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0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09화(409/1105)
409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24)
“···그래서 나라와 힘없는 백성들을 외면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굳은 표정만큼이나 경직된 목소리가 베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의심이 가득하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악숭이를 바라보는 이단 심문관 같은 눈빛이다.
어느 정도 오해가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헛수고가 된 수준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기 전보다 더욱 바짝 날이 선 반응에 당황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얘깁니다.”
온갖 병폐로 찌든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악숭이들이 판을 치는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베일이 어찌어찌 왕좌에 올랐다 하더라도,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정의롭고 고지식한 베일이 내세우는 정책들은 귀족들에게 많은 반발을 살 것이다.
개중에는 베일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는 자도 있을 터.
‘베일 혼자 제국까지 오는 동안 겪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겠지.’
그런 자들과 싸우며, 나라 곳곳에 숨어든 악숭이들까지 색출해야 한다. 가장 가깝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조차 의심해야 한다.
각오가 필요하고, 용기가 밑받침되어야 하며,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
고작 정의감 하나로 책임질 수 있는 짐이 아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절대적인 정의감을 주입받고 희생을 강요당하며, 세뇌받고 자라온 세르펜스조차도. 자신이 떠안은 짐을 버거워하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책임감이 아닌 진심으로, 이 세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즐거움을 알고 싶어 했다.
그래야만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걸 테다.
“저하께서 망설이시는 건 비겁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신을 적대하는. 혹은 자신이 싫어하는 자들을 위해 노력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바른 소리를 하고 욕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거 진짜로 지치고 힘든 일이거든요. 포기하고 등을 돌리고 싶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더니···, 결국에는 도망쳐도 괜찮다는 소리 아닌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러서. 그렇게 콱 막혀버린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온 듯한 목소리다.
듣는 내가 다 먹먹하고 갑갑해졌다.
“자, 자. 진정하세요. 제가 그런 소리를 할 작정이었다면 여기에 세르펜스를 데려와서 앉혀 놨겠습니까?”
“그래서 더 모르겠다는 것이네!”
베일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혹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호소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던 새파란 눈동자가 세르펜스에게로 옮겨갔다.
“공작은 나에게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시온의 화법은 특이해서, 그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 진의를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말려달라는 베일의 부탁에 세르펜스는 쓴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짐짓 베일을 안쓰럽게 여기는 듯했으나, 지금 녀석이 안쓰럽게 여기는 대상은 베일이 아닐 것이다.
기대하던 소풍날 아침부터 얄미운 동생 놈이 꾀병을 부리는 바람에, 부모님이 동생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서.
도시락 대신 손에 들린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려다보며, 쓴웃음 짓는 아이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반전이 있다면 동생은 정말로 아팠고, 소풍이라는 게 거짓말이었다는 것 정도려나?’
그런데도 ‘부모님의 애정을 동생에게 모조리 빼앗겨버린 나는 너무 가여운 아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 부모님께서 조금이라도 편하실 테니···.’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다.
세르펜스가 자신을 가엾이 여기길 바랐으나 이런 방식은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세르펜스는 외로움이 많은 아이였나 보다. 가슴에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해야 메꿔지지 않는 구멍을 틀어막을 수 있지?’
눈앞이 캄캄한 와중에도 세르펜스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허덕이는 건 내가 아닌 세르펜스니까.
“저는 융통성이 없어서, 저하께 부담감과 책임을 떠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점을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온은 생각이 열려있는 사람이라, 저하의 고민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먹먹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세르펜스가 사이비 전도사를 소개하는 듯한 소리를 해댔다.
당연하게도 베일의 얼굴 가득 불신감이 떠올랐다.
존경하고 따르던 학교 선배가 알고 봤더니 사이비 교도였으며, 그동안 자상하게 대해준 건 자신을 사이비 교단에 팔아먹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아 버린 듯한 표정이다.
나는 베일의 오해를 풀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지금 뭘 생각하시는지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세르펜스가 워낙 신성하게 생긴 데다가, 신관복까지 입고 있어서 종교적 색채가 짙어져서 그렇지, 그냥 평범하게 친구를 자랑한 것뿐입니다! 친한 친구의 장점을 남들도 알아줬으면 해서, 장점을 괜히 부풀려서 얘기하게 되는 그런 거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아시죠?”
“모, 모르겠네.”
“친구를 사귀면 알게 되실 겁니다.”
“······.”
베일이 넋 나간 표정으로 입을 닫아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뼈를 때리려던 생각은 아니었는데···.”
“···위로하지 말게나.”
