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39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396화(396/1105)
396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11)
샤워까지 마친 후, 욕실 밖으로 나왔다. 세르펜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방안은 썰렁했다.
아침에는 최대한 침대에서 뭉그적대다가, 부랴부랴 일어나서 준비하느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일과를 마치고 씻고 나왔을 때 항상 반겨주던 얼굴이 없으니, 왠지 모르게 텅 빈 방안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많이 놀란 것 같던데, 어디서 혼자 울고 있는 거 아니야?’
워낙 마음이 여린 아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멍하니 욕실 문가에 서 있다가, 지금 내가 샤워가운만 덜렁 걸친 상태라는 걸 겨우 떠올려냈다. 어쩐지 허전하다 했다.
내가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갈아입을 옷도 안 챙겨 들고 욕실에 들어가다니.
세르펜스가 아직 안 와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풀썩 몸을 던졌다.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세르펜스가 돌아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할 말을 미리 준비해 둬야 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잠깐 눈만 감고 있어야지, 안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는데, 어느새 눈꺼풀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아침이 밝아 버린 거다.
간밤에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 것 같은데,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그게 현실이라면 그 누군가는 세르펜스일 것이고 꿈이라면···.
“···그것도 세르펜스였겠지.”
자다 깨서 그런지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비비고 고개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세르펜스의 침대는 사라졌고, 방구석으로 밀려났던 테이블이 제자리를 찾았다.
이젠 따로 말하지 않아도 침대를 잘 챙겨다니는 걸 보니, 마음이 흡족하다.
‘아, 맞다. 베일 침대도 챙겨야겠네. 대충 빈방에 있는 걸 가져가면 되려나?’
혹시 모르니 제온에게는 미리 말하고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몽롱한 정신과는 반대로 몸은 가뿐하다. 보나 마나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흘려 넣고 간 걸 테다.
간밤에 나를 지켜보던 시선은 역시 생시였나 보다.
“세르펜스 얼굴을 어떻게 보지?! 아, 진짜 미치겠네!!”
힐끔 곁눈질로 시계를 확인했다. 아슬아슬한 시각이다. 지금 일어나서 준비하지 않으면, 아침 식사 자리에 지각하게 생겼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드러눕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에휴,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 *
시간의 흐름에 몸을 내맡겼더니, 나는 어느새 신관복 차림으로 기차에 올라타 있었다.
점을 양쪽에 찍기로 한 나 자신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었으면 정신없는 와중에, 오른쪽 왼쪽 분간 못 하고 아무 데나 찍을 뻔했다.
“원래 성직자들은 멀리 이동할 때마다 이렇게 호화롭게 다녀요?”
에드나가 푹신한 쇼파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우리는 교단에서 준비해 준 표를 사용해 기차를 탔는데, 그렇게 준비된 칸은 무려 특실이었다.
세르펜스와 다니면서 이제 익숙해지긴 했지만, 신관 하면 떠오르는 검소하고 청렴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레반다 님. 저희가 성직자인데 그렇게 남 말 하듯 말씀하시니, 뭔가 이상하네요.”
유지스가 에드나의 설정 오류를 짚어주며 말했다.
그런 유지스의 말에 에드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끼리만 있는데도 계속해야 돼요?”
“지켜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성직자로서의 마음가짐은 잊지 않기로 해요. 신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답니다.”
설정 놀이에 익숙하지 않은 에드나가 불만을 토로했지만, 유지스는 이미 이단 심문관 설정에 몰입한 뒤였다. 에드나의 말은 유지스에게 다다르지 못했다.
‘진짜 지켜보고 있긴 한 걸까?’
만약 룩스메아가 대륙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솔레르티아에게 소설을 쓰게 할 때 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했을 거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고 상세하게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악숭 세력이 자리 잡은 근거지쯤은 알려줬어야 한다.
‘룩스메아가 시간을 조작한 걸 마왕도 알고 있을 테니, 같은 장소에 터를 잡을 것 같지는 않지만···.’
괜히 생각했다가 골치만 아파졌다.
“어쨌든 레반다 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리자면···. 그렇네요. 흔히 있는 일은 아니죠. 저도 이단 심문관으로서 이곳저곳 출장을 다니긴 했지만, 교단에서 특실 칸을 내어준 건 처음이랍니다.”
에드나의 마법으로 둥글게 변한 귓바퀴가 유지스의 종족 정체성마저 바꿔버린 것일까?
진실의 종족인 엘프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런 유지스를 바라보는 베일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음모론에 사로잡힌 사람의 얼굴이 저러할까?
물 적신 수건으로 유지스의 피부를 문지른다면, 다크 엘프 특유의 보라색 피부가 드러나지 않을까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다.
어쩌면 악숭 세력이 세르펜스를 타락시키려고, 나와 유지스를 녀석의 곁에 붙여 놓았다고 생각 중인지도 모르겠다.
“평화로운 시기에 신전을 설립한대도 신경 쓸 일이 많을 텐데, 흉흉한 시기에 고생길에 오른 셈이잖아요? 그러니 가는 동안만이라도 편하게 지내라는 나름의 배려 아닐까요?”
유지스가 추론하는 척 새로운 설정을 만들어 냈다. 그 설명은 에드나를 위한 것이었으나, 그녀의 시선은 베일을 향하고 있었다.
베일은 휴마눈새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받았으니, 유지스로서는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저러는 걸 보면 진짜 애는 애야.’
