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4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44화(444/1105)
444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14)
‘항상 간식거리를 챙기는 건 내 일이었으니, 부담을 덜어줄 생각이었나 본데···.’
사람을 잘못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다.
유지스는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편향된 메뉴 선정 능력이 조금 아쉽다.
이런 일은 차라리 윈스톤을 시키는 게 낫다.
윈스톤 본인은 단 것을 즐기지 않지만, 나를 따라서 디저트 가게를 방문한 횟수가 꽤 된다.
비록 호위 목적으로 따라붙은 거라고는 하나,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이다.
모르긴 몰라도 윈스톤 또한 세르펜스 취향의 디저트를 꿰고 있을 것이 자명했다.
“와, 정말 맛있겠네요! 제가 신경 써야 할 일인데, 대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짐짓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는 투로 말했다.
다과상이라기보단 유자상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상차림이 조금 유감스럽긴 해도, 성의가 있는데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지스가 사온 유자 디저트는 항상 맛있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먹다가 물리면 세르펜스에게 양보해야지.’
나는 머릿속으로 완벽한 계획을 그리며 빈 의자에 앉았다.
유자상과 가까워지니 특유의 상큼한 향이 침샘을 자극했다.
내가 입안에 고인 군침을 꿀꺽 삼키자,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나란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모를 부담감에 마들렌을 집어서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 나를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았고, 그에 따라 다른 일행의 시선도 내게 꽂혔다.
부담스러움이 가중되었다.
“회의라고 해도 거창한 얘기를 할 건 아니니까, 다들 편하게 드시면서 얘기를 들어주세요.”
이제 나는 그만 보고 간식이나 먹으라는 뜻을 담아 얘기해 보았지만, 간식에 손을 댄 사람은 세르펜스와 유지스 뿐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일행 중 단 것을 즐겨 먹는 사람은 우리 세 명밖에 없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에드나와 윈스톤의 앞에 놓인 잔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잔에 담긴 것은 유자 에이드가 아닌 커피였다.
에이드를 다 마시면 나도 커피로 바꿔 달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운을 뗐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핵심부터 설명하자면···.”
“잠깐, 그 전에 할 말이 있습니다.”
세라투 자작이 반역을 준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막 꺼내려는 찰나. 베일이 내 말을 가로챘다.
정황상 왕위에 오르기로 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려는 거겠지.
‘그런데 표정이 왜 저래?’
의연하고 다부진 표정을 지어도 부족할 판에, 베일은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르펜스는 꾸덕꾸덕하게 말린 유자 당절임을 베어 문 채였고, 유지스는 벌써 유자 마들렌 하나를 뚝딱 해치웠다.
에드나는 커피잔을 들어 올려, 공격적인 유자 향으로부터 자신의 코를 보호했다.
그리고 윈스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위처럼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시선은 베일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다지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베일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가 보다.
“하실 말씀 있으시다면서, 뭐해요?”
마들렌을 우물거리면서 말한 게 화근이었던 걸까?
망설이는 베일의 등을 떠밀어 주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나를 바라보는 베일의 시선이 곱지 않다.
나는 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며 괜스레 에이드를 홀짝거렸다.
“크흠! 그동안 여러 영지를 돌아보며,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좀 더 머뭇거릴 줄 알았는데, 베일이 짧게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확실하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바스툴 왕국에서 나고 자란 저이지만, 제가 알고 있던 건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이 왕국은 썩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왕실이 무너지고 새로운 국가가 세워진다 하여도, 힘을 지닌 귀족들이 그대로라면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의 삶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진지하게 연설하는 베일의 모습에 일행의 태도도 변화했다.
에드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고, 유지스도 간식에서 손을 뗐다.
세르펜스는 마들렌을 향해 미련 섞인 눈빛을 던지긴 했으나, 양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허리를 쭉 펴서 고귀하고 우아한 대외 모습을 연기했다.
유일하게 윈스톤만이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가 이 왕국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몇 번이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노력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발버둥 쳐서 조금이라도 이 왕국을 바꿀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가 잘못을 잘못이라 깨닫고, 사람으로서의 올바른 도리를 지켜나가고자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베일의 말을 듣고 있자니, 바스툴 왕국에 사는 이들에게 전해져야 할 말을 가로채서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예행연습을 겸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말은 아껴 뒀다가 귀족들을 설득할 때나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제게는 아직 이 나라를 바꿔나갈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디 제가 이 나라를 바로잡을 기회를 쥘 수 있도록···. 제가 이 나라의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베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공작인 세르펜스나 왕족인 유지스, 신의 사자인 나는 그렇다 쳐도, 윈스톤과 에드나가 있는데도 자존심을 굽히며 고개를 숙이다니 감회가 참 새롭다.
‘옆집 꼬마는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는데, 우리 애는 언제 자랄까?’
내가 세르펜스를 편하게 대하는 걸 보고, 베일이 불쾌해하던 게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이렇게나 자랐다.
