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5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55화(455/1105)
455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25)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일부러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문제가 생겼다는 부하의 말에 곧바로 진지하게 반응하며, 부하를 갈굴 기회로 삼는 건 이류나 하는 짓이다.
일단 가볍게 넘겨놓고 해당 문제가 커졌을 때. 부하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는 거야말로 일류 꼰대가 할 행동이다.
“가방을 뒤진 듯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냥 가방이 흔들리며 물건들이 뒤섞였을 뿐이겠죠. 막내 신관님께서 착각하신 걸 겁니다.”
“제 가방은 그랬을지 몰라도, 주교님의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방에 도착한 뒤, 주교님의 가방을 정리하는 걸 보셨잖습니까?”
세르펜스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역시나. 우리가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내 가방을 새로 정리했던 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나 보다.
“이쪽으로 가까이 와 주십시오.”
“에이, 귀찮게···.”
나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신발을 질질 끌며, 세르펜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세르펜스는 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시선을 가방 쪽으로 돌렸다.
“혹시 주교님께서 방으로 돌아오신 뒤, 가방을 건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없는데요.”
예상했던 질문에 나는 즉답했다.
너무 빨리 대답한 탓에 수상함이 묻어났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중요한 건 세르펜스의 가방이 아닌 내 가방이니까.
내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 세르펜스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는 듯이 두 눈을 빛냈다.
“여기를 봐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손가락으로 내 가방 속을 가리켰다.
깔끔하게 정리된 잡다한 물건들과 반듯하게 개킨 옷을 보고 있으니, 여행 짐가방을 싸 놓은 게 아니라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이벤트 상품의 샘플처럼 보였다.
‘룩스메아 교단 x 에인젤 주교, 콜라보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부르면 되려나?’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가방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쉽게 말해 세르펜스가 정확히 어딜 가리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보이십니까?”
“어어···.”
내 시력으로 보이지 않는 작디작은 무언가가 있는 걸까 싶어,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살펴보았다.
그래도 이상한 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내가 답답했는지, 세르펜스는 조금 더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화려한 금빛 자수가 놓인 하얀색 예식용 복장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상체까지 숙여서 자세히 살펴보아도 티끌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여기, 이 미세한 주름이 보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완전 생트집이 따로 없다.
녀석의 말을 듣고, 의식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희미한 주름이 보이기는 했다.
나는 옷에서 시선을 떼고,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진심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그리고 애석하게도 녀석의 눈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주교님의 가방도 같이 들고 다니는 만큼. 저는 가방이 흔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히 걸었습니다. 그런데도 내용물이 심하게 흐트러진 것이 이상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교님의 가방을 열어 봤더니···.”
세르펜스는 ‘내가 이렇게 주교님의 물건들을 귀중히 여긴다. 그러니 옷 주름도 당연히 신경 쓴다.’라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그리고 희미한 옷 주름에도 끔찍한 참상을 마주한 듯,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녀석의 말만 들으면, 침입자가 내 가방 속 물건들을 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밖에서 엿듣고 있을 감시자가 엄청나게 억울해하겠네.’
세르펜스가 옷을 개면서 작은 주름 하나 놓치지 않았을 거라고, 누군들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방에 누군가 침입해서 가방을 뒤진 건 확실하다는 거죠?”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을 똑바로 차렸어야 했는데. 주교님께서 침입자를 마주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입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른 채, 씻고 있는 동안 그자가 주교님께 해를 끼쳤다면···. 아아-, 생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르펜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 모습을 보고 연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세르펜스는 감시자의 존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녀석이 씻는 내내 불안에 떨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좀 기다려줬다가 같이 나올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아니야, 마음 독하게 먹자.’
고양이의 분리불안을 고치기 위해,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그 너머에서 기다리는 훈련을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문 너머의 기척을 전부 감지하는 세르펜스에겐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검을 열심히 배워 성기사가 되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수련을 게을리하니까, 침입자가 왔다 간 것도 모르죠.”
“죄송···합니다.”
세르펜스가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침입자에 대해 얘기를 하다 말고, 내가 이런 말을 꺼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신관 프레이가 검술 실력을 드러낸 건, 루멘 제국과 펠로 왕국 사이의 국경 부근이었다.
그 사실을 세라투 자작이 알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즉, 목욕 가운 사이로 안녕하고 인사하는 세르펜스의 근육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막내 신관님은 재능이 있으니까, 수련만 꾸준히 했으면 최연소 성기사 단장이 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랬으면 좀 좋아요? 막내 신관님은 제 말을 잘 따르니까, 지금처럼 예비 성기사 단장이랑 기 싸움도 안 해도 됐을 텐데. 어휴!”
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자 세르펜스는 기가 죽어 몸을 잔뜩 움츠리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처량함을 극대화했다.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축축하게 젖은 탓에 비 맞은 새끼 고양이 그 자체였다.
습관이란 참 무서워서,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막내 신관님. 아니, 프레이 님.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고 성기사 쪽으로 전향해 보는 게 어때요? 이례적인 일이지만, 프레이 님의 재능을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머리를 쓰다듬어도, 감시자가 의심하지 않을 만한 대사를 읊어보았다.
