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4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48화(448/1105)
448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18)
이번에야말로 할 얘기가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 편히 간식을 즐기려는 찰나.
별안간 세르펜스가 내게 유자 당절임을 불쑥 내밀며, 입을 열었다.
“회의도 끝났으니, 왕자 저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는 왕자가 아닌데요?”
베일에게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될 텐데. 구태여 내게 허락을 구하는 녀석의 행동에 괜히 불안해졌다.
“그것과는 별개로, 하나 남은 거라서 드리고 싶었습니다. 계속 말씀을 하시느라 거의 먹지 못하셨잖습니까?
세르펜스가 머쓱해 하는 표정을 꾸며내며, 칭찬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자 당절임을 받아 들며 힐끔 테이블 위를 살피니, 녀석의 말대로 당절임이 놓였던 그릇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남은 맛있는 음식을 내게 양보하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시선 처리와 대사가 꼬였나 보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그리고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나는 세르펜스에게 감사를 표한 뒤, 바로 유자 당절임을 베어 물고 베일을 향해 턱짓했다.
세르펜스는 이런 나를 보며 뿌듯하다는 듯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녀석의 시선이 베일에게 도달했을 즈음. 그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르펜스가 싸늘한 표정을 지은 건 아니다.
“으음···.”
세르펜스는 망설임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침음을 흘리며, 베일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영문 모를 행동에 베일이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지?’
괜히 나까지 긴장된다.
유자 당절임은 그저 핑계였을 뿐.
처음에 예상했던 게 맞았다. 세르펜스는 자신이 베일과 대화를 해도 될지, 내게 허락을 구했던 거다.
분명히 베일의 표정에 드러난 불안함을 읽었을 텐데도, 세르펜스는 말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무언가 얘기를 꺼내려는 척, 입을 열었다가 한숨을 내쉬길 반복했다.
이는 베일의 불안감을 극도로 끌어올리려는 수작이었고, 순진한 왕자님은 오늘도 낚여 파닥거렸다.
“프라시더스 공작?”
“아, 죄송합니다.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니, 감히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 건지 망설여져서···.”
세르펜스가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그와 동시에 턱 끝을 살짝 아래로 내리며, 눈을 내리깔아 베일의 시선을 피하는 척했다. 녀석의 전매특허인 처연한 표정이다.
“저희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딨겠습니까? 괜찮으니,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베일의 말에 세르펜스가 놀란 척하며 눈을 크게 떴고,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덩달아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베일은 자신과 세르펜스가 무슨 사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아는 그들의 관계는 세르펜스 혼자 일방적으로 적대하는 사이인데, 베일의 마음속에서는 많이 다른가 보다.
“조금···, 독한 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르펜스의 모습은 무척이나 가녀려 보여서, 저런 녀석이 정말 독한 말을 할 수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냥 보기에 그렇다는 소리지, 실제로는 독한 말에서 그치면 다행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베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까지 망설이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작께서 이유 없이 저를 힐난하실 일은 없다는 건 압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르펜스가 양손을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올리며 허리를 쭉 폈다. 그러고는 마음을 굳혔다는 듯이 베일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방금까지 시럽에 절인 유자를 우물거리기 바빴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어른스러운 자태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 저하께서 하신 연설은···. 솔직히 말하자면 최악이었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최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베일이 기나긴 고민 끝에 입에 올린 포부를 대상으로.
그리 말하는 세르펜스의 표정은 담담했으나, 말을 끝낸 후 일자로 꽉 다물린 입은 ‘나 또한 말하면서 힘들었다.’라는 티를 팍팍 냈다.
즉, ‘이건 내 본심이 아니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라는 의미가 담긴 혼신의 연기였다.
그 연기 덕분일까?
베일은 세르펜스의 말에 크게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게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저하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하신 거로 압니다. 맞습니까?”
세르펜스의 되묻는 말에 베일은 멈칫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문제인지 고민해 봐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지, 베일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세르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바스툴 왕국의 귀족들을 설득할 때에도, 같은 말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
베일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앞서 최악의 연설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멍청함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녀석이 말하는 걸 듣자 하니, 연설문을 다듬어 줄 생각인가 보네.’
나는 긴장을 풀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정으로 마들렌을 하나 집어 입에 물었다.
세르펜스는 신성 제국의 둘밖에 없는 공작 중 하나다.
그런 녀석에게 연설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 둔다면, 장차 베일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자신의 노력으로 누군가가 잘못을 뉘우치고,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 말은 자칫, ‘실패’를 전제로 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혹여 노력하다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좋은 얘기라고 생각하며 들었는데.
세르펜스의 말을 듣고 나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베일의 연설에 자신감이 결여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덧붙여서 노력하고 싶다는 표현은 대체 어쩌다가 나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도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세르펜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모습은 마치,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데,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였습니까?’라고 질문하는 듯했다.
