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1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12화(412/1105)
412회
65. 공작님과 주교님 (27)
매일 아침 기도회를 열게 생겼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세르펜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리를 상점가로 안내했다.
이른 아침이라 썰렁할 줄 알았던 상점가는 예상외로 분주하게 돌아갔다. 꽤 많은 가게가 이미 열었거나 오픈 준비 중이었다.
야시장이 금지된 탓에 줄어든 수입을 조금이라도 메꾸고자, 가게 문을 일찍 연 게 아닐까 추측된다.
우리는 목표했던 육포를 구매한 후, 말을 사기 위해 마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육포를 뜯으며 걷고 싶었으나 교단의 이미지를 생각하여 참기로 했다.
그렇게 군침만 삼키며 마시장 초입에 다다랐을 때.
“아이고, 성직자님들! 혹시 국경을 넘어가시려는 겁니까?”
처음 보는 남성이 반갑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낯선 이의 등장에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세르펜스가 반보 뒤로 물러서며, 뒤따라 걷던 내게 바짝 붙었다.
그리고 뒤에서 걷던 윈스톤이 맨 앞으로 튀어나왔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윈스톤의 묵직한 저음이 깔렸다.
그는 제 덩치를 고려한 것인지 정면이 아니라 살짝 대각선 방향으로 섰는데, 덕분에 시야를 확보하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호위를 등한시한 건 아니다.
세르펜스의 어깨너머로 본 윈스톤은 대검으로 남성과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테라룸 왕국에서 맞췄던 먹빛의 검이 아닌. 공작저 무기고에서 대충 골라온 백색의 검이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저 검은 대체 언제 뽑아 든 거야?’
세르펜스의 무력을 생각해본다면, 윈스톤이 나선 건 불필요한 행동이다. 하지만 호위를 하러 따라온 성기사의 행동으로는 바람직했다.
유지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후드를 눌러쓴 그녀의 고개가 미미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허, 허업! 죄송합니다! 마음이 앞선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만!”
남성이 후다닥 뒷걸음질을 치며 빈손을 휙휙 내저었다.
아무런 무장을 갖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몸도 단련되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그런 자가 갑옷을 풀 세트로 갖춰 입고 검까지 꺼내 든, 거구의 성기사를 마주했으니. 저렇게 겁을 집어먹는 것도 당연하다.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펠로 왕국으로 가시는 길이라면 동행을 해도 될지 물어보러 왔습니다!”
윈스톤의 말에 남성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검을 빼 든 윈스톤의 모습과 큰 목소리로 악쓰듯 답하는 남성의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의 수는 적었으나,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났다.
눈앞의 남성이 우리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단순히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지.
윈스톤은 검을 검집에 돌려놓았다.
“어째서 이런 시기에 외국에 가시려는 겁니까?”
검을 거두긴 했으나 경계심마저 거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윈스톤은 의심 가득한 물음을 던졌다.
“어이쿠, 급하게 얘기하느라 제가 중요한 말을 빼먹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설명하십시오.”
“그게 사실은 제가 펠로 왕국 출신의 상인인데, 가져온 물건들을 다 팔고 제국의 물건을 사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데! 아뿔싸, 도적놈들 때문에 발길이 묶여 버렸지 뭡니까? 상단을 보호해주는 무사들도 있긴 합니다만, 도적놈들이 떼거리로 몰려든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지라···. 그렇다고 용병을 고용하자니, 요즘 같은 때에 용병들을 믿기도 힘들잖습니까?”
자칭 상인이라는 남성이 오두방정을 떨어가며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요약하자면 국경을 넘는 동안 우리더러 자기네 상단을 보호해 달라는 말이었다.
유일신 체제 아래 교단의 성직자를 건드리기 찝찝하기도 하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악숭이로 몰리기에 십상이라서. 어지간하면 도적들이 피해가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한 걸 테다.
더군다나 우리 일행은 성기사가 두 명이고, 무시무시한 이단 심문관까지 있다.
만에 하나 도적놈들이 악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성직자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어도 강자 앞에서는 꼬리를 말고 도망가겠지.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저 남자가 활짝 웃으며 반갑게 뛰어온 모양이다.
“이대로 고향에도 못 돌아가면 어쩌나, 위험과 비용 지출을 각오하고서라도 용병을 고용해서 길을 나서야 하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저께 신전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여러분을 보았지 뭡니까? 어쩌면 외국으로 향하시는 걸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시장이 열리는 시간부터 쭉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고향에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출 수 없다는 듯, 상인은 끊임없이 나불거렸다.
그때 내 앞을 지키고 선 세르펜스가 나를 돌아보며 입을 뗐다.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네, 하세요.”
나는 세르펜스가 상단과 동행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도로 정면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세르펜스는 내게 질문하려고 운을 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자에게 질문을 해도 되냐고 물어본 거였다.
‘하긴, 지금 저 녀석 설정이 막내 신관이니까.’
황당했던 것도 잠시.
막내 신관이 함부로 의견을 낼 수 없어서, 주교에게 허락을 구했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처음에 상단 얘기를 하지 않고, 본인만 합류하겠다는 식으로 말씀한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 그건 그냥 제가 검을 보고 놀라서 그런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흐음···, 마테리아 이단 심문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
“허억! 죄, 죄송합니다!”
세르펜스가 유지스에게 말을 붙이는 척하자, 상인이 화들짝 놀라 세르펜스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굽신대며 사과했다.
의도적으로 상단 얘기를 빼먹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붉게 염색한 세르펜스의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평소보다 아래로 드리워졌다. 신관펜스의 설정에 맞도록 오만하게 턱 끝을 치켜세운 것이다.
