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8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89화(389/1105)
389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4)
윈스톤이 거실로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에드나는 교단이 준비해준 염색약 색깔에 맞춰, 마법으로 우리의 머리카락을 염색해 주었다.
나는 붉은 머리칼이 된 세르펜스의 왼쪽 눈에 황금테 모노클을 씌워 주었고, 유지스는 세르펜스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오른쪽 7, 왼쪽 3 비율로 가르마를 타자, 모노클 때문에 자칫 무거워 보였던 왼쪽 얼굴이 확 살아났다.
인상도 많이 달라졌다.
‘난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묶을 생각만 했는데···.’
고기를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머리카락도 길러 본 사람이 더 잘 만지나 보다.
세르펜스는 모노클과 바뀐 가르마 방향이 어색한지, 자신의 왼쪽 얼굴을 더듬거리다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거실로 돌아온 윈스톤은 세르펜스의 변화한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송구스러움을 내비쳤다.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유지스가 손을 들어올리며 의견을 내었다.
“표정을 바꿔보는 건 어때요? 세르펜스는 항상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반대로 무표정을 가장하거나 인상을 찡그려서,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는 거죠!”
정정한다.
유지스는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자신의 취향을 주창했다.
개인의 기호가 지나치게 반영되었으나, 좋은 의견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역시 유지스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의 인상이란 표정에서 갈리는 법이죠.”
인상 변화도 인상 변화지만, 덤으로 세르펜스가 남들 앞에서 상냥한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까지 갖추었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곧바로 세르펜스에게 큐 사인을 보냈다.
“으음···.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세르펜스가 어색해 죽겠다는 듯, 말을 고의로 더듬으며 연기에 들어갔다.
잔뜩 긴장하여 경직된 얼굴 근육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과하게 앙다물어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까지.
녀석은 ‘태어나서 연기 같은 건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해 냈다.
그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서···.”
세르펜스가 연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두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수줍게 말하였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은 어떻게 붉힌 건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혀가 멋대로 내둘러졌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으, 으으음···.”
세르펜스가 연달아 NG를 낸 신인 배우처럼 기가 죽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또한 연기였고, 덕분에 나는 상관에게 면박을 준 보좌관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레 베일의 따가운 시선이 내 얼굴에 꽂혔다.
베일의 시선을 의식하자, 괜스레 다른 사람의 이목도 신경 쓰여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드나는 우리 셋. 그러니까 나와 유지스와 세르펜스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관전 중이었다.
그리고 윈스톤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세르펜스의 연기에 새삼스레 감탄하는 듯했다.
“얼굴 근육에 긴장 풀고, 미간에만 살짝 힘을 주세요. 입꼬리 올리지 마시고···. 아! 아예 한 쪽 입꼬리만 내리는 건 어때요? 네, 그렇게···.”
내가 다른 이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동안 유지스는 세르펜스의 얼굴을 만지작대며 연기를 지도했다.
대외펜스 설정을 지켜주려는 건 아니었고, 세르펜스의 얼굴을 주물럭거릴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연기를 가르칠 때 얼굴을 떡 주무르듯 만져야 한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저 마음, 나도 잘 알지.’
세르펜스의 피부는 보드랍고 매끈한 데다가, 보습감도 적당하여 촉촉하고 묘하게 말캉 쫀득했다.
마치 피부 조직이 연한 아기의 볼을 만지는 느낌이다. 젖살이 통통한 아기와 달리, 세르펜스의 볼은 살집이 별로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매우 흡사했다.
고양이임에도 불구하고 분홍 젤리 발바닥이 없는 것을 보상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만큼 매우 뛰어난 촉감을 자랑했다.
‘녀석의 눈물을 닦아주거나 할 때, 볼을 꼬집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을 정도니까 말 다 했지.’
아무튼 세르펜스의 표정은 유지스의 손을 거치면서 점차 도도하고 교만하게 변화해 갔다.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왼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표정이 마치 누군가를 업신여기는 듯 보였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면 띠껍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펜스의 뛰어난 얼굴은 오늘도 열일했다.
일견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에 축 처진 눈꼬리가 어우러지자,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확실히 대외펜스라면 절대 안 지을 표정이긴 한데···.’
성직자가 저래도 되나 싶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다른 사람을 번뇌에서 구해주기보다는 번뇌로 빠뜨릴 것 같았다.
어쩐지 우리 애가 아닌 것 같다. 굉장히 낯설었다.
“···공작을 너무 장난감 취급하는 것 아닙니까?”
세르펜스의 180도 달라진 인상에 베일이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이제까지와는 딴판인 컨셉으로 복귀하여 충격받은 극성팬의 모습이다.
본격적인 무대는커녕 뮤직비디오조차 아직이며, 고작 티저영상만 떴을 뿐이거늘.
기다림이 부족한 친구다.
“어쭙잖은 설정으로는 남의 눈을 가릴 수 없어요.”
어지간한 일에는 화내지 않는 유지스가 드물게도 심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자신이 진지하게 프로듀싱한 역작인 신관펜스를 장난으로 치부했으니. 그녀로서는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직자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습니까?”
“성직자라고 해서, 무조건 생글생글 웃고 있어야 하나요? 게다가 상냥한 표정 뒤로 나쁜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며, 반대로 차가운 목소리 뒤로 다정함을 품고 있는 사람도 많아요.”
유지스가 베일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건넸다.
