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8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90화(390/1105)
390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5)
나는 세르펜스를 불러 그의 설정 나이를 다시 확인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분명 쉬운 이름이었는데, 다른 이름을 외우려다 보니 까먹어버렸다.
“거 뭐시냐, 그···.”
“프레이입니다.”
내가 버벅거리자 세르펜스가 곧바로 자신의 가명을 댔다.
예전에 ‘페르센트 라시더스’라는 웃기지도 않는 가명을 들고 와서, 나를 위한 배려인 양 굴던 세르펜스의 말이 떠올랐다.
살짝 분했다.
“아! 그래요, 프레이 님. 아까 스물둘이랬죠? 그럼 막내네요?”
“네. 아무래도 신성력을 지닌 사람이 저뿐이다 보니, 나서서 행동할 명분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 말인즉, 프레이 님을 합법적으로 부려 먹을 수 있는 기회라는 거죠?”
“···혹시 제가 주교님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내가 장난처럼 던진 말에 세르펜스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 옅은 불안감이 깃들었다. 저 표정이 연기가 아니라는 증거다.
“아뇨, 그런 적 없는데요? 프레이 님이야 언제나 저에게 잘하죠.”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말씀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 직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극상을 꿈꾸기 마련입니다!”
“······.”
세르펜스가 대외펜스와 소심펜스 버전을 전부 갖다 치워버리고, 도도하고 무뚝뚝한 신관펜스의 표정을 지었다.
쉽게 말해,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는 뜻이다.
“좋아요, 바로 그 표정입니다!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지금 그게 프레이 님의 디폴트 표정이니까,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주세요.”
“에인젤 주교님의 훌륭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다르게, 세르펜스의 표정에서는 고마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세르펜스의 얼굴에 유지스가 후드를 푹 눌러쓴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매우 만족스러운가 보다.
‘반대로 저쪽은 굉장히 불만족스러워 보이지만.’
베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거렸다.
내 행동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세르펜스가 얌전히 받아준 탓에 속으로만 삭이는 눈치다.
조금 전 유지스가 얼굴을 조몰락거린 것에도 세르펜스는 외려 감사를 표했다. 그러니 더더욱 말을 꺼내기 힘들어진 거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제삼자가 나서서 화내는 것도 무례하다면 무례한 행동이니까.’
베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윈스톤을 힐끔거렸다. 세르펜스에게 충성을 바친 기사인 윈스톤이 나를 꾸짖어 주길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베일의 기대와는 달리, 윈스톤은 덤덤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저 표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그렇게 해서 주군이 행복하시다면, 그리하라는 표정? 아니면 뭘 하고 놀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자신만 끼워 넣지 말아 달라는 표정?’
윈스톤도 이제 어엿한 일루미나티 일원이 다 되었다.
내가 멍멍하고, 세르펜스가 야옹하고. 그 옆에서 유지스가 유자하는 모습을 보아도, 윈스톤은 바위처럼 묵묵하게 제자리를 지킬 것이다.
어지간한 기사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베일은 그런 윈스톤의 진정한 충심을 알아보지 못했다.
충성심의 존재 여부를 의심케 하는 자국 출신 기사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기사도가 땅에 떨어진 바스툴 왕국의 실태에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어쩌면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바스툴 왕국의 여러 문제점을 돌이켜 보며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괜찮겠습니까?”
세르펜스가 누구보다도 괜찮지 않아 보이는 베일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며 걱정을 드러냈다.
“뭐가요?”
“아직 이름을 못 외우신 것 같아서···. 제가 주교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나, 본명과 흡사한 가명을 지었을 때도 자주 헷갈리신 터라, 걱정되는 마음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름 실수 안 할 자신 있느냐는 말이었다.
신관펜스의 설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과하게 소심하고, 대외펜스라고 하기에는 보좌관인 내게 너무 정중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냉랭하기 짝이 없다니.
연기가 낯설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설정이 이상한 결과물을 낳았다.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건 안 되겠지?’
모두의 가명을 외우고자 노력하면 못 외울 것도 없다.
수학도 암기 과목이라 가르치는 나라에서 공식을 달달달 외우며 자라왔다. 그런데 고작 이름 몇 개를 못 외울까.
문제는 가명을 부른다는 행위 그 자체다.
세르펜스는 세르펜스인데, 프레이라고 불러야 한다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이라도 된 기분이다.
괴리감에 시달리는 나를 보며, 세르펜스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름표는 안 됩니다.”
“대체 절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 대답에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깜짝 놀라 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서로의 반응을 보며 확인하는 모양새다.
저 둘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자, 잠깐 하긴 했지만! 그래도 금방 포기했거든요?”
내 자백을 듣고 나서야 세르펜스와 유지스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저 둘이 생각하는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름 문제는 걱정하지 마시죠. 아주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으니까요.”
“기가 막힌 생각이라 하심은···?”
“저 에인젤 H. 셀레스트는 타인의 이름을 제대로 못 외우는 사람이라는 설정인 겁니다! 그런 이유로 여러분을 각각 막내 신관님, 그냥 신관님, 이단 심문관님, 큰 성기사님, 작은 성기사님이라 부르겠습니다!”
나는 세르펜스, 에드나, 유지스, 윈스톤, 베일을 순서대로 가리키며 선언했다.
베일이 뭐 저딴 놈이 다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각오했던 바다.
“주교님치고 너무 싸가지가 없는데요?”
아직 일루미나티에 적응하지 못한 에드나가 손도 들어올리지 않고, 이의를 제기했다.
