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3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32화(432/1105)
432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2)
‘여기 올 때 보니까, 영지민들은 하나같이 다 초췌해 보이던데···.’
식탁에 가까워질수록 가관이라는 말 밖에 안 나왔다.
훈제 오리가 올라간 샐러드, 곱게 간 쇠고기가 몽글몽글 보이는 볼로네즈 소스를 끼얹은 파스타, 미디움 레어로 구워 살짝 핏기가 올라오는 찹 스테이크.
여러 가지 색깔의 채소를 큐브 형태로 잘라, 닭고기를 이용해 김밥처럼 말아서 만든 치킨 갈라틴.
그 외에도 다양한 음식들이 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식사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선을 사로잡던 음식은 따로 있었으니.
식탁 정중앙에 놓인 새끼 멧돼지 통구이가 바로 그것이다.
‘···해산물 빼고 어지간한 건 골고루 다 올라간 것 같은데?’
내가 지금 어디 파티장에 와 있는 건지, 평범한 점심 초대를 받은 건지 구별이 안 된다.
출발하기 전에 연락했으니, 우리가 네퀴테 령에 도착할 시간 정도는 대략 유추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 정도 메뉴를 구성하려면 요리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재료를 구하는 게 더 오래 걸린다.
다른 건 몰라도 새끼 멧돼지는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다.
이 말인즉. 이곳의 영주인 네퀴테 백작은 이러한 사치스러운 식사를 항상 즐긴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해산물이 없는 건 네퀴테 령은 내륙에 있었고, 악숭이들의 테러로 인근을 지나는 기차의 운행이 정지된 탓이다.
“하하하, 기다리고 있었···.”
“영지 수입이 많으신가 봐요?”
영주와 내가 입을 연 건 거의 동시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조금 더 늦게 입을 열긴 했지만, 어쨌건 말을 무사히 끝맺음 낸 건 나였다.
“그러면 좋겠지만, 수입이 줄어서 걱정입니다. 요즘에 세금을 떼먹는 놈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특별히 준비한 것뿐입니다.”
잠시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던 영주가 표정을 바꾸며, 앓는 소리를 해댔다.
더는 세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쥐어짜댔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뭐 이렇게 많이 차렸담?’
평소에 영주 놈이 잘 처먹는 건 처먹는 거고, 손님을 불러놓고 대접하는 건 다른 문제다.
출발하기 전에 들은 바로는 교단의 성직자를 아랫사람 부리듯 한다던데.
그래서 이런 호화스러운 음식을 대접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신전이 들어서면 이점이 많으니까, 잘 보이려는 거려나? 일단 자리를 잡고 난 이후에는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신성 루멘 제국은 국호 앞에 ‘신성’이란 단어를 붙이고, 자문회에 룩스메아 교단의 성직자들이 참여할 만큼 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황실뿐 아니라 귀족 중에서도 신성력을 보유한 자들도 꽤 있고.
그렇다 보니 리벨론 백작령처럼 뭣도 없는 영지에도 작은 규모로나마 신전이 들어섰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상황이 달랐다.
어느 정도 기반이 닦여있는 큰 영지에는 신전이 세워졌으나, 작은 영지까지 일일이 신경 써 줄 여유는 없다.
특히나 바스툴 왕국처럼 교단과 사이가 안 좋은 나라라면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멍청하게도.’
교단의 성직자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해봤자 반감만 산다는 걸 모르나 보다.
타인의 성향을 고려하지 못하는 건지, 할 줄 아는 게 돈 지랄밖에 없는 건지.
그 모자란 머릿속이 이해되지 않지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어야겠다.
“세금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라니! 이런 곳에 신전을 세웠다가 기부금도 제대로 못 받고 망하는 게 아닐는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신전에 기부할 돈을 아끼겠습니까? 하하하하!”
내가 슬쩍 속물 같은 말을 흘리자, 영주가 기뻐하는 낯으로 웃으며 말했다.
