다.
윈스톤이 혼자서 갑옷을 능숙하게 착용할 수 있게 된 것도 그곳에서 홀대를 받은 탓이 컸다.
갑옷은 입어야 하는데 종자를 붙여주기는커녕 온갖 구박만 받았으니.
이제 와서는 종자가 거추장스럽다며, 종자를 붙여주겠다는 제안을 사양했다는 말을 세르펜스로부터 전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윈스톤과 같이 오지 않은 거로 보아, 베일이 먼저 갑옷을 입은 뒤 자신도 도와주겠다고 말한 걸 윈스톤이 거절한 듯하다.
그러니까 나는 베일을 훌륭하게 돌려 깐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