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0화(40/1105)
40회
10. 공작님과 암흑가 (2)
세르펜스가 성벽의 아주 미세한 틈을 딛고, 가볍게 뛰어넘었다.
나를 업고 있는 상태로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아주 미세한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양이처럼 가뿐히 착지했으려나?’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그는 인적 없는 골목으로 숨어들어 나를 내려놓았다.
그렇다, 우리는 리보르 자작령에 불법으로 침입했다.
그 과정은 매우 은밀하고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뭐, 이렇게 쉬워?’
아무리 자작령이라지만 기본적인 방비는 되어있었다.
경비병들뿐 아니라, 판타지 세계답게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결계도 펼쳐져 있기는 했다.
타국의 경우에는 마법 결계를 설치해 두지만, 루멘 제국의 경우에는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영지의 외성에 신성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 덕분에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수한 방어와 보안을 자랑할 수 있었다.
신성력이 지닌 고유 특성상 수호에 더욱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법 결계는 뛰어난 타국의 마법사에 의해 뚫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신성 결계를 무시하고 몰래 드나드는 게 가능할 정도의 인사라면, 추기경급 이상의 고위 신관일 터.
그런 이가 신성 제국 내에서 담을 넘고 돌아다니며 범죄를 저지를 거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즉, 신성력을 숨 쉬는 것보다 쉽게 제어하는 세르펜스에겐,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렇지, 대낮에 경비의 눈을 피해 성벽을 넘어 다니는 모습이 너무 익숙해 보인다.
분명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수도 역시, 제집 드나들 듯 왔다 갔다 했겠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세르펜스가 후드를 젖혀, 자신의 머리 위에 염색약을 뿌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으니, 그가 말없이 내게도 염색약을 건넸다.
‘일단, 주니까 뿌릴까···?’
어차피 나는 짧은 머리라 후드를 눌러쓰면 보이지도 않을 텐데. 공작령을 시찰할 때 보다, 훨씬 철저했다.
그의 머리칼은 흔한 갈색이 되었고, 반대로 내 머리칼은 눈에 띄는 강렬한 적색이 되어 있었다.
“흐음···.”
세르펜스가 내 머리 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내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이리저리 헤집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뭐 하세요?”
“으음···.”
그냥 헤집는 게 아니라, 고정이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간혹 꾹꾹 누르기도 했다.
그러다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후드를 끌어당겨 푹 눌러 씌워버렸다.
“방금 뭐하신 겁니까?”
“붉은 머리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남기면, 다른 것을 숨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둘 다 꽁꽁 감추고 있으면 수상함이 배가 되니, 내 쪽의 후드를 벗겨낼 생각이었나보다.
어차피 코 아래는 가려지니, 평범한 인상인 시온이라면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을 터.
‘어쩐지 나에겐 눈에 띄는 빨간 염색약을 주길래 뭔가 했네···.’
하지만 색만 바꾸기에는 좀 불안하여, 모양까지 바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보려 한 것 같다.
하지만 시온의 곱슬머리가 형상기억 합금처럼 자꾸 원상태로 돌아오니, 그냥 포기한 듯했다.
“하하하! 제 헤어 스타일을 바꾸고 싶으셨다면 왁스라도 챙겨 오셨어야죠!”
“······.”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그냥 하나로 묶는 것만으로 세팅이 끝나 버리는 세르펜스는 알 수 없는 고충이겠지!
나의 너스레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이제부터 게이트를 타고 암흑가로 이동할 겁니다.”
“게이트요? 그거 나라 말아먹고 사장된 기술 아닙니까?”
“공식적으로는.”
내 의문에 세르펜스는 추적이 잡히지 않도록, 소규모로만 몰래 이용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 번 사용 시, 두세 명 정도 이동 가능하다나?
‘하긴, 그렇게 편리한 기술을 인간이 안 쓰고 버려둘 리가.’
그래도 국가적으로는 위협이 되어 경계하기 때문에, 불법적인 용도로만 사용되는 모양이다.
더욱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서며 세르펜스가 주변을 경계했다.
내 옆에 바짝 붙어, 겨우 들릴만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곳은 푸스카토르 백작령 아래에 있는, 일종의 지하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지하 ‘도시’요?”
“그건 직접 보면 알게 될 거다. 어쨌거나 푸스카토르 백작령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비밀이기에, 그것을 숨기기 위해 입장은 반드시 게이트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게이트는 제국 이곳저곳에 퍼져있는데, 그 대부분이 영지의 주인조차 모르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리보르 자작령에도 자리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백작령에서 들어갈 때도요?”
“예.”
