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4화(44/1105)
11. 공작님과 엘프 (2)
그제야 세르펜스가 아직도 틀어쥐고 있던 유지스(추정)의 팔을 놓고, 그녀의 목에 걸린 마지막 구속구의 잠금까지 풀어냈다.
“암흑가를 벗어난 후. 당신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저분을 지키고 후드를 벗겨 내는 등의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정도면 될까요?”
“추가로 암흑가를 빠져나갈 때까지 얌전히 협조할 것. 호위 중 지정된 장소에서 벗어나지 말 것. 그리고 정체를 알고자 하지 말 것.”
“마지막 사항은 빼주실 수 있나요? 저분이 일부러든 실수로든 단서를 흘리게 된다면 제 의지와 무관하게 맹세가 깨질 수도 있어서···. 그리고 기간은 당신이 반지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로 한정할게요. 만약 고의로 돌려주지 않는다거나, 찾지 못하면 바로 무효로 하는 조건이에요.”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는지라, 세르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내게 말조심을 하던가, 그게 어렵다면 그냥 입을 다물라고 당부했다.
‘무슨 계약서라도 쓰는 줄 알았네···.’
전에 악마 숭배자가 내뱉은 악마의 이름 아래 맹세라거나, 마법사들의 마나에 대한 맹세, 기사들의 검을 걸고 하는 맹세 등.
그런 말뿐인 맹세들과 달리 실제 페널티가 존재하니, 어쩔 수 없나.
그렇기에 완료 시기 등, 세부 조건을 더욱 꼼꼼히 따질 수밖에.
“저 유지스 위리디아는 어머니 나무에 제 존재의 의의를 걸고 맹세합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유지스는, 이후 상세 조건에 대해 읊었다. 그녀의 맹세가 끝나니, 녹색의 기운이 흘러나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반전으로 다른 이름을 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 유지스였네.’
세르펜스는 그녀를 감싸는 녹색 기운을 확인하자마자, 아무 말 없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이고 앞장서 창고를 빠져나갔다.
유지스가 얼마나 잡혀있었는지 몰라 몸 상태가 걱정되었으나, 마력 구속을 풀어낸 그녀는 나보다도 훨씬 가벼운 몸놀림으로 세르펜스의 뒤를 따랐다.
“당신들은 대체 뭐 하는 분이시길래···.”
노예로 잡혀있던 자를 데리고 당당히 빠져나오는데,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그 정도를 넘어, 오히려 다들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그녀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물론 나와 세르펜스는 침묵을 지켰다.
“좋은 일을 하면서, 왜 정체를 숨기려는 거죠?”
암흑가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에게까지 숨겨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그녀가 의문을 표했다.
그것 또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우리 애가 대외적으로 정의감이 투철하다는 설정인지라, 이런 암흑가 따위는 보자마자 즉각 없애버려야 하는데 숨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라거나,
‘이곳에서 벌어지는 환락에 충격받아 식음을 전폐하고, 서로 믿지 못하고 등 뒤에 칼을 들이미는 거리의 모습에 통탄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컨셉인데, 되려 이곳을 관리 중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요.’
···따위의 대답을 할 수 없지 않은가.
만일 그녀에게 정체가 들키게 된다면, 세르펜스는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세계수의 맹세를 통해 입막음하려 들지도 모른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길로 가시는 것 같은데, 이 길이 맞는 건가요?”
뜬금없이 도박장에 들어가더니, 그 지하의 함정이 가득한 비밀통로를 지났다.
밖으로 나오니,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이었고. 그곳에서 벽을 두드려 나온 비밀 문을 통과하니, 아무것도 없는 빈집이 나오고. 거기서 또 비밀 통로를 찾고···.
그런 식의 반복.
밖으로 나가는 길까지, 이런 식으로 비밀 통로들을 거쳐 이동할 생각인가보다.
‘이 녀석은 이런 길을 어떻게 다 꿰고 있는 거지?’
월담 실력도 보통이 아니더니, 도둑이 되었어도 대성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세르펜스는 끝까지 그녀에게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간혹 함정이 있으니 자신이 밟은 곳만 밟고 따라오라거나, 벽에 손대지 말라거나,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화살이나 날붙이가 날아오니 알아서 피하라는 등.
그런 지시 외에는 입을 다물었다.
성인 남자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에 도착하니, 비밀 통로 내부에 산재한 함정들 때문에 세르펜스가 줄곧 업고 있던 나를 바닥에 내려놨다.
“이제부터 함정은 없습니다.”
그것은 무척 반길만한 일이었다.
통로는 좁은 주제에 무척이나 길고, 조금의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만일 유지스가 소환한 불의 정령이 아니었더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정도.
‘건물의 틈이라기보단, 벽에 약간의 틈을 두고 또 벽을 세운 것 같은데?’
허공에 일렁거리며 둥둥 떠 있는 불꽃을 바라보며 멍하니 걷다 보니, 불현듯 그녀 또한 상당한 실력가였음이 떠올랐다.
‘아까 세르펜스가 덤벼오는 녀석들을 너무 손쉽게 처리해서 살짝 잊고 있었는데···.’
유지스를 납치한 자 중 이곳에 온 자들은 일부뿐이라고는 했으나, 그녀가 납치당한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실력자 아냐?
신분을 숨기고 있고, 장소가 장소다 보니 신성력은 더더욱 숨겨야 할 텐데···.
“도련님, 무기 없이도 괜찮으신 겁니까?”
“무기라면 많이 있습니다.”
“챙기는 거 못 봤는데요?”
“현지 조달 방식입니다.”
상대방 무기를 뺏어서 쓰겠다는 소리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웃음 쳤겠지만, 아까 본 세르펜스의 실력이라면 이해가 간다.
