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5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52화(452/1105)
452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22)
글씨 연습에 심취한 세르펜스를 대신하여 손으로 물장구치기를 몇 분.
드디어 세르펜스가 손을 멈추고 종이를 내게 들이밀었다.
‘잉크가 검은색이기에 망정이지, 빨간색이면 좀 무서웠을지도···.’
깜지라도 쓰듯 빼곡하게 적힌 내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맨 윗줄의 글자는 내 필체와 매우 흡사했지만, 아래로 갈수록 필체가 조금씩 변화하여, 맨 마지막 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다른 필체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보좌관 일을 하면서 지겨우리만큼 자주 보아온, 유려하고 세련된 세르펜스의 필체였다.
‘내가 살던 세상의 문자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나보다 더 알아보기 쉽게 쓰다니!’
대략 5살 때부터 글씨를 익혔다고 쳤을 때, 약 20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추월당한 셈이다.
약간 분한 기분이 들었으나 아이가 자신보다 잘났다고 해서 질투를 한다면, 그건 올바른 어른이라 할 수 없다.
나는 물장구 치던 손을 꺼내어 대충 수건에 닦은 뒤, 세르펜스가 쓴 이름 깜지 아래에 글을 썼다.
[ 참 잘했어요. *^▽^* ]세르펜스는 내가 쓴 이모티콘을 한동안 멀뚱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그게 웃는 얼굴을 형상화한 그림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내가 그린 이모티콘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선생님에게 칭찬받아서 기뻐하는 유치원생 그 자체의 해맑은 미소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녀석은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 <선우>, 감시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되는 문장이었건만. 녀석은 굳이 문장 첫머리에 내 이름을 달아놓았다.
이렇게 내가 살던 곳의 문자와 이 세상의 문자가 나란히 놓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상당히 묘하다.
분명 다른 체계의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필체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 사실에 정신이 팔려, 그 짧은 문장을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그 짧은 문장을 몇 번이고 곱씹는 동안.
세르펜스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바깥의 기척에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왼손을 물에 담그고 휘저어, 물소리를 내는 걸 잊지 않았다.
잠시 후, 세르펜스는 종이에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 가방 속 내용물을 확인한 뒤,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감시자는 우리에게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녀간 거겠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바깥의 동향에 관심을 끄고, 조금 전에 세르펜스가 적었던 [ 확신하기에는 (중략) 듯하다. ]라는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선우>를 시험했으니까. ]세르펜스가 아까는 미처 적지 못했던 문장을 써냈다.
한참을 돌아서 도달한 것치고는 너무 밑도 끝도 없는 설명이다.
[ 자세히 ] [ 세라투 자작의 행동은 <선우>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일지, 평가하고 시험하는 것처럼 보였다. ] [ 그런 것치고 사람을 너무 찍어 누르려고 하던데? 비즈니스 파트너를 그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 [ 우위를 다투려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과 오래 보고 지낼 생각이라는 뜻이다. ]한 번 보고 끝낼 사람이라면 적당히 대접해 주면 그만이지만, 그게 아니니까 갑을 관계를 확실히 굳히려 한다는 얘기다.
새로 생길 신전의 대표인 ‘에인젤 주교’를 동등한 위치로 보지 않고, 예비 부하쯤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 그래서 기선 제압 중이다? ] [ 그자 또한 에인젤 주교님의 소문을 들었을 테니까. ] [ 가상의 인물에게 ‘님’을 붙일 필요가 있어? ]내가 쓴 물음을 보고 세르펜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주교님 주교님 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썼는가 보다.
[ 그보다 내용에 집중해라. ]나는 세르펜스가 바라는 대로, ‘에인젤 주교’의 소문과 기선 제압의 상관관계를 떠올려 보았다.
에인젤 주교는 기선 제압을 한답시고, 성기사들의 식사권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고 있다.
이제껏 들른 모든 영지에서 그렇게 행동했으니. 영주들 사이에서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 <ㅇㅋㅇㅋ> 이해함. 권위적인 성향의 에인젤 주교를 맘대로 부리려고, 초장부터 우열을 분명히 해둔다는 거지? ] [ 그래. 그런데 <ㅇㅋㅇㅋ>는 뭐지? <유선우>와는 문자 체계부터가 다른 것 같은데? ]나한테 내용에 집중하라고 할 땐 언제고. 정작 세르펜스가 딴 길로 빠졌다.
[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알겠다는 뜻의 <오케이 오케이>를 줄여서 쓴 거야. 미리 말하자면 나만 이렇게 쓰는 게 아니고 다들 이렇게 써. ] [ 악마 숭배자를 ‘악숭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단어로 줄여서 부르는 것도 그런 세상에서 온 탓인가? ] [ 그렇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왔어도 비슷하게 줄여서 불렀을걸? ‘악숭자’라던가, ‘악마숭’이라던가. ]내 설명을 읽은 세르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귀찮고 번거롭기만 한 헛치레를 교양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살아온 탓에, 줄임말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운가 보다.
[ 어쨌든 그자가 <선우>를 시험했던 건, 에인젤 주교의 성향을 알아보기 위함일 거다. ] [ 권위적인 거 말고? ] [ · ]세르펜스가 또다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조금 망설이는 표정으로 <ㅇㅋㅇㅋ>라고 적었다.
내가 애한테 괜한 걸 가르친 건 아닐지 후회스러우면서도, <ㅇㅇ>를 쓰지 않은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내가 속으로 안도하는 사이, 세르펜스는 이어서 글을 써 내려갔다.