“바른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그게···. 사람과 짐이 많다고 하면 동행을 거절하실까 봐···. 일단 허락을 받은 후에 얘기하려고 했습니다. 헤, 헤헤···.”
비굴한 상인의 웃음소리에 세르펜스가 같잖다는 듯이 흥, 코웃음 쳤다.
그러자 옆에 선 에드나가 ‘와···.’ 하고 낮은 탄성을 흘렸다.
기차에서 지내는 동안 일취월장한(거로 꾸며낸) 세르펜스의 놀라운 연기 실력에 감탄한 게 분명하다.
“그래도 큰 규모는 아닙니다! 호위까지 포함해도 고작 열 명 안팎이고, 짐도 마차 한 대 분량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빈 마차도 한 대 있어서, 여러분을 편안히 모실 수도 있습니다!”
짐은 마차 한 대 분량뿐이라면서 빈 마차가 하나 더 있다니. 결국 지켜야 할 마차가 두 대라는 소리다.
아무리 빈 마차라도 행렬이 길어진다는 건 똑같고, 이는 인력의 분산을 초래한다.
“주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의를 숨기는 거로도 모자라,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고하는 자입니다. 제가 감히 의견을 내자면, 저자의 청은 거절하시는 게 옳다고 사료됩니다.”
세르펜스가 살짝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의 공작인 세르펜스가 내게 이러고 있으니, 황제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나저나 진짜 어쩌지?’
모든 일꾼과 호위들에게 말을 내주는 건 아닐 테니, 상인의 부탁을 수락한다면 시간이 꽤 지체될 거다.
게다가 개인이 아닌 상단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를 빼먹은 것도 괘씸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낯선 이국의 땅에 발이 묶였다는 사정을 들었더니 안쓰러움이 앞선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내가 독단으로 판단할 일은 아니다.
온전히 내게 선택을 맡겼다면 모를까. 세르펜스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꼰대 주교 설정을 잠시 접어두고, 일행들을 돌아봤다.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가는 방향도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프레이 님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에드나는 도와주자는 목소리를 냈고, 윈스톤은 자신의 주군인 세르펜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유지스야 당연히 도와주겠다고 말할 테고.
“작은 성기사님은 의견 안 내요?”
“저···도 말입니까?”
낯선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빠르게 튀어나온 윈스톤과 다르게, 타이밍을 놓쳐 어정쩡하게 뒤에 서 있던 베일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 사람이 이렇게 자기주장이 없어가지고는···! 쯧쯧쯧!”
나는 과장되게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베일이 투구를 쓴 탓에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보나 마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을 거다.
“우선 신분증을 확인해서 펠로 왕국 출신이 맞는다면 같이 가고, 상행을 나서려고 거짓말을 한 제국민이라면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물어볼 줄 몰랐던 것일 뿐. 머리를 아예 비워둔 것은 아니었는지, 베일이 곧바로 의견을 냈다.
“성문을 통과할 때 신분증 검사를 하면 바로 들킬 것을, 어째서 제가 거짓말하겠습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상단이 함께 움직인다는 말을 숨기셨잖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펠로 왕국 출신이라는 말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이거 보세요!”
상인이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내밀었다.
윈스톤은 신분증을 받아서 세르펜스에게로 전달했고, 세르펜스는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는 척하며 본인이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고는 나와 시선을 맞춘 채로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펠로 왕국 출신이 맞기는 맞는가 보네요.”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세르펜스는 신분증을 윈스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윈스톤은 묵묵히 신분증을 상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같이 가 주시는 겁니까?!”
나와 유지스는 아직 말로써 동의를 표하지 않았으니, 표면적으로는 2 대 2의 상황이다. 그런데도 상인은 동행이 결정된 사안인 양 물었다.
누가 상인 아니랄까 봐, 화술 한 번 교묘하다.
그래도 돕는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으니, 그렇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저는 좀···, 그렇네요.”
당연히 도와주자고 말할 줄 알았던 유지스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활달한 그녀답지 않게 차분하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쪽 분께서 이런 시기에 용병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쪽 또한 저희에겐 믿지 못할 낯선 사람이라는 건 마찬가지랍니다. 그런 사람이 내주는 마차를 함부로 탈 수는 없죠.”
낯선 사람이 건넨 음식을 받아먹었다가, 노예로 팔릴 뻔했던 경험 때문일까?
유지스가 경계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건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점이 다르다는 건가요?”
“용병들이란 원래 거칠고 포악한 데다, 돈을 목숨처럼 생각합니다. 간혹가다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돈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건, 상인들도 똑같지 않아요?”
“그, 그렇기는 한데···. 어찌 교단의 성직자님들을 상대로 나쁜 짓을 저지를 생각을 하겠습니까? 신벌이 무서워서라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상인이 신벌까지 운운하며, 자신에게 딴마음이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성직자를 괴롭혔다고 룩스메아가 벌을 내릴 수 있었다면, 폴드 공국의 공왕은 죽어도 진작에 죽었어야 했다.
애초에 악숭이의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세상이 평화롭다면 그러하겠죠. 하지만 ‘이런 시기’잖아요. 귀하의 상단이 악마 숭배 세력과 관련 없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답니다.”
유지스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졸지에 악숭이 후보가 되어버린 상인이 울상을 지었다.
“억울합니다! 저는···. 아니, 저희는 그저 고향에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상인이 주교 복장을 한 나를 정확히 바라보며 호소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펠로 왕국까지 가는 길을 전세 낸 것도 아닌데, 우연히 목적지가 같은 사람을 길 밖으로 쫓아낼 수는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