“엄청 철저하네요.”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는 그냥 물리적인 길을 통해 잠입했기에, 게이트에 관한 내용은 지금 처음 알았다.세르펜스의 설명으로는 암흑가에 직접 드나드는 길은, 극소수의 인물만 알고 있다고 한다.
‘분명 그의 일행 중 한 명이 길을 안내했었는데···.’
푸스카토르 백작조차, 암흑가의 존재를 눈감아 주는 것의 대가로 그곳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정량을 상납받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혹시 공···.”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도련님으로 부르십시오.”
말하는 것이, 자신은 드나드는 법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여서 혹시나 물어보려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런데 도련님은 또 뭐야?’
아무래도 오늘의 컨셉은 ‘도련님과 시종’ 같은 건가 보다.
“그런데 도련님이 제게 존댓말을 쓰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뇨, 이쪽이 더 적당합니다.”
세르펜스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며 덧붙이기를, ‘도련님과 시종인 척하는, 호위기사와 철없고 호기심 많은 도련님’이라는 설정이라나?
“···대체 왜 그렇게 꼬아 놓는 겁니까?”
“설정에 대해 크게 의식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호칭에만 주의하면서, 평소 둘만 있을 때처럼 행동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제 평소 행동이 어떤데요?”
“상관에 대한 예우는 온데간데없이 무례하고, 거침없고, 불경하기가 이를 데 없지.”
본인 역시 평소대로 존대와 하대를 섞어 쓰려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내가 그렇게까지 세르펜스를 막 대한 건 아니지 않나?
나름 적정선을 지켰던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좀 긴가민가하다.
‘그렇게 느꼈으면서, 왜 여태껏 그런 얘기를 한 번도 안···하지 않았구나.’
그냥 포기하면 편하다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모양이다.
어쨌든 요는 굳이 연기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철없다는 부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편하고 좋은 설정이다.
“여기부터는 주의하십시오.”
세르펜스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골동품 가게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다시 한 번 내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째 평소보다 낮고 굵게 변해 있었다. 일부러 목을 긁으면서 낸 것인지, 허스키한 느낌도 났다.
그 특유의 맑고 청량한 느낌이 사라지니,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파는 물건보다 건물이 더 골동품 같네···.”
가게에 들어서서 무심코 내뱉은 감상에 세르펜스가 흘깃 바라보긴 했으나, 설정에 부합된다고 여겼는지 바로 무시했다.
내가 골동품을 구경하거나 말거나,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 암구호 같은 것을 주고받았다.
“흠, 흠─.”
이것저것 구경하다 헛기침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세르펜스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를 부르는 호칭은 정했지만, 그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정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대명사로만 불릴 것 같다.
‘어차피 내 이름도 아니었으니 상관없나?’
세르펜스를 따라가게 주인을 지나쳐, 뒤편의 문을 통해 지하로 들어섰다.
가게 주인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듯, 도자기를 닦으며 모르는 척했다.
지하는 다 무너져가는 1층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튼튼하고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진의 중앙에 서 주십시오.”
대기 중이던 마법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방 중앙에 그려진 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어지러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거 밟아도 되는 건가?’
까치발을 들고 선과 선 사이를 딛으며 조심히 걷고 있으려니, 세르펜스가 장난치지 말라며 내 뒷덜미를 잡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 중앙의 원안에 섰다.
도착지의 마법진과 연결 작업이 끝났는지, 검은 선 같아 보이던 마법진이 푸르게 빛났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마법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환한 빛이 번쩍하고 터져 나왔다.
멀미 같은 게 나지 않을까 고민했으나, 역시나 편리함을 추구하는 마법의 결정체답게 눈이 좀 부신 것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바로 다음 고객이 도착하실 예정이니, 저쪽의 문으로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도착 하기 무섭게, 쫓겨나다시피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암흑가 내부라 그런가 자작령과 달리 아무런 위장이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바로 거리가 펼쳐졌다.
“와···. 아니,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거래요?”
지하 도시라는 말에 동굴 같은 내부를 상상했으나, 천장이고 벽이고 모두 제대로 된 벽돌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도 어림잡아 2~3층 정도의 높이.
천장에는 밝은 마법등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범죄자 집합소 주제에, 이런 높이로 ‘도시’ 수준의 영역을 확보했을 줄이야···.’
직접 보면 알게 될 거라는 그의 말이 옳았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
[성검의 주인]에서는 암흑가가 이런 곳을 만들어 낼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다는 설명 같은 건 없었다.“사실 이곳은 교단의 잃어버린 성지입니다.”
“성지면 성지지, 잃어버린 건 또 뭡니까?”
“······.”
