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0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06화(406/1105)
406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21)
본체만체할 땐 언제고 갑자기 할 얘기가 있다니. 그 의도를 모르겠다.
나는 베일을 떠볼 요량으로, 일부러 건들거리는 말투로 따졌다.
“어우,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처음부터 그냥 대화나 하자고 말했으면 되는걸.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면서 방을 같이 쓰자고 하니까, 제가 헷갈린 거잖아요?”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제 와서?’라는 의문이었고,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굳이 방을 같이 써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의혹이다.
베일은 나를 싫어하고 나는 그런 그가 불편하다.
적과 동침하는 수준은 아니어도, 옆에서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이는 못 된다.
얼굴을 가린 투구 때문에 베일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다.
나는 긴장을 내색하지 않으며,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 가만히 기다렸다.
“···진짜로 프레이 님께 수발을 들게 할 작정이셨습니까?”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긴장감이 맥없이 풀려버렸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칠색 팔색을 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묻어나왔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다.
베일은 내가 한 말을 ‘나와 방을 쓰려면, 내 수발을 들어야 한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방을 함께 쓰자고 말한 게 아니었나?’라는 뜻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대체 평소에 나를 어떻게 봤길래 저런 발상이 가능하지?!’
기차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세르펜스를 조금···, 많이 부려 먹긴 했다.
하지만 불합리하거나 무리한 일은 시키지 않았다. 누나가 내게 시켰던 수준의. 매우 간단하고 자잘한 심부름만 시켰을 뿐이다.
무엇보다 세르펜스는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단한 심부름을 마칠 때마다 내게 칭찬을 받을 수 있으니까. 퍼주기식 칭찬 이벤트쯤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녀석은 성가셔하기는커녕 오만한 표정으로 내 주변을 얼쩡거렸다. 무슨 일이든 시켜주기만 하면,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공작저에서 일하던 시녀와 시종들을 떠올렸다.
그 정도로 내 심부름을 하는 세르펜스의 얼굴에는 긍지와 자부심마저 엿보였다.
심부름에도 교육적 효과가 있다더니. 무슨 짓을 해도 생겨나지 않던 자신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수발을 들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해야 하나?”
자신감과 자존감은 다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믿는 것만큼 자존감 향상에 중요한 건 없다.
그렇기에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자존감으로 연결되기 쉽다.
‘나중에는 혼자서 간식을 사 오라고 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익숙해지면 자기가 먹고 싶은 게 생겼을 때, 알아서 척척 사 먹게 되겠지!’
진작 심부름을 시켰어야 했다.
이제껏 내가 세르펜스를 품 안에 두고, 지나치게 애지중지 키웠음을 깨달았다. 깊이 반성하는 바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훌륭한 육아 방침에 감탄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나가려는 바로 그때.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베일의 질겁하는 목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그 외침 덕에, 내가 생각 없이 흘린 말에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지각했다.
“작은 성기사님께서 제 수발을 들지 않으면, 그 대신 막내 신관님을 부려 먹겠다는 협박은 절대 아닙니다!”
“도대체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베일은 기함할 듯이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속이 얼마나 꼬여 있길래, 아니라는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걸까?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할 노릇이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저렇게 생각하면서, 나와 같은 방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는 건···.
‘설마 세르펜스를 대신해서, 내 심부름을 도맡아 하겠다는 뜻이었나?’
그 괜한 희생정신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내가 오해를 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베일이 치욕스럽다는 듯이 혼잣말을 흘렸다.
그 혼잣말을 듣고 있자니, 베일과 화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두 분 사이에는 진솔한 대화가 필요한 것 같네요.”
유지스의 낭랑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직은 초저녁이라 아무도 없지만, 슬슬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분들도 계실 텐데.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시는 게 어떤가요?”
그렇게 말하며 유지스는 내가 들어가려던 방의 옆방 문손잡이를 잡았다.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하겠다는 선언이다.
배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대화를 나눌 거라면 방에 들어가서 하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죠?”
“잠깐···.”
내가 베일을 보며 말하자, 뒤에 선 세르펜스가 ‘잠깐’을 입에 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봤다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간절함이 배어든 눈빛이 자신을 버릴 거냐고 묻는 것 같아서 어처구니가 없다.
‘아직 베일이랑 방을 같이 쓰겠다고 정한 건 아닌데? 아니, 그렇다 쳐도 그렇지. 하루쯤은 윈스톤이랑 자도 괜찮잖아? 매일 부모님과 같이 자던 아이가 2박 3일 수련회 통지서를 받고 당황하는 것도 아니고···.’
불현듯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가 부모와 같이 자는 걸 좋아하는 건 상관없지만, 부모 없이 잠들지 못하는 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주교님···.”
세르펜스가 눈썹을 팔(八)자로 휘며, 나와 눈을 맞추고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의지할 곳이 나뿐이라는 듯. 절절한 두 눈동자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세르펜스가 저런 표정을 하면, 안쓰러워서라도 녀석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녀석을 떼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분리 수면을 시도해 봐? 그런데 같이 자기 시작한 지, 고작 몇 개월밖에 안 됐는데···.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나?’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세르펜스가 전략을 바꿨다. 녀석은 눈을 그윽하게 뜨며,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베일을 어떻게 믿고 같은 방을 쓸 생각을 하느냐고. 만약에라도 베일이 내게 덤벼들면 그를 역으로 제압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거다.
세니어가 알면 무척이나 섭섭해할 노릇이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세르펜스가 내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분리를 시도하는 건, 분리 불안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그런 거지, 결코 세르펜스의 눈빛에 못 이겨서 이러는 게 아니다.
“막내 신관님이 같이 있어도 괜찮죠?”