[ 에인젤 주교가 본래 귀족이었다면 귀족 사회에 미련을 가졌는지. 반대로 평민이었다면 귀족의 문화를 얼마나 동경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가. ]앞서 두 문장은 결국 같은 말이었다.
세라투 자작이 ‘에인젤 주교가 귀족이 누리는 권위와 사치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가늠하려 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신경 써서 봐야 할 건, 맨 마지막 문장이었다.
[ 무슨 짓? ] [ 가령 예를 들자면. 무고한 자를 악마 숭배자로 지목하고, 정보를 조작할 수 있는가? ]세르펜스가 쓴 글을 토대로 추론해 보자면, 세라투 자작이 바라는 건 신전의 인력을 멋대로 부리는 수준이 아니다.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 룩스메아 교단을. 더 나아가 신 룩스메아의 존재를 이용하는 것이며, 이는 분명한 신성 모독이다.
어쩌면 세라투 자작은 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그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세르펜스가 소심하게 끄적거렸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녀석이 방금 쓴 글에 부정했다.
세르펜스가 아무나 의심하며 최악을 가정하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지만, 아주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 그자가 왕이 되고자 한다면, 그게 맞겠지. 종교만큼 이용하기 편한 건 없으니까. ]신생 국가의 체계를 빠르게 안정시키려면, 모든 권한을 왕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게 유리하다.
각자의 이득을 위해 갑론을박을 주고 받으며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다고 반항하는 자들을 무턱대고 억압하면 곧바로 반란이 일어날 테다.
일개 자작도 왕이 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한둘이 아닐 테니까. 억압까지 갈 필요도 없이 조금만 거슬려도 뒤엎고 일어날 게 뻔하다.
하지만 신성 루멘 제국만큼은 아니더라도, 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반하는 자들을 악숭이로 몰아갈 수만 있다면.
‘진짜로 악숭이가 아니고서야, 잠자코 머리를 조아리겠지.’
특정 종교가 힘을 갖는 세상에서,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심판이란 매우 강력하고도 강제적인 힘이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종교가 타락하지 않은 건, ‘신’이 실제로 존재하여 위기가 닥치면 성검을 내려보내는 등.
이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기 때문이리라.
[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악마 숭배 세력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건 어디까지나 정황상의 추측일 뿐이다. ] [ 예이, 예이. 암요, 그렇겠죠. ] [ 필담에서 쓰는 존댓말은 잉크와 종이 면적과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 아니었나? ] [ 비꼰 거야. ] [ 나도 비꼰 거다. ]나는 종이에서 눈을 떼고 세르펜스를 노려보았고, 녀석 또한 뭘 보냐는 눈빛으로 나를 마주 노려봤다.
이런 의미 없는 눈싸움을 오래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먼저 시선을 회피하자니 괜히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메롱 혀를 내밀어 보인 후 다시 펜을 들었다.
[ 악숭이와 접촉한 적 없다고 우리가 착각하도록 그런 태도를 보였다거나, 교단과 악숭 세력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던 거잖아. ] [ 그래.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메롱은 녀석을 약 올리는 데 눈곱만치의 효력도 없었나 보다.
세르펜스는 메롱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답문했다.
[ 아도르는 늘 그렇지. ] [ 내가 뭔가 잘못했나? ] [ 무언가 추측을 내놓을 때마다,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잖아. 자기 의견에 너무 자신감이 없어. 여러 가능성을 열어둬서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라는 건 알지만, 그게 너무 지나쳐. 매번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잖아. ]내가 적은 글을 보며 세르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싶어, 나는 괜스레 펜의 꽁무니로 머리를 긁적였다.
[ 우리가 욕실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지? ] [ 지금쯤이면 나가도 될 거다. ] [ 나가면 필담은 못 하려나? ] [ 커튼의 재질이 매우 얇더군. ]나는 언뜻 봐서 몰랐는데, 얇은 반투명 재질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침대에 몸을 던진 탓에 시야가 제한되었던 나와는 다르게, 녀석은 방안을 돌아다녔으니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나 보다.
지금이 여름이니만큼, 얇은 커튼을 달아놓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진짜 목적은 원활한 감시를 위해서겠지만 말이다.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시종장에게 암막 커튼으로 바꿔 달라고 해야겠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푹 못 잤다고 따지면 되겠지.
[ 까짓, 늦게 나가면 오래 씻는가 보다 생각하겠지. ] [ 더 할 말이 남았는가? ] [ 내가 글을 통해서 읽었던 세르펜스는 어째서 세라투 자작이 아니라, 그 자식 중 하나를 골랐던 걸까 의문이 들어서. ]직접 본 세라투 자작령은 바스툴 왕국의 다른 영지들과 비교하여 살기도 좋았고, 자작 본인도 품위가 있었다.
그 진짜 속내가 어떻든지 간에 말이다.
아니, 오히려 자작이 음험하면 음험할수록 더욱 써먹기 좋았다.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니, 세르펜스가 매번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악숭 세력과 성향이 아주 잘 맞는 것 같다.
[ 자작을 베일의 옆에 붙여놓고 적당히 정보를 빼돌린 후. 베일이 죽고 나면 후계자 없는 바스툴 왕국을 통째로 가질 수 있도록 해주겠다거나. 아니면 유지스의 추측대로 젊어지게 해 준다거나. 거래로 제시할 만한 조건이 꽤 많지 않아? ]세르펜스가 내가 쓴 글을 읽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도 생각할 줄 알고, 많이 컸다고 말하는 듯한 모양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세르펜스도 쑥쑥 자라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