주위를 둘러본 세르펜스가 살짝 고개를 숙여, 내게 귀엣말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먼 옛날, 루멘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 악마들의 힘이 지상에 창궐했을 당시.
신 룩스메아를 믿는 대륙의 ‘인류’들은 지하에 숨어들어, 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장소를 기반으로 삼아, 신의 은총에 힘입어 악마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상으로 다시 올라온 교도 중 여러 이종족들을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현 제국의 영토는 비옥한 옥토를 자랑하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과거 악마와 가장 치열하게 접전한 지역이었기에, 수많은 이들의 피와 악마들의 마기에 의해 오염되었다나?
그래서 버려질 뻔한 땅이었으나, 신 룩스메아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몇몇 이들은 그곳에 남아 땅을 정화해 나갔다고 한다.
“···그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신성 루멘 제국입니다.”
그리고 기나긴 시간이 흐르며, 지하의 성지는 결국 잊히고 말았다고 한다.
‘그게 여기라고?’
주위를 둘러봤다.
술에 취한 남녀가 뒤엉켜 비틀거리고, 욕설이 오가고, 여기저기서 행해지는 호객 행위 등···.
“······.”
악마와 맞서 싸우기 위해 신 룩스메아를 믿는 이 땅의 존재들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거룩한 도시는 훌륭하게 타락해 있었다.
‘신 룩스메아가 이 모습을 보면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대체 성지를 찾아놓고 불법이 판치는 지하 도시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누가 시작하였는지 몰라도 제정신은 아니다.
“이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실 줄이야···. 가끔은 역사책도 좀 읽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에 한심함이 가득 묻어났다.
나는 졸지에 본인이 사는 나라의 건국 설화를 몰라서, 남에게 물어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거든요?! 여기랑 성지라는 단어가 매치가 안 되어서 잠시 먹통이 된 겁니다.”
“흐음···.”
조금도 안 믿는 듯하다.
그래도 세르펜스의 설명을 듣다 보니, 그것에 관하여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당연히 내 기억은 아니고 시온의 기억이었다.
“그거 수도에 있는 거 아녔습니까? 그거 찾는다고 1년에 한 번, 교황이 직접 걸어서 수도를 순회하는 행사 있잖아요.”
“···정말 알고 있었군.”
대체 날 얼마나 무시한 거지?
‘기억이 즉각 즉각 좀 떠올랐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한심하다는 취급은 당했지만, 설명 자체는 관광 안내원이 딸린 유적지라도 구경 온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뭔가를 묻기 전에 깊게 생각해보고 물어봐야겠다.
‘아무튼 간에···.’
실수로 지하에 있을지도 모르는 성지에 피해가 갈까 봐, 수도에서 지하실을 파내려면 황실에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조차도 2층 이상은 파 내려가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을 정도인데···.
‘그런데···. 그게 요기 있네?’
살짝 빗나간 수도의 위치 선정이었다.
정신없이 땅을 정화하다 계측에 실패하기라도 한 건가?
“어, 혹시 이거···?”
“이곳을 아는 이들 중 몇 명 정도는 짐작하겠지만, 대부분은 모를 거다.”
이곳이 성지라는 게 알려지면 제국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천장에 마법 등을 저리 많이 달아 놓았음에도, 이곳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처음부터 악마들로부터 도망쳐 숨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마나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한 방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곳의 모습을 보니 그냥 악마들을 숨겨주기 위한 장소처럼 보였다.
···세상이 참 잘도 돌아간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여유는 없습니다.”
충격에 빠져 멍때리고 있으니, 세르펜스가 혀를 차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 맞다. 뭔가 할 일이 있어서 온 거였지, 참···.’
묻는 족족 세르펜스가 친절하게 부연 설명까지 덧붙여가며 알려 주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가이드 딸린 관광 코스 여행이라도 온 줄 알았다.
“도련님, 나중에 저랑 여행이나 다닐래요?”
가이드가 세르펜스라면 바가지도 없고, 그 지역에 대해 현지인 이상으로 해박하게 알려줄 것이다.
“···평소에 저를 상관으로 생각하고 계시긴 합니까?”
“아하하하···. 뭐, 좋잖습니까? 친구 같은 부하와 상사!”
명백하게 내 쪽이 이득이라는 점에서, 무척이나 좋은 관계라 생각한다.
“으음···. 뭐,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는 기대했다면서요?”
“그것은 다른 방면으로···. 아니, 됐습니다. 그냥 가죠.”
세르펜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거리의 모습은 보기에 썩 유쾌하지도 않았다.
이곳이 룩스메아 교단의 성지였었다는 것을 들었더니, 더더욱 찝찝해져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기에 그와 보폭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