베일은 냉랭한 세르펜스의 얼굴을 흘낏 보고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분해 보이는 베일의 표정에 유지스가 살짝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제가 세르펜스의 얼굴을 함부로 만지작댄 건 사실이긴 하니···.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유지스가 세르펜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에 세르펜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혹여 제 부족한 연기력 탓에 정체가 들키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아 안심입니다.”
“표정 유지하시고, 목소리에서 감정도 빼세요.”
“아, 죄송합니다.”
세르펜스가 유지스에게 지적받은 부분을 곧바로 바로잡았다.
녀석은 우아한 손동작으로 입가를 가리며, 무감한 표정과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지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스 님께서는 연극을 굉장히 좋아하시나 봐요?”
에드나가 내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연기에 열성적인 유지스의 모습에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니라···. 네, 그렇다고 칩시다.”
“방금 뭔가 다른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닌데요?”
“설명하려다가 귀찮아서 그만둔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착각입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일루미나티의 창립 신화와 그 기저에 깔린 유지스의 지분을 설명하려면, 하루를 꼬박 새워도 모자랐다.
그래서 그냥 넘긴 것일 뿐이다.
“자, 자! 공작님 연기 연습할 시간도 필요하고 내일 떠날 준비도 해야 하니, 빨리 자기소개부터 마칩시다!”
나는 짝짝 박수를 쳐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말했다.
이에 세르펜스는 불시에 나머지 공부를 지시받은 학생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애써 태연한 척하는 연기로 이어받았다.
“우선 주교 역할을 맡은 시온 경부터 시작해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어설프게 무뚝뚝한 연기를 계속 유지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노력하는 모범생 대외펜스의 설정값 때문이다.
그리고 내일 출발할 때는 완벽한 연기를 선보여 베일과 에드나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이 분명했다.
‘어휴, 설정에 잡아먹힌 녀석 같으니···.’
나는 은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에인젤 H. 셀레스트입니다. 나이는 서른일곱이지만, 굉장한 동안이라는 설정입니다. 직위는 주교이고, 바스툴 왕국까지 가는 동안···. 아니지? 도착하고 나서도 쭉 여러분의 리더이고 새로 설립될 신전의 대표자니까, 윗사람으로 깍듯이 모셔주세요. 아! 유지스는 우리 신전 소속이 아니라, 겸사겸사 동행하는 거였나요?”
“동행인 건 맞는데 유지스가 아니라, 이단 심문관 마테리아 S. 사지타예요. 참고로 나이는 스물일곱이랍니다.”
짙은 보라색 머리칼의 유지스가 후드를 푹 뒤집어쓰며 말했다.
내 신분증에 쓰여있어야 할 나이가 그녀의 신분증으로 갔나 보다. 조금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자릿수 나이를 곧이곧대로 적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음 차례인 세르펜스에게 손짓했다.
“저는 프레이 A. 글라우벤이고, 나이는···. 스물둘입니다.”
“몇 살이요?”
“본래 나이대로라면 선택의 날에 참석했어야 하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고자 교단에서 수정한 게 아닐까 합니다.”
세르펜스가 신관펜스의 나이 설정 비하인드에 관한 추론을 줄줄 읊었다.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녀석을 타박하기라도 한 줄 알겠다.
“그냥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표정은 프레이 님의 설정에 어긋나니, 조심해 주시고요.”
“으음···, 죄송합니다.”
“그 으음거리는 것도 자제해 주세요.”
“네, 주의하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연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왠지 모르게 서운해졌다.
나이 차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을 잔뜩 귀여워해 주며 친해졌었는데, 오랜만에 만났더니 나를 잊어버려서 서먹하게 굴면 딱 이런 느낌이지 싶다.
“그럼 다음 신관님도 자기소개해 주세요.”
“레반다 C. 아이트라, 원래 나이랑 똑같은 스물아홉 살이에요.”
머리카락을 하늘색으로 염색한 에드나가 답했다.
자기소개라기보다는 소설의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듯한 어조다. 어째 불안하다.
‘설마 발연기는 아니겠지?’
일루미나티의 중요 덕목은 연기력이었다. 그런데 신입 멤버인 에드나가 발연기라니.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도 에드나의 연기력은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르펜스처럼 성격 자체를 완전히 뜯어고칠 것도 아니니까.
나는 긴장하며 윈스톤을 바라보았다.
구릿빛 피부보다도 짙은 밤색으로 머리칼을 염색한 탓에,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윈스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오르덴 J. 비괴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서른둘입니다.”
윈스톤도 에드나와 마찬가지로 본래 나이와 설정 나이가 동일했다. 이는 내가 최연장자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유일한 희망이 저버렸다.
‘어차피 신관들은 존댓말을 써야 해서 나이가 많아 봤자 아무런 메리트도 없는데!’
야자 타임이 가능하다면 서른일곱이 아니라 마흔일곱이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성직자라는 직업이 나를 가로막았다.
심지어는 호칭까지 무슨 무슨 님으로 고정이라서, 세르펜스에게 형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결국 내가 얻은 건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뿐이었다.
서른일곱은 대체 어떤 말투를 쓰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서른일곱 살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주교님, 아직 소개를 못 한 분이 계십니다.”
내가 우울해할 틈을 주지 않고, 세르펜스가 금발로 염색한 베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차, 깜박했습니다! 왕자 저하···가 아니고, 성기사님? 소개 부탁합니다!”
“이름은 렉스 R. 윅토르이고, 나이는 스물셋···입니다.”
베일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존댓말로 답했다.
나만큼 큰 폭으로 늘어난 건 아니었지만, 베일도 나이가 늘었다. 살짝 위안이···.
‘잠깐만, 아까 세르펜스가 자신을 몇 살이라고 소개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