내뱉고 보니,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이의 장래 희망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부모나 할법한 소리다.
“그, 그건 싫···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주교님을 곁에서 모실 수가 없잖습니까? 주교님께서도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세르펜스가 내게 애원하는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
그 실감 나는 연기에 괜히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서, 고개를 휙 돌리며 손을 거둬들였다.
“빨리 가방이나 확인해 봅시다! 훔쳐간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니.”
“네···.”
세르펜스가 기운 없이 대답했다.
녀석은 물건을 확인하는 김에 정리까지 할 생각인지, 내가 뒤적거린 탓에 구겨진 옷들을 다시 개켰다.
나는 말끔하게 정돈된 내 가방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맨 위에 있는 예복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어차피 새로 정리해야 하니, 그냥 없어진 물건만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럼 저야 편하죠.”
앞서 프레이는 옷 주름 하나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라고 제시했다.
세르펜스는 그 설정에 충실한 대사를 말했고, 나는 나대로 에인젤 주교 설정에 걸맞은 대사와 행동을 취했다.
옷은 대충 장수만 세고, 영주들에게 받았던 뇌물을 꺼내어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다.
그럭저럭 비싼 물건 축에 속하는 깃펜 세트 또한 유심히 살펴봐야 할 물건 중 하나다.
나는 깃펜이 든 상자를 열어보며 말했다.
“다행히 사라진 물건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막내 신관님은 어때요?”
“······.”
당연히 돌아와야 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세르펜스의 목소리 대신 내 귀를 울린 건 퉁, 퉁, 퉁 하는 이상한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세르펜스는 젤리 통을 손에 들고 살짝살짝 흔들며 그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금 들린 소리는 젤리가 들썩거리며 틴 케이스에 부딪히며 울린 소리였나 보다.
“뭐 해요?”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녀석은 아예 뚜껑을 닫은 후, 젤리 통을 마구 흔들었다가 뒤집었다가. 뚜껑을 열어 안쪽을 확인하고, 다시 닫아 흔들길 반복했다.
마치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어, 없어졌습니다.”
세르펜스는 결국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는지, 울상을 지었다.
대체 젤리 통 안에 뭘 넣어 놨길래 저렇게나 서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대체 뭐가 없어졌길래 그래요?”
“아껴 놓았던, 하나 남은 딸기 맛 젤리가···.”
“······.”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대충 빨간 걸 집어먹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아까 젤리를 씹었던 쪽의 치아 주변을 혀로 훑었다.
진짜로 딸기 맛이 났다.
그동안 세르펜스에게 하나씩 내어 줄 때도, 대충 집히는 대로 건넸는데. 녀석은 받아먹으며 남은 개수를 파악하고 있었나 보다.
“귀중품은 사라지지 않은 거로 보아, 침입자의 목적은 도둑질이 아닌 우리의 감시일 겁니다. 그리고 정황상, 감시자를 붙인 사람은 이 성의 주인이겠죠. 내일 세라투 영주님을 만나 뵙게 되면 얘기해봐야겠습니다.”
지금 말을 돌리는 거냐고 묻는 듯한 세르펜스의 눈빛이 얼굴에 꽂혔다.
하지만 나는 지금 딴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아무튼 그자는 영주의 명을 받고, 몰래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방이 비워진 틈에 우리의 정보를 얻으려고 잠입하여 가방을 뒤진 거겠죠.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놈들은 늘 배가 고픕니다. 감시 대상이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조차, 지금처럼 가방을 뒤지거나 상부에 보고하러 가야 하니까요.”
“그렇다는 건···?”
딸기 젤리를 먹은 범인이 나라는 걸 세르펜스는 알고 있을 거다. 그래도 나는 감시자를 범인으로 몰아갔다.
따지고 보면 내가 젤리를 먹게 된 원인은 전부 그자에게 있었으므로.
감시자만 없었어도, 내가 하나 남은 딸기 젤리를 먹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맞습니다. 막내 신관님의 하나 남은 딸기 젤리를 훔친 사람은 바로 그 침입자입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르펜스는 내 손에 들린 상자에서 깃펜 하나를 들고 창밖으로 쏘아내듯 던졌다.
그리고 바깥에서 부스럭부스럭, 요란스럽게 수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세르펜스는 깃펜을 세 개 더 집어 들고 다급하게 창가로 뛰어갔다.
“···놓쳤습니다.”
집어 든 깃펜을 전부 집어 던진 세르펜스가 힘없이 대답했다.
마음만 먹으면 직접 쫓아갈 수 있으면서. 제대로 된 암기도 아닌, 깃펜을 던지고 나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놓아준 거다.
‘그나저나 젤리 때문에 화가 치밀어서 이런 돌발 행동을 한 건 아닐 테고. 감시자 쪽에서 먼저 기척을 드러낸 건가?’
감시자의 기대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내일 세라투 자작을 만나게 되면 꼭 말해줘야겠다.
당신이 붙인 감시자가 우리 막내 신관님의 하나 남은 딸기 젤리를 훔쳐 먹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