적의를 풀풀 날리는 베일을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불의를 모른 척하지 않는 자세는 칭찬해 마땅하나, 베일은 좀 더 은밀해질 필요가 있다.
바스툴 왕국에서 도망쳐 나왔던 날만 해도 그렇다.
가족들이 다 악숭 세력에 들어가는 걸 찬성하고 자빠져 있는데, 거기서 대놓고 화를 내면 어떻게 되겠는가.
악숭 세력에 붙자고 말하는 놈치고,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사람은 [성검의 주인]에서도 못 봤다.
이득을 위해 인륜을 저버린 자들이다. 그런 놈들이 골육상잔을 주저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구하러 와 줄 사람이라도 있다면 배짱을 부려도 괜찮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
지금도 그렇다.
베일의 망상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세르펜스 뿐이다.
하지만 현재의 세르펜스는 구출해야 할 대상이지, 함께 싸울 동료 포지션이 아니다.
게임으로 예를 들자면 특수한 루트를 통해, 사악한 악당이 걸어놓은 세뇌를 풀어야 영입이 가능한 히든 캐릭터 같은 거다.
각설하고.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지만, 베일은 고립무원의 신세나 다름이 없다.
적당히 친한 척 굴면서 내 방심을 유도해도 모자랄 판에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다짜고짜 내게 싸우자고 달려들지 않는 걸 보면, 상황 판단 능력이 못 써먹을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달려들지 못해 분하다는 표정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세르펜스가 베일을 알뜰살뜰하게 챙긴 것도 아닌데, 참 열심이란 말이야?’
불의를 모르는 척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세르펜스에게서 ‘완벽하고 이상적인, 바람직한 인물상’을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까지 존경하며 닮고 싶었던 사람이 사실 응애라는 걸 알게 되면, 베일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인간 불신에 걸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굉장히 조용하시네요. 주교님은 말 많고 무례한 꼰대 아니었어요?”
기차 칸을 가득 채운 어색한 공기를 견디지 못한 에드나가 나에게 물었다.
설정 놀음도 좋고 꼰대질도 좋으니, 뭐라도 떠들어 보라는 뜻으로 들렸다.
지금 이 분위기가 답답한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신관님, 사람 면전에 대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그렇게 물으면 세상 어떤 사람이 ‘네, 맞습니다. 저는 말 많고 무례한 꼰대입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
“신관님께서 먼 타지로 차출된 일이 처음이라, 많이 긴장하신 건 잘 알겠습니다. 게다가 바스툴 왕국의 치안이 어디 보통 나쁩니까? 불안을 떨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떠들고 싶은 그 심정, 저도 이해는 합니다.”
“주교님은 정말, 그···. 충실하시네요.”
에드나가 슬쩍 베일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무례하다는 설정에 맞게, 바스툴 왕국의 왕자인 베일 앞에서 그런 소리를 잘도 한다는 뜻이리라.
베일의 잘못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대놓고 불쾌하다는 시선을 받고 있자니 기분이 좀. 아니, 많이 상했다.
잘못 하나 없이 오해를 받아 상처받은 내 마음은 누가 보살펴 준단 말인가?
‘자고로 본인 밥그릇은 본인이 챙겨야 하는 법이랬어.’
사실을 말하자면. 아니, 어디 말할 곳도 없지만.
어젯밤 있었던 일은 나로서도 큰 충격이었다.
세르펜스가 씻고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내가 울었다는 것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육아가 힘들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충분히 각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전은 달랐다.
지난 2년간의 세월을 경험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피로의 누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간간이 세르펜스가 보이는 기특한 행동들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틀린 것은 없었다. 내가 세르펜스를 보며 느꼈던 흐뭇함과 따스한 정은 착각이 아니다.
내가 이 낯선 세계에 적응하고, 이곳에 남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큰 위안이고 기쁨이었다.
착오가 있다면, 사람은 보상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나는 세르펜스에게 스스로를 희생하지 말라고 떠들어 놓고, 항상 나 자신을 희생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원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긴 하죠. 출발 전에 사전 조사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러시구나···.”
에드나가 감탄과 떨떠름함이 묘하게 섞인 표정으로, 짝짝짝 박수를 쳤다.
라떼 찾는 부장님 옆에서 호응해주는 신입 사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영혼 없는 박수였다.
“바스툴 왕국에서는 여행객이 잠깐 간식을 살 겸 밖에 나갔다가 소매치기를 당하기에 십상이라더군요. 심지어는 소매치기는 사실 유인책일 뿐이며, 실제로는 여행객을 노린 납치극이라니까, 신관님도 조심하세요.”
“그, 그렇게나 나빠요?!”
“어라? 교단 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모르셨어요? 이단 심문관님은 들으셨죠?”
나는 짐짓 놀란 척하며 유지스를 쳐다보았다.
유지스가 살짝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힐긋 세르펜스를 곁눈질했다.
모두의 동의를 얻고 싶다면 내가 세르펜스에게 물은 뒤, 세르펜스가 유지스에게. 그리고 유지스가 윈스톤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세르펜스를 그냥 건너뛰어 버렸으니, 당황한 것이다.
“어디 듣기만 했겠어요? 몇 년 전에 바스툴 왕국에 출장 갔다가, 피해자를 직접 만나 얘기까지 나눠 봤지요. 프레이 님과 오르덴 님도 알고 계시죠?”
하지만 당황은 당황일 뿐. 유지스는 능숙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소화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