“저분의 정확한 실력은 모르겠지만···. 아니, 제가 파악할 수 없는 정도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납치당했던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셔도, 신용이 안 갑니다.”
“그, 그땐···! 제가 어리석었어요. 친절한 분들인 줄 알고 방심한 탓에···. 그들이 준 음식에 마나를 흐트러뜨리는 약물이 섞여 있어서···.”
자기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는지, 유지스가 우물쭈물 말했다.
‘마나를 흐트러뜨리는 약물이라···.’
무협지로 따지면 산공독 같은 것에 당한 셈이다.
“···낯선 사람이 주는 건 함부로 받아먹지 말라고, 안 배우셨습니까?”
“······.”
물론 그딴 걸 건넨 사람이 잘못이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알아서 거를 수밖에.
“그보다, 그렇게 걱정되셨으면 저분의 실력에 걸맞은, 제대로 된 무기라도 사주시지 그러셨나요?”
내 지적에 할 말을 잃었는지, 그녀가 괜히 화제를 돌렸다.
“네? 모시는 도련님께 검을 사다 바치는 시종이라니. 그런 게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게다가 세르펜스의 실력에 걸맞은 무기?
그 정도의 무기라면 부르는 게 곧 값이다. 그런 걸 대체 내가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저도 눈치는 있어요. 저분은 당신의 비밀 호위 같은 거잖아요?”
“······.”
그냥 호위 기사 설정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비밀이 추가로 붙어버렸다.
매우 훌륭한 헛다리였으니, 그녀가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좌우에 벽으로 꽉 막힌 길을 계속해서 걷다 보니, 이윽고 한 쪽 벽면에 뻥 뚫린 통로가 보였다.
그 주변부에만 거대한 돌의 파편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통로 옆의 바닥에 무거운 것이 끌린 듯한 자국으로 보아, 그 조각들이 본래는 거대한 문의 일부였음을 어렵사리 알 수 있었다.
“왜 문을 부수고, 벽으로 완전히 가려 놓았을까요?”
문만 가린 정도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수 없도록, 아예 문이 있는 벽 하나를 통째로 덮어 버렸다.
굳이 문을 부쉈어야 했던 이유는···.
‘이곳이 성지였던 만큼, 출입을 위해서는 신성력이 필요했다거나?’
대략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의문을 느낀 유지스가 흩어진 돌 조각을 자세히 살펴보려 했으나, 세르펜스가 시간이 없다며 그녀를 채근했기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밖과 연결된 길은 [성검의 주인]에서 휴마누스 일행이 지났을 때 나왔던 묘사대로였다.
이리저리 꼬이고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자연 동굴이었다.
그야말로 천연 미궁 그 자체.
‘원작에선 들어오면서 한참 헤맸었는데···.’
유지스가 대강의 길을 알고 있었음에도, 긴가민가하여 정령까지 동원한 끝에 겨우겨우 암흑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 길을 세르펜스는 단 한 번의 머뭇거림 없이, 출구까지 곧장 걸어 나갔다.
동굴의 출입구는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얽혀있고, 그 위를 덩굴들이 덮었다.
바로 앞을 지나면서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럽게 숨겨져 있었다.
입구에 드리워진 덩굴을 커튼처럼 걷어내니, 나무뿌리 사이로 겨우겨우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틈이 보였다.
밖으로 빠져나와 주변을 살폈다.
그 풍경으로 보아, 꽤 험준해 보이는 산속 어딘가인듯싶다.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까?”
“가능성은 적으나, 이쪽의 입구를 사용하려는 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떨어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는 조금 더 이동하고 나서야, 우리에게 기다리라 말을 남기고 저 혼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어릴 적 배운 것이 성검의 주인이 되기 위한 수련인 건지, 암살자가 되기 위한 교육인 건지 헷갈릴 정도로 무척이나 은밀하다.
“굉장히 충성심이 뛰어나 보이네요.”
“뭐···, 그렇죠.”
세르펜스가 내 안전에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는 충성심은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부하에게 충성하는 상관이 어딨어?’
그에게 있어 현재의 나는 유일한 ‘이해자’였으니까.
거짓이 아닌 실제의 그를 알고, 그것을 받아들여 주고 있으니. 그 이유와 과정이 어찌 되었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거다.
처음으로 마음을 연 상대이기에, 잃고 싶지 않아서 더 애지중지하는 걸 테다.
‘내가 저번 세미타 거리 일로, 무서웠다고 징징댄 것도 한몫했으려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쪽팔렸지만, 그땐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그런 거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저런 실력자를 밑에 두는 거로 봐서, 상당한 가문의 사람인가 보죠?”
“아무리 캐물으려 하셔도, 전 아무 답도 안 할 겁니다.”
세르펜스를 밑에 둔다면 황제뿐인데, 황제라면 상당한 가문이 맞긴 하다. 그게 내가 아니라 그렇지.
그나저나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나를 떠보는 것을 보니, 내가 상당히 만만해 보이나 보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로 역공을 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이미 이름도 밝혔으니 자신에 대한 정보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괜히 세르펜스 때처럼 떠들어대다가 꼬투리 잡히지 말고, 그냥 가만히···.
‘세르펜스 하니까 떠오른 건데···. 유지스는 원래 이번 일로 그에게 호감을 느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파닥거렸다는 그녀의 묘사를 떠올려보면, 완전히 빠진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 풋사랑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성검의 주인]의 여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늦게 합류한 것을 고려하더라도, 휴마누스에게 반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파티원들이 그녀를 사랑의 라이벌이 아니라 판단하고,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을 정도로.
그녀는 휴마누스에게 상당히 담백한 태도를 고수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