요리를 살펴보다가 내가 대뜸 던졌던 질문. 그러니까 돈이 많으냐는 물음이 비꼰 게 아니라, 기부금을 얼마나 낼 수 있는지 가늠한 거라고 생각한 걸 테다.
그러고는 말이 잘 통할 거라고 멋대로 판단한 거겠지.
“아,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참, 저는 에인젤 H. 셀레스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에···. 저는 편의상 그냥 신관님, 막내 신관님, 작은 성기사님, 큰 성기사님. 그리고 이단 심문관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네?”
영주가 자신이 대체 뭘 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제 겨우 운만 뗐는데도 저런 표정이라니.
“저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을 외우지 않는 주의라. 이단 심문관님을 빼면 다 아랫것들인데. 굳이 머리를 써가면서까지 외워야 하나 싶어서, 대충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단 심문관님이야 임시로 동행하는 거라, 자리를 잡고 나면 헤어질 사람이고.”
“···그,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내 당당한 답변에 영주는 표정 간수도 못 하고, 기막혀하는 얼굴을 했다.
말을 뱉은 나도 이게 말인가 막걸린가 싶은데. 남의 귀에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
심지어 주교 복장을 한 사람이 이딴 개소리를 해댔으니,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거다.
“저는···.”
“아! 자기소개라면 됐습니다. 안 그래도 돌아볼 영지가 한두 군데도 아닌데, 그때마다 사람 이름을 새로 외워야 한다니! 어우, 저는 못 합니다. 나중에 자리를 잡고 나면, 그곳의 영주님 성함 정도야 기억해 두겠지만···. 아직은 아니죠.”
세워질 신전은 하나인데, 신전이 들어오길 바라는 영지는 여럿이다. 그리고 신전터를 정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수요와 공급 측면을 따져보면, 나는 ‘갑 of 갑’ 그 자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쉽게 말해, 나는 지금 갑질하는 중이다.
강약약강과 갑질은 꼰대를 넘어 개꼰대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다.
“···일단 앉으시지요. 이러다 음식이 식겠습니다.”
영주는 어떻게든 자신의 영지에 신전을 꼭 세우고 싶었는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면서도 싫은 소리 하나 내뱉지 못했다.
나는 일부러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보여준 뒤, 세르펜스가 빼준 의자에 앉았다.
의자를 빼주려고 대기하던 시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두 성기사님께서는 계속 서 계시는 겁니까?”
영주가 내 뒤에 선 두 사람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나와 세르펜스, 유지스, 에드나는 이미 자리에 앉았는데, 성기사 두 명만 꼼짝을 안 하고 서 있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다.
이럴수록 뻔뻔하고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당연하죠. 호위를 서는 사람이 무슨 놈의 식사입니까?”
“이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과연, 듣고 보니 주교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도 같이 앉아서 먹자고 하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머리를 열심히 굴렸건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동의를 표해서 되려 뻘쭘해졌다.
‘어쨌든 베일의 얼굴을 계속 가리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별말 없으면 잘 된 거지.’
영주의 식사 권유에 가장 먼저 걱정한 건 베일의 얼굴을 어떻게 가리느냐였다.
세르펜스야 먼 나라의 공작이니까 정확한 얼굴은 모를 테지만, 베일은 이 나라의 왕자다.
게다가 유지스의 말에 따르자면, 현 바스툴 국왕의 젊은 시절 얼굴과 많이 닮았다고 했으니.
어떻게 변장을 해 놔도 바로 알아볼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준비한 변명이 호위하는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파워 갑질 발언이다.
성기사 배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희생되어버린 윈스톤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앞으로 식사 자리가 몇 번이나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때마다 베일이 잘못해서 벌을 주는 중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두 사람을 진짜로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급하게 샌드위치를 사서 먹이긴 했다.
‘그러긴 했는데···.’
눈 앞에 펼쳐진 호화스러운 음식들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감정이 마구마구 솟아났다.