“그, 그럼 제가 친구 소개해 드릴까요? 휴마누스라고, 신분도 얼추 비슷한 데다가 저하에게 없는 활력이 넘치고 정의롭기까지 해서, 잘 맞을 것 같은데···.”
“휴마누스라면···, 제국의 황태자이자 성검의 주인이지 않은가?!”
“그리고 제 친구이기도 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일의 고개가 세르펜스 쪽으로 돌아갔다.
제국의 황태자의 이름을 찍찍 부르는 거로도 모자라, 친구임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소개해 주겠다는 소리를 해대는 게 당혹스러워.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일 테다.
세르펜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베일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중에 휴마누스랑 만나면 물어보시던가. 그보다 대화 도중에 자꾸 옆길로 새지 말아주실래요? 대화에 진도가 안 나가잖습니까!”
물 없이 삶은 계란을 먹는 느낌이다. 옆에 세르펜스만 없었어도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쳤을 정도로 답답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반사적으로 세르펜스를 쳐다보는데, 녀석의 표정이 상당히 묘하다.
“뭐 할 말 있어요?”
“없습니다.”
“있어 보이는데요? 딱 봐도 ‘이제까지 대화의 본질을 흐리던 건 항상 당신이었는데. 똑같이 당해보니, 기분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듯한 표정인데요?”
“착각이십니다. 그보다 이런 얘기를 할 시간에, 대화를 계속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나는 세르펜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베일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머릿속으로 ‘진지하게’를 반복해서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바스툴 왕국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저하의 굳은 심지는 잘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시험하고 있었던 건가? 일부러 도발하면서?”
“아니요. 그냥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기 위해 무게감 있는 소리를 대충 던진 것뿐입니다.”
나는 손깍지를 껴서 그 위에 턱을 괴며,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베일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고개를 치켜들고 멍하니 천장을 보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내려 투구에 이마를 기댄 것이다.
“미안하네. 이제 다시는 말을 끊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다 하게나.”
자포자기라도 한 듯한, 지칠 대로 지친 목소리가 베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빨리 얘기를 끝내서 그가 쉴 수 있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아까 하려다 못한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끝까지 붙들고 있다는 게, 저하께서 올곧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닐까요?”
“지금 내가 괴로워하는 건···. 아니, 아닐세. 계속하게.”
베일이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지금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스럽다.
“싫어하면 싫어하는 대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어차피 망조가 들었으니, 망해버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하고 손을 놔 버리든, ‘내가 썩어빠진 나라를 근본부터 뜯어 고쳐주마!’ 하는 오기로 달려들든.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숨을 돌릴 겸, 잠시 말을 멈추고 베일의 반응을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다가 투구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가려져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리고 각오라는 게 원래 몇 번을 거듭하며 다지고, 또 다져도 부족한 법이거든요. 충분히 각오를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문제가 생기면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후회하는 게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앞서 망설이는 사람은 겁쟁이가 아니라, 신중한 사람입니다.”
“······.”
“아! ‘신중’하니까 떠오른 건데, 저하께서는 사람을 곁에 둘 때 좀 더 심사숙고해서 이것저것 따져도 보고, 의심도 해보고.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 영···. 없어도 너무 없어요.”
유지스가 떠오르는 대로 다 말하라는 식으로 조언했던 게 떠올라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베일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하얀 성기사 투구 너머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질리다 못해 질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제가 세르펜스를 이리저리 구워삶아서 휘두르고, 세르펜스가 제게 의존하고. 뭐 그런 관계로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거 그냥 저하께서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요. 보아하니 저하께서는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옆에서 떼어놓지 않고 어딜 가나 달고 다닐 것처럼 생겼는데···. 그러지 마세요.”
베일이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특히 업무 관련 얘기는 조심해서 하시고. 중요하게 맡길 일이 생기면 한 사람에게 명령하지 말고, 분산시키세요. 아 참! 그리고 누가 술을 따라 준다고 넙죽넙죽 받아 마시지 마세요. 해독제는 꼭꼭 챙겨 들고 다니시고···. 그런데 해독제를 항상 지니고 다닌다는 건 비밀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공작저에 온 이후로 자신이 보인 추태를 생각해 보시죠? 세르펜스를 이상(理想)으로 여기며, 저를 멋대로 오해하고 적대시하고···. 어우!”
나는 진저리를 치듯이 몸을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는지 베일이 얼굴을 붉혔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있는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 정도면 [성검의 주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악숭이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죽는 일은 없겠지?’
뿌듯한 미소가 얼굴에 절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