“예, 맞습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무례한 꼰대를 주교로 모시게 된 겁니다. 설마하니 보좌관이 상관을 막내라 부르며, 막 대할 거라고는 악숭이도 상상하지 못하겠죠. 돌멩이 하나를 던져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
에드나가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리며 나를 삿대질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세르펜스에게로 향했는데, 저래도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세르펜스는 괜찮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악마 숭배자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프라시더스 가의 보좌관뿐입니다. 단어 사용에 유의해 주십시오.”
“저쪽 신관님도 그렇게 불렀는데요?”
“아이트라 님께서도 조심해주시길 바랍니다.”
졸지에 세르펜스에게 핀잔을 들은 에드나가 얼빠진 표정으로, ‘지금 그게 문젠가? 왜 다들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라고 중얼거렸다.
배역에 이입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아, 좋은 연기자가 되기엔 그른 듯하다.
“그건 그렇고, 막내 신관님? 호칭이 중구난방이면 다들 헷갈릴 테니까, 성 말고 이름 쪽으로 불러요.”
“······.”
세르펜스가 눈으로, 지금 남 말 할 처지냐고 물었다.
하지만 소리를 내어 말한 것이 아니므로 무효 처리되었다.
“대답은?”
“알겠습니다.”
가명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세르펜스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문간에 발 들여 놓기 기법’의 첫 단계에 걸려들었다는 것도 모르고서 말이다.
“어쨌거나 자기소개도 마쳤겠다, 이제 슬슬 일어나는 게 어떨까 싶은데···. 혹시 자신의 배역에 설정을 추가하고 싶으신 분 계세요?”
나는 일행 대표라는 설정에 맞춰,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때 윈스톤이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예상치 못한 일에 모두의 시선이 윈스톤에게로 쏠렸다.
“아직 이름을 다 못 외웠습니다. 이름을 받아 적을 수 있도록 종이와 펜을 빌려주십시오. 내일까지 외워 오겠습니다.”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윈스톤이 꿋꿋하게 말했다. 그 말에 진한 동병상련의 감정이 샘솟았다.
“이해합니다. 외워야 할 이름이 여섯 개나 되는데, 이름이 어디 좀 길어야 말이죠? 여기서 한 번 듣고 외운 사람은 막내 신관님과 이단 심문관님뿐일걸요? 아니다, 그냥 신관님도 외우셨으려나?”
“저도 조금 헷갈리긴 하네요.”
내 물음에 에드나가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 때문에 정말 헷갈리는 건지, 윈스톤의 체면을 챙겨주려고 말만 그렇게 한 건지 아리송하다.
“막내 신관님, 종이랑 펜 가지고 다니시죠?”
“네.”
세르펜스가 짤막하게 대답하며 곧장 종이와 펜을 꺼내, 우리의 본명과 가명을 나란히 써 내려갔다.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네 장의 메모는 나와 윈스톤, 에드나, 베일에게 분배되었다.
“이제 정말로 끝입니까? 설정 더 없어요?”
“네, 끝이랍니다.”
유지스가 후드 아래로 싱긋 웃으며, ‘~랍니다.’라는 말버릇을 설정에 추가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나는 접수되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세르펜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이 마주친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로 인해 붉게 염색한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세르펜스는 자연스럽게 왼쪽 옆머리를 다시 귀 뒤로 넘겼다. 이 또한 버릇이라는 설정이리라.
‘이거, 내가 한 번 더 확인해 주지 않았으면 100퍼센트 서운해했겠네!’
세르펜스와 유지스의 섬세한 설정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럼 이제 마법 풀까요?”
“네! 감사했습니다, 에드나 씨.”
연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내 호칭 변화에 에드나가 반색하며 마법을 해제했다.
이번에는 굳이 다시 모이자는 약속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다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러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아까 탈의실로 이용했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허리띠를 풀어내는데, 밖에서 철커덕거리는 금속음이 들렸다.
‘무슨 일이지?’
순간 호기심이 일어, 허리띠를 내팽개치고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좁은 문틈으로 갑옷을 입은 베일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런 베일의 어깨너머로 세르펜스와 눈이 마주쳤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대외펜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세르펜스를 베일이 붙잡은 상황인가 보다.
“옷을 갈아입고 난 뒤, 잠깐 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까?”
“네, 당연히···.”
“당연히 안 됩니다!”
나는 세르펜스의 말을 끊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외쳤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데, 인도적으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베일은 내 마음도 몰라주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 대체 무슨 무엄한 짓인가?!”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공작님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보좌관인 저를 동반하거나 거쳐서 해 주세요.”
“뭐···?”
베일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무 억지스러웠다는 건 나도 잘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러지 않으면 베일은 분명 나 몰래 세르펜스와 만나려 할 테니까.
‘아니지?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잖아?’
베일이 공작저에서 생활한 지도 어느새 2주가 훌쩍 넘었다.
세르펜스에게 할 말이 있다면, 시종에게 찾아와 달라는 말을 전하거나 직접 집무실로 찾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일은 그러지 않았다.
집무실로 오지 않은 건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종에게 부탁하지 않은 건, 집사인 제온이 내 동생이기 때문이겠지.
어째 가족까지 동원하여, 세르펜스의 눈을 가리려는 나쁜 놈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는 베일이 나를 악당 보듯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 아무튼 안 됩니다. 공작님은 이따 제 방에서 같이 연기 연습 하기로 했어요.”
나는 성큼성큼 세르펜스에게 다가가, 녀석의 손목을 잡아끌고 방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