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3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35화(435/1105)
435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5)
* * *
네퀴테령에서 충동적으로 도주를 감행한 뒤. 우리는 영지를 다섯 군데나 더 방문했다.
다섯 영주는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내게 뇌물을 찔러 주었다.
엘프가 직접 재배한 포도로 만들어, 향미(香味)가 일품인 것으로 유명한 아르케산 와인 브랜드인 ‘햇살의 향기’.
펜대에 자잘한 보석을 박아넣어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실제로 쥐고 글씨를 쓰면 손가락이 아플 것 같은 장식용 만년필.
그렇지 않아도 아공간 주머니에 잔뜩 쌓여있는 데다가, 세니어도 있어서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보호막 마법이 담긴 스크롤 세 장.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급하게 아내의 보석함이라도 뒤져서 가져온 듯, 왜 주는 건지 모르겠는 여성용 다이아 목걸이.
그중에서도 가장 기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는 선물은 바로, ‘신성 루멘 제국의 현 프라시더스 공작을 먼발치에서 보고 그린 초상화의 카피본’였다.
쉽게 말해 모델의 초상권을 전적으로 무시한, 불법 초상화의 불법 복제본이다.
‘몰래 그릴 거면 잘 그리기라도 하던가!’
눈앞에 두고 관찰하며 그려도 화폭에 담아내기 어려운 빛나는 세르펜스의 미모를. 멀찍이서 잠깐 보고 그린다는 건, 세상 그 어떤 명장이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림 속 남자는 세르펜스와 이목구비도 딴판이었고, 심지어 눈동자 색까지 틀렸다.
세르펜스의 눈동자는 언뜻 푸른빛이 감도는 청명한 에메랄드색인데, 그림 속 낯선 남자의 눈동자는 시들시들한 배춧잎처럼 죽은 풀색이었다.
‘어지간한 미남보다 잘생긴 축에 속하긴 한데, 진짜 세르펜스와 비교하면 뒤꿈치도 못 따라가지.’
원본을 조금도 구현해내지 못한 끔찍한 졸작에, 우리 일행은 전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청은발이라기보다는 은청발에 가까운 머리칼을 지닌. 낯선 남자의 초상화를 선물이랍시고 건네주며, 영주는 ‘신관 프레이’를 향해 온갖 찬사를 퍼부었다.
‘제국의 프라시더스 공작보다 더 아름답다나, 뭐라나?’
낯선 남자의 초상화는 영지를 벗어나자마자 불에 태워서 없애버렸다.
그 외의 뇌물은 교단에 제출하기 위해 잘 챙겨뒀다.
뇌물을 넙죽넙죽 받으며, 영주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꼬장 부리기를 수차례.
이러한 내 노력은 네퀴테령까지 포함하여, 여섯 번째 영지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했다.
여섯 번째 영주는 우리가 연락을 취하기도 전에 외성 입구에 떡하니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작은 악단까지 섭외하여, 식사를 마치고 술잔을 기울이는 내내 곡을 연주하게 했다.
비록 영주가 헤어지기 전에 이상한 초상화를 뇌물로 바치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환대였다.
‘신전의 대표인 주교와 친해지면, 성직자들의 인력을 날로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더군다나 폐단을 일삼아도 지적하기는커녕, 함께 즐겨 줄 수 있는 적폐 주교가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먹고 즐기기만 하는데도 슬슬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영주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메소드 연기를 펼친 나도 고생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에 손도 못 댄 윈스톤과 베일도 고역이었을 거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여섯 번째 영지와 다음 목적지의 중간 지점인, 에스토령의 신전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사실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또 있었지만···.’
확실한 건 아니라서 일행들에게 말하기는 뭐하다. 설명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우선 세르펜스와 얘기해 보고 판단할 요량으로, 세르펜스를 시켜 방음 스크롤 사용 허락을 받아오게 했다.
“지난번에는 그냥 사용하더니, 어째서 이번에는 양해를 구하려 하는 거지?”
세르펜스가 의아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에는 양해를 구할만한 여건이 안 됐잖아요? 여기 성직자들은 제가 신의 사자라는 것까지는 모르기도 하고···.”
“당신에게도 양심이란 게 존재하긴 하나 보군.”
내가 적폐 주교를 연기하면서 교단의 이미지를 신나게 깎아 먹은 것 때문에, 지레 찔려한다는 걸 간파했나 보다.
모처럼 사람이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는데, 세르펜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녀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가만히 천장 무늬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 똑똑똑.
세르펜스가 방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녀석이 예의 없이 신전 복도에서 뛰어다닌 게 아닌 이상, 벌써 돌아올 수는 없다.
“누구세요?”
“···렉스입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목청을 높여 질문하자, 문밖에 선 사람이 한참을 뜸 들인 끝에 대답했다.
베일이 본명과 가명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가명을 댄 모양이다.
우리가 ‘접니다.’라는 짧은 말로, 자신을 알릴 수 있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니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무심코 그러라고 대답하려다가 말을 바꾸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남을 함부로 방에 들인 걸 알면, 세르펜스가 삐질 테니까. 최소한 내 몸을 지킬 수단을 갖춰 놓고 나서 손님을 들여야 한다.
“이제 됐습니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세워 놓았던 세니어를 허리춤에 채우고 나서, 베일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베일은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 철컥, 철컥.