베일이야 그렇다 쳐도 윈스톤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바스툴 왕국에서 일을 다 끝마치고 공작저에 돌아가게 되면, 윈스톤이 먹을 특식을 준비해 달라고 주방에 얘기해야겠다.
“그런데 지어질 신전의 예상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창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는데, 영주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질문했다.
자기소개 건으로 갑을 관계를 확실하게 다져 놓은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왜요, 땅 없어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여차하면 밀어버려도 되는 건물이 꽤 많습니다.”
“그거 잘됐네요. 추가로 오기로 한 인원이 꽤 되어서, 마땅한 자리가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꽤’라고 하심은···.”
영주가 말끝을 흐리며 징그럽게 눈을 빛냈다.
다른 영지를 더 둘러볼 거라고 앞서 말을 했음에도, 자신의 영지에 신전이 지어질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새다.
한평생 신앙생활에만 매달려 온 성직자쯤은 쉽게 구워삶을 수 있다고 믿나 보다.
‘자문회에 참석한 성직자들이 얼마나 알뜰하게 기부금을 뜯어내는지 봤다면, 저렇게 과신할 수 없을 텐데.’
좁은 우물에 갇혀서 영지민들을 착취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놈이 뭘 알까 싶다.
이놈은 비리를 저질러도, 숨기려는 노력조차 없이 그냥 당당하게 저지르는 놈이다.
‘비단 눈앞의 이 영주만 그런 게 아니라, 바스툴 왕국이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겠지.’
어지간하면 영지민들이 겉보기만이라도 멀쩡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적당히 뜯어갔을 텐데.
초췌한 영지민의 모습과 상다리 휘어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먹는 영주의 모습을 나란히 놓고 보면, ‘착취’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제국에서는 비리 한 번 저지르려면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려야 하고, 뒷돈을 주려면 완전 첩보 작전을 펼쳐야 한다.
그러고도 덜미를 잡히는 놈들이 꼭 있다.
반면에 바스툴 왕국에서는 뇌물을 바치는 것을 무슨 관행처럼 여긴다고 하니.
그런 걸 생각하면 중앙 정치판에도 못 들어간 귀족은 머리가 굳어서 돌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돌에는 ‘영지민에게서 돈을 뜯어, 윗선에 바친다.’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을 거다.
‘그렇게 단순하니까, 성직자를 상대로 이런 음식을 대접하는 거겠지.’
나는 일부러 비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뒤에 선 윈스톤을 슬쩍 돌아봤다가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사실 저 덩치 큰 성기사님은 곧 성기사단장이 되실 몸이라서요. 그래서 미리 고분고분하게 길들여 놓는 중입니다.”
주교가 아무리 신전의 대표라지만, 성기사단의 단장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신전의 무력을 담당하는 성기사들을 통솔하는 사람이 성기사단장이기도 하고. 부서가 다를 뿐, 엄연히 같은 직급이니까.
“오오! 그 말씀은···!”
영주가 잔뜩 기대심이 부풀어 올라 감탄사를 터트렸다.
기 싸움 중이라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나 보다.
“네, 맞습니다. 성기사 몇 명이 아니라, ‘기사단’이 갖춰질 정도의 규모를 갖출 예정입니다.”
이런 변방의 영지에는 과분한 수준이다.
내 말에 영주는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지, 입꼬리가 좌우로 죽 찢어질 듯이 올라갔다.
주변에 신전이 없는 영지들도 많으니,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올 귀족들에게 통행로를 뜯어내거나.
성기사들을 병사처럼 부려, 치안 관리 및 적의 침입 방비를 떠넘기거나.
다양하게 이용해 먹을 방법을 떠올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러니까 교단이 싫어하지···.’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며, 포크로 돌돌 만 스파게티 면을 입에 욱여넣었다.
향신료를 너무 많이 쓴 탓에 자극적이기만 한 싸구려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