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4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49화(449/1105)
449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19)
* * *
그간 방문했던 영지에서 받은 식사 대접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었다.
영주 혼자 우리를 정중히 맞이하거나, 가족들을 동원하여 친근하게 맞이하거나.
그중에서 세라투 자작은 전자에 해당하였다.
나는 와인을 마시는 척, 눈동자만 굴려서 식사 중인 세라투 자작을 힐끔 쳐다봤다.
부유한 가문답게 그가 입은 옷은 고급스러웠고 식사 예절 또한 세련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표정에서도 여유가 묻어났다.
그래서 그런가, 세라투 자작은 지방의 자작 가문이 아니라 대영지를 다스리는 고위 귀족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가족들을 소개받아야, 안면을 익히고 대화를 하든 말든 할 텐데···.’
어차피 한동안 세라투 영주성에 눌러앉을 계획이니, 적당히 성안을 쏘다니다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꾀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하지만 기왕이면 정식으로 소개를 받는 편이 좋다.
그래야 세라투 가문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테고, 그들의 사이가 어떠한지 파악하기 용이할 테니까.
‘일단 성에 머무르는 것부터 허락 맡고 보자. 그러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적당히 생각을 마무리하고, 스테이크를 썰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아 참. 오는 길에 봤는데, 영지민들의 행색이 깔끔하니 보기 좋더라고요.”
“하하하! 영주란 그 땅을 다스리며 질서를 유지하고, 영지민들을 보호하는 사람이지요. 그렇기에 영지민들의 생활에는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세라투 자작이 중후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대답했다.
그냥 ‘너네 영지 참 부유해 보이더라.’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 겸손함은 우주 저편으로 날려 보낸 자화자찬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자작의 발언 자체는 영지민을 생각하는 참된 영주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가 반역 꿈나무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얘길 듣고 난 이후라서 그런지, 그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왕과 백성들로 대체해도 자연스러운 문장이네.’
더군다나 진심으로 영주라면 이렇게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면, 구태여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내뱉었을 리가 없다.
자신은 다른 귀족들과 다르며, 왕실에서도 신경 쓰지 않는 민중들을 이렇게나 잘 보살피고 있노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야, 긍지가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영지민들을 살뜰히 챙기시는 걸 보아하니, 영주님께서는 필시 룩스메아 님의 독실한 신도이신 게 틀림없군요! 이런 영주님께서 영지를 다스리고 있으니, 영지민들도 행복하겠습니다.”
“그렇게 느끼셨다니, 감사합니다.”
난데없이 룩스메아를 들먹거리는 내 헛소리에도, 자작은 기분 나쁜 내색 없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나는 방금 썰어 놓은 고기를 입에 넣어 씹어 넘긴 후. 짐짓 어두운 표정을 가장하며 다시 말을 붙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지민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드리워져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더군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제 눈에는 보였습니다. 밝은 미소로 숨긴 내면의 그림자를요. 이는 필시 악마 숭배자들의 위협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이었겠죠.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지···.”
쉽게 말해 ‘완벽한 너희 영지에 딱 하나 부족한 게 있지. 그건 바로 룩스메아 교단의 신전이다!’라는 뜻이다.
“제 영지가 주교님 마음에 쏙 드셨나 봅니다.”
세라투 자작이 은은하게 웃으며, 우아한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썰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까지 들렀던 영지의 영주들이 나를 붙잡으려고 저자세로 나왔던 것과는 반대로.
세라투 자작은 이곳에 신전을 세우고 싶거든 자신에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바스툴 왕국의 다른 귀족들이랑 다르긴 다르네.’
가문의 부유함에 근거한 자신감인지, 어중간한 직위에서 비롯된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라투 자작은 바스툴 왕국에서 보았던 귀족 중, 가장 귀족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스테이크를 한 점 더 입에 넣고 꼭꼭 씹어먹는 척하며,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했다.
‘자작의 말에 맞받아치며 신경전을 벌여야 하나?’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신전 설립이 아니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사할 집을 보러 가서 흥정하듯 트집 잡을 필요는 없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아하하, 이거 들켰네요!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며칠간 성에 머무르며 영지를 돌아봐도 될까요?”
“바로 인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작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내 말이 예상 밖이었던 걸까? 어쩌면 성에 머물러도 되느냐는 질문의 답을 회피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전자라면 ‘에인젤 주교’의 소문을 열심히 긁어모았다는 뜻이며, 후자라면 신전을 세우기 껄끄러운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리라.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객관적으로 보아도 세라투 령은 치안도 좋고, 영지민들의 행색에서도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영지를 여섯 군데나 들렸는데, 이런 영지는 한 군데도 없었거든요. 그곳의 영주들은 영지민들의 입에 거미줄 치는 걸 겨우 면할 정도로 세금을 높여 받고 나서야 겨우 부를 누릴 수 있는데. 세라투 영주님께서는 그게 아니시잖아요?”
“에인젤 주교님께서는 사람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세라투 영주님께서 다른 영주들과 구분된다는 뜻이죠.”
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자, 세라투 자작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요것 봐라?’라고 말하는 듯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러할 게, 앞서 거쳐온 영지들은 백작령이었는데 이곳은 자작령이잖습니까. 보나 마나 땅덩이도 좁고, 다들 궁핍하게 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웬걸요? 영지민들도 그럭저럭 잘 사는 데다가 영지도 넓지 뭡니까? 게다가 성의 장식품들과 음식을 담은 그릇이며, 식재료의 상태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길래, 아까 영주님께서 자기소개를 하실 때 기억해 뒀죠.”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을 축이는 척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세라투 자작의 표정을 살폈다.