독한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고와 달리, 이제까지 나온 독한 표현은 ‘최악’이라는 단어가 전부였다.
하지만 베일에게는 엄청나게 뼈에 사무치는 말이었을 거다.
기나긴 고민 끝에 의지를 굳건히 다진 후 힘겹게 내뱉은 선언이었는데, 그걸 한순간에 공언(空言)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앞으로는 그런 표현은 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니, 노력이라는 표현 자체가 금물입니다. 어떠한 방향으로 바꿔 나가겠노라 선언을 하십시오. 저하 본인께서 귀족들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지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저하를 믿고, 뒤따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르펜스가 하는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베일에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자신을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세르펜스를 보며, 베일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하께서는 당당해지셔야 합니다.”
···라고, 소심펜스가 말했다.
남에게 조언하기 전에 본인부터 당당해지면 좋으련만.
나는 녀석의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하며, 베일의 표정을 살폈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세르펜스를 쳐다보는데, 그 눈빛에 존경심이 가득 담겼다.
그런 베일과는 반대로, 그의 옆자리에 앉은 에드나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이웃집 야옹이가 갑자기 사람 말을 구사하며, 누군가에게 훈수 두는 모습을 목격하기라도 한 얼굴이다.
베일이 그녀의 얼굴을 봤으면, 박살 난 자신의 감동을 물어내라며 멱살을 잡았을 거다.
우리는 원형 탁자에 나, 세르펜스, 유지스, 에드나, 베일, 윈스톤 순으로 둘러앉았는데, 자리를 누가 정한 건진 몰라도 신의 배치라 아니 할 수 없다.
일부러 옆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상, 베일이 에드나의 표정을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점에서 말이다.
“무엇보다 저하께서 하시려는 일에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를 바꿔 나가는 것 이전에, 저하께서는 왕이 되셔야 하잖습니까? 실패는 곧 패배를 의미하며, 패배는 곧 죽음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실패를 연상케 하는 말은 결코 입에 올려서는 안 됩니다.”
세르펜스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베일의 표정이 점차 결연하게 바뀌었다.
요즘 들어 세르펜스가 자꾸만 아이처럼 행동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런 걸 보면 마냥 어린애는 아닌가 보다.
(스물)여섯 살이 아니라, 진짜 스물여섯 살처럼 느껴졌다.
녀석의 나이는 무슨 탈착식이라도 되는가 보다.
“저희는 저하께서 올곧은 분이라는 걸 믿고 있기에, 저하의 일을 잠시 도와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나, 앞으로 함께 하게 될 귀족들은 다르잖습니까? 저희에게 하셨던 말씀을 귀족들에게 그대로 한다면.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을 앞에 두고, 전쟁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라고 연설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전쟁은 승리를 거머쥘 때야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베일이 패배할 기미가 보이면 우리는 내뺄 수 있지만, 베일과 그를 지지해준 귀족들은 아니다.
내전은 이겨야만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으며, 패배의 결과는 개죽음일 뿐이다.
세르펜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아름다운 패배는 운동 경기에서나 통용되는 말이다.
심지어 베일이 해야 하는 건 그냥 전쟁도 아닌 내전이다. 패배하는 순간, 그냥 반역자로 낙인찍힐 뿐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정의로 내세웠는지, 어째서 반역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이 모든 것이 역사책에 기록조차 되지 못한 채로 묻혀버리게 될 거다.
세르펜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베일의 앳된 얼굴이 오늘따라 신경 쓰인다.
“슬픈 이야기지만···. 저하께서 얼마나 정의로운 사람인지는 귀족들에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지켜주는 울타리’를 얼마나 견고하게 고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가. 오로지 그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마디로 ‘너희 나라 귀족들은 이미 글렀다. 도리 같은 소리는 때려치우고, 공약이나 새로 만들어라.’라는 뜻이다.
“제가 너무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게 아닐지, 우려스럽습니다.”
이는 ‘어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라.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일깨워 주어 고맙다고, 당장 감사를 표해라.’라는 말과도 동일하다.
그런 주제에 싫은 소리도 달게 받겠다는 듯. 가만히 눈을 내리깔며, 다소곳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기가 막혔다.
“주제넘은 소리라니, 그렇지 않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천금처럼 값진 말이었습니다. 프라시더스 공작께서 함께해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베일의 세르펜스 의존도가 대폭 올라간 것 같다.
이러다 베일이 세르펜스더러 바스툴 왕국으로 이민 와 달라며, 사정하게 될까 봐 걱정이다.
세르펜스가 내게 야옹 하는 꼴을 직접 두 눈으로 봐야 저 환상이 깨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