내 물음에 베일의 손이 입가 쪽으로 올라갔다. 고민할 때 무의식적으로 흔히 취하는 자세다.
손에 끼고 있던 갑옷용 장갑과 투구가 부딪혀, 캉 하고 작은 금속음이 울렸다.
“네, 프레이 님이라면 괜찮습니다.”
자세를 취한 것이 무색하게 답변은 매우 빨리 돌아왔다.
그냥 둘이서만 대화할 생각이었는데 다른 누군가를 끼워달라는 말에 잠깐 멈칫했을 뿐. 세르펜스가 끼어드는 건 별 상관이 없나 보다.
“그럼 들어가죠. 다른 분들은 푹 쉬고 내일 봐요!”
나는 베일에게 방에 들어갈 것을 권하며, 유지스와 에드나. 그리고 윈스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에인젤 주교님께서는 말을 건너뛰지 말고 전부 하시거나, 정리해서 꼭 해야 할 말만 꺼내시거나. 둘 중 한 가지 방향을 잡고 대화에 임하시길 추천해 드려요.”
“네?”
“모쪼록 오해 없이 대화 잘하시길 바라요.”
유지스가 이상한 조언을 남기며 옆방으로 들어갔다.
“주교님은 이상한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 대화를 잘···. 아주 잘 해보세요.”
에드나는 베일에게 충고인지 도발인지 모를 말을 건넨 후, 유지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은 잠그지 않을 테니, 대화를 마치시는 대로 아무 때나 들어 오셔도 괜찮습니다.”
윈스톤이 투구를 벗어 들고, 정확히 베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방을 쓸 승자는 세르펜스가 될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새다.
베일은 나와 대화가 하고 싶었을 뿐. 같이 자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쿵 소리와 함께 윈스톤이 들어간 방문이 닫혔다.
나도 다시 방으로 들어갔고, 내 뒤를 세르펜스가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일이 들어오면서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두 개의 침대가 각각 양쪽 벽면에 붙여서 배치됐고, 그 중앙에는 원형 탁자가 놓여 있었다.
2인실이라 그런지 탁자에 딸린 의자도 2개였다.
방 안을 잘 살펴보니, 구석에서 작은 보조 의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등받이가 없는 형태라 딱 봐도 불편해 보였다.
세르펜스가 들고 있던 가방을 적당히 내려놓고, 보조 의자를 가져와서 앉았다. 생각은 고맙지만 공연한 행동이다.
나는 우쭐거리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집무실에서 챙겨온 의자를 꺼냈다.
크고 푹신하며 편안해 보이는 의자의 자태에 세르펜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보조 의자를 얼른 되돌려 놓고, 다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어째서 의자 같은 걸 가지고 다니는 것이냐?”
투구를 벗으며 말하는 베일의 목소리에서 황당함이 가득 묻어났다.
고작 의자 가지고 저런 반응이라니. 침대를 꺼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으로 기대된다.
나는 내가 가져온 의자에 털썩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 지금처럼 유용하게 앉으려고 가져왔죠.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십니까?”
“의자를 가지고 다니는 게 당연한 거라고?”
“가지고 다닐 수 있으면 챙기는 게 당연하죠! 아니면 저하께서는 혹시 공작님이 저 조그마한 보조 의자에 불편하게 앉는 걸 보고 싶으신 겁니까?”
“얘기가 왜 그렇게 흐르지?”
베일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지 말라는 듯 불만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그의 부족한 이해력을 꼬집으며 비아냥거린다면, 그와의 관계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그만큼 제가 공작님의 편의를 위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애쓴다는 뜻이었습니다. 제 덕분에 공작님의 생활이 얼마나 윤택해졌는지, 저하께서는 상상조차 못 하실 겁니다.”
“그런 이유라면 자네가 지금 앉은 그 의자를 공작께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세르펜스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베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 차근차근 생각해 봅시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공작님께서는 자진해서 보조 의자를 가져와서 앉으셨어요. 왜냐?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으신 왕자 저하나, 연약한 제가 불편한 의자에 앉는 게 신경 쓰여서 그런 거겠죠.”
“아···.”
베일이 감동한 얼굴로 세르펜스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대외펜스는 수줍게 웃으며,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펼쳐 정중하게 빈 의자를 가리켰다.
뒤늦게 베일이 의자에 앉으며, 들고 있던 투구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아무튼. 제가 이 의자를 공작님게 양보한다 칩시다. 사양하자니 호의를 밀어내는 거나 다름없고. 그렇다고 앉자니, 남의 의자를 뺏는 것 같아 미안하고. 마음이 편하겠어요~, 불편하시겠어요?”
“불편···하시겠지.”
“것 봐요! 답이 나왔네! 제가 이렇게 생각이 깊고, 배려가 몸에 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말투가 좀 친근하다고 해서 버릇이 없네, 불경하네, 어쩌네! 자, 이제 누가 생각이 얕고 무례한 사람이죠?”
내가 득의양양해 하며 말하자, 베일이 입을 꽉 다물었다.
그의 양손은 여전히 투구를 잡고 있었는데, 불안정한 심리가 그대로 투영되어 손가락이 꿈지럭거렸다.
그 탓에 투구도 함께 움직거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하네.”
투구와 테이블이 마찰하며 생겨난 소리가 점차 불쾌하게 여겨질 즈음. 모기 날갯짓처럼 작은 소리가 얹어졌다.
“예? 뭐라고요? 투구랑 눈싸움하느라 잘 못 들었습니다.”
“미안하다고 했네, 미안하다고! 자네의 이런 행동들이 나를 헷갈리게 하는 것 아닌가!”
내가 귓바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하자, 베일이 버럭 하고 소리쳤다.
그러게 처음부터 이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지. 그랬으면 다시 말해보라고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참 손해 보고 사는 성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