“지금 저하는 죽은 사람으로 알려졌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일이 표정을 굳히며 곧장 대답했다.
그 소식을 함께 들었으니 굳이 질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각오를 확인하기 위해 물어봤다.
왕이 되려면 세력을 모아야 하고, 그러려면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베일에게 주어진 길은 왕이 되거나, 패배하여 처형을 당하거나. 이 두 가지뿐이다.
‘괜히 내가 다 착잡해지네.’
바스툴 왕실에서 베일의 죽음을 발표한 건, 우리가 세 번째 영지를 방문했을 때 즈음이다.
그리고 지금은 장례식까지 마쳤다.
사인은 사고사였다.
바깥으로만 나돌던 2왕자가 그날도 외국으로 향하려고 기차에 올랐는데, 하필이면 타고 있던 기차가 철로를 이탈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자국의 왕자가 왕실의 추적을 피해 도망가다가, 타국의 뒷골목에서 죽었다고 발표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꾸며낸 거겠지.’
덧붙여 기차 사고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마물의 습격으로 인해 끊어진 철로를 기관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해 일어난 사고였다.
하필이면 바로 옆이 절벽이라 탈선한 기차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기차에 탄 이들은 전원 목숨을 잃었다.
그 사고에 베일의 죽음을 끼워 넣는 순간.
우연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악숭이와 손을 잡고 그렇게 꾸며낸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늘 호위 기사를 대동하는 데다가, 베일 본인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검사라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연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마침 적절하게도 기차가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큰 사고가 벌어졌다니, 이보다 공교로울 수가 없다.
‘게다가 악숭 세력은 들어가고 싶다고 말만 한다고, 그냥 받아 주는 게 아니란 말이지.’
어지간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하긴 하지만, 되는대로 다 받아줬다면 악숭 세력은 이미 첩자로 가득했을 거다.
폴드 공국의 공왕이 자국민을 제물로 바쳤던 것처럼, 바스툴의 국왕도 분명 악숭 세력에 제물을 바쳤을 거다.
‘어쩌면 그 기차 사고는 악숭 세력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꾸며낸 게 아닐까?’
제물을 바치는 김에 겸사겸사 베일의 죽음까지 끼워 맞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이제 와서 신경 쓴다고 죽었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나는 한숨에 섞어 근심을 뱉어내고, 다시 베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협조는 하겠지만, 직접적인 도움은 줄 수 없는 거 아시죠? 귀족들을 모으고 설득하는 건 저하께서 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도와달라며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의젓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완전히 기대려는 건 아니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스스로 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서 내가 다 뿌듯하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베일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잠깐 머릿속이 멍해졌지만, 나는 이내 베일의 말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는 필시 자기는 할 말이 끝났으니까 회의를 시작해 달라는 말일 테다.
“네, 그럼 다시 회의를 시작하겠···.”
“그게 아니라, 제게 달리 할 말이 있을 텐데요?”
아니었나 보다. 틀림없이 그거일 줄 알았는데.
내가 멀뚱멀뚱 눈만 끔벅거리고 있자, 베일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어제 저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 그런 게 있었나?”
“이런 때에도 꼭 장난을 치셔야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혹시 베일이 무언가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뭔가 있긴 있는 것 같다.
답답해하는 베일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내가 휴마눈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치욕적이다.
어떻게든 베일이 말하는 바를 알아맞히고 싶은데 진짜로 짚이는 바가 없다.
나는 결국 굴욕감을 느끼며, 세르펜스 찬스를 꺼내 들었다.
“세르펜스는 왕자 저하가 뭘 말하는 건지 알아요?”
“짚이는 바가 있긴 합니다.”
정말로 뭐가 있었나 보다.
살다 살다 내가 말하려다 만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런 눈칫밥을 먹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나는 좌절감을 맛보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앞으로 저를 시온 눈새의 줄임말인 시운새라고 불러주세요.”
“그, 그게···. 기운 내십시오, 시운새.”
“부르라고 진짜 부르면 어떡합니까?!”
내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따지자, 세르펜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대로 나와 시선을 맞춘 채로 세르펜스가 눈을 깜박거렸다.
한 번, 두 번. 눈이 감겼다 뜨일 때마다 녀석의 표정에 점차 슬픔이 담기기 시작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을 느끼며, 나는 세르펜스를 달래기 위해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많이 놀랐죠? 세르펜스에게 화낸 건 절대 아니니까, 진정하세요. 그냥 ‘이거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어째 휴마눈새가 된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만···.”
“당신은 절대 황태자 전하가 아닙니다.”
“맞아요, 사람이 살다 보면 한두 번쯤 타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죠! 그런 거 가지고 휴마누스를 가져다 붙이다니! 자신을 가져요, 시온은 눈치 있는 사람이에요!”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내 말을 부정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가슴속에서 따스한 온정이 피어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