세르펜스가 나갈 때, 잠금장치를 걸어 놓고 문을 닫았나 보다.
결국 내가 안에서 문을 열어주고 나서야, 베일이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프레이 님께서는 어디 나가셨습니까?”
베일이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갑옷을 벗고 성기사용 제복만 걸친 가벼운 차림새였는데도, 이제는 제법 몸을 단련한 사람 태가 났다.
그가 일반식을 먹을 수 있게 된 뒤로, 윈스톤의 식단과 똑같이 맞춰서 먹였던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잠깐 심부름 시켰는데, 곧 돌아올 겁니다. 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
베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별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예전이라면 세르펜스를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냐며 내게 한소리 했을 거다.
지금은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걸 베일도 알고 있지만, 그의 성정이라면 사소한 일에 직위를 남용하는 거 아니냐며 따질 줄 알았는데.
내가 베일을 잘못 알고 있던 건지, 근래 들어 마음의 변화가 생겼던 건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아무렴 어떠랴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째서 누우시는 겁니까?”
“서 있는 것보단 앉는 게. 앉는 것보다 누운 게 더 편하니까요.”
“그래도 대화를 할 땐···, 아니. 됐습니다.”
베일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들어오자마자 세르펜스를 찾길래, 녀석과 할 말이 있어서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또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아공간 주머니에서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빈 의자가 하나 남긴 했지만, 그건 세르펜스 몫이다.
“저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거면, 진작 말을 하시지. 세르펜스를 찾으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
“한쪽에게만 할 말이 있어서 온 건 아닌···데, 그렇다고 다시 눕지는 마십시오.”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것도 귀찮거든요? 녀석이 올 때까지 계속 앉아있을 거거든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길래, 잠시를 못 참고 누워있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모르겠다. 속으로 툴툴거리며 입을 꾹 다물자,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러 오신 겁니까?”
대화하자고 누워있는 사람을 일으켜 앉혀 놨으면, 뭐라도 말을 할 것이지.
말하기 쉽게 질문을 던져 줬는데도 베일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아 참. 여긴 교단의 성직자들만 쓰는 숙소라서 외부인은 안 들어오니까,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상관없어요.”
“···그게 더 어렵습니다.”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아서 가볍게 제안하자, 베일은 놀리는 거냐고 따지기라도 하는 투로 말했다.
“하긴, 그도 그렇네요. 저는 친구가 되면 직위가 어떻든, 반말해도 신경 안 쓰는 주의인데. 저희는 친구 사이도 뭣도 아니고, 저하께서는 신분에 크게 구애를 받으시니까. 예전처럼 제게 하대하기는 좀 어려우시겠다.”
“······.”
베일이 입을 꾹 다문 채로, 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너무 과하게 놀렸나 보다. 이제 자제해야겠다.
“아니, 뭐. 헷갈리실 만도 하죠. 신의 사자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사회적으로 이게 어느 정도의 신분인지 딱 정해지면 편한데, 그 기준도 없고. 일용직처럼 계시 하나만 받고 끝나는 사람이 있지만, 장기적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그마저도 평생 하는 게 아니라, 소임을 완료하고 나면 쫑이니까. 룩스메아 교단 내에서는 높게 쳐주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애매하단 말이죠?”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베일이 울컥한 표정으로 따졌다.
화내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방에 막 들어왔을 때보다 지금처럼 화내고 할 말 하는 모습이 더 보기 좋다.
“아뇨. 놀리는 건 아까 끝났고, 지금은 불편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중인데요?”
“······.”
그렇게 안 들렸나 보다. 어쩐지 화를 내더라.
괜스레 멋쩍어서 입을 다물었더니 어색한 공기가 방안에 감돌았다. 쉴 새 없이 떠들던 내가 조용해지자, 베일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대답도 듣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갈 때 문을 잠갔으면서, 참 자연스럽게도 문을 연다. 기척으로 베일이 와 있다는 걸 알고서 그런 거겠지.
“저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녀석이 천연덕스럽게 질문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빈 의자에 앉았다.
신관펜스가 아닌 대외펜스의 표정과 말투를 구사하는 거로 보아, 문 앞에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런 주제에 베일이 말을 하려는 순간 들어오다니.
‘하는 짓만 보면 능구렁이가 따로 없는데.’
그 목적이 보호자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치기 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거라는 게, 참으로 우습다.
“그냥···.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묻고 싶은 거라 하시면···?”
기껏 용기를 내서 말하려던 사람 입을 막아버린 주제에. 세르펜스가 순진한 낯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재촉하듯 물었다.
묘한 압박감을 주는 그 행동에 베일이 부담스러워할세라. 나는 세르펜스의 옆통수를 검지로 밀어서, 기울여진 고개를 바로 세웠다.
“머뭇거리는 사람 앞에서 장난치는 건 좀 자제해 주시면 안 됩니까?!”
베일이 본인 입으로 자신이 머뭇거리고 있었노라 실토했다.
나는 이러한 사태를 만든 원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 장난하지 말래요.”
“제가 아니라, 당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나. 베일을 압박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소리였다.
내가 눈살을 좁히며 녀석을 노려보고 나서야, 세르펜스가 샐쭉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하아─, 하고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바로 입을 떼려니 부끄러워서, 공연히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베일이 부끄럽다기보단, 참담하다는 느낌에 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