자작령이라고 무시하는 말에도 미간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영지의 부를 높이 사는 말에도 우쭐거리며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저 할 말이 있다면 더 해보라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 양반, 보통이 아닌데?’
성검이 내려오고 난 후.
세라투 자작이 계획적으로 주변의 땅을 사들여 영지를 넓혔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전에 만나 본 영주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우습게 생각했는가 보다. ‘이런 놈들 사이에서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나겠어.’ 하고 말이다.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은 [성검의 주인]에 등장했던 ‘세라투 후작’일 줄 알았는데, 생각을 바꿔먹어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세라투 후작’은 타락펜스에게 조종당하던 수동적인 놈이었고, 현 세라투 자작은 능동적인 반역 꿈나무니까.
“사실 이 영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영주님이십니다. 앞서 여섯 군데의 영지를 돌아보며, 제가 속으로 얼마나 한탄을 했는지 모릅니다. 다들 하나같이 수준이 떨어져서, 말을 섞는 것조차 꺼려지더군요. 아닌 말로, 그런 상스러운 자들이 영주랍시고 으스대는 게 얼마나 꼴사납던지. 반면에 세라투 영주님께서는 이렇게나 교양이 넘치시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라투 자작이 감사 인사를 했으나,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게 느껴졌다.
당연한 소리를 뭐하러 입 아프게 떠드느냐는 오만이다.
‘이쯤 띄워줬으면 적당히 만족할 것이지.’
내가 지금 룩스메아 교단의 주교로 변장한 게 아니라, 세라투 자작 전속 아부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주교 역할을 하면서 처음으로 회의감이 찾아왔다.
‘이런 건 나보다 세르펜스가 훨씬 더 잘할 텐데.’
세르펜스가 아부를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남의 기분을 띄우는 것에 최적화된 얼굴과 목소리를 지녔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는 순진무구한 표정과 나긋나긋하면서도 정중한 말투에,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 연기까지.
그 모습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자신이 뭐라도 된 듯한 느낌을 만끽하며 누구나 우쭐거리게 된다.
‘어, 결국 아부를 잘한다는 뜻이 되나?’
아무튼 모르긴 몰라도 세르펜스가 나섰으면, 벌써 상황 종료하고 가족들을 소개받고 있었을 거다.
“영주님께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놀라워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영주님의 작위를 모르는 것도 아닐진대, 어째서 세라투 자작님이 아니라 세라투 영주님이라 부르는 줄 아십니까?”
“흐음, 어째서입니까?”
“세라투 영주님께서는 ‘자작’이라는 작위에 묶여 있을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영주님의 그릇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닙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자작이 처음으로 감정을 내보였다.
입으로는 과찬이라고 말하였지만, 기분 좋게 휘어진 눈매는 과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흡족해하는 기색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나는 슬쩍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다시 한 번 와인을 홀짝였다.
“와인은 입맛에 잘 맞으십니까?”
내가 표정 관리를 끝내고 잔을 내려놓자 세라투 자작이 지나가는 투로 질문했다.
너무 노골적인 물음이라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뇨, 그냥 있으니까 마시는 건데요? 영주님께서는 와인은 별로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 이거 맛이 영 별로네. 이 나라가 돌아가는 추세를 보아하니, 앞으로 세라투 영주님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질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관심 없는 와인이라도 좋은 거로 준비해 두시는 걸 추천합니다. 그리고 이딴 걸 와인이랍시고 가져온 납품 업체도 갈아 치우시죠?”
“네,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세라투 자작은 그렇게 대답하며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러자 주변에 시립해있던 시녀들이 다가와 와인잔을 치우고, 빈 잔을 가져와 새로 와인을 따랐다.
잔을 들어 올려 가볍게 스월링해 보자, 풍기는 향부터가 달랐다.
이런 내 행동을 보며 세라투 자작이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앞에 내놓았던 와인도 나름대로 이름 있는 제품이었는데 미흡하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주교님께서는 좋은 술을 많이 마셔 보셨나 봅니다.”
와인 맛이 어떠냐는 질문을 들었을 땐,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이중 함정이었나 보다.
정체를 들킨 건지, 그냥 떠보는 건지. 아니면 ‘에인젤 주교’가 교단에 귀의하기 전의 신분을 궁금해하는 건지.
이런저런 추론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곧장 머리를 비워냈다.
“영주님께서 와인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걸 보고, 저를 시험하시는 건가 싶어 그냥 넘겨짚어 본 것뿐입니다. 사람이 성공하는 데 필요한 건 미각보다는 눈치 아닙니까?”
“하하하하! 맞습니다.”
세라투 자작이 호쾌하게 웃으며 나를 시험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고도 사과 한마디 안 하는 꼴을 보아하니 자신이 갑이라는 걸 확신한 듯하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은 기분을 맞춰줘야 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밖에.
“그나저나 성에 묵어가신다면, 성기사 분들의 식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묵묵히 리필 된 와인을 마시고 있으려니, 세라투 자작이 내 뒤에 선 윈스톤과 베일을 눈짓하며 질문했다.
우리가 성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