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5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56화(456/1105)
456회
66. 공작님과 바스툴 왕국 (26)
“됐습니다, 어차피 배후는 영주님일 테니까요.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소리를 내리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침입자는 세라투 자작의 하수인이라고 잘난 듯이 말한 이후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그자에게 치명상이라도 입힌다면 되려 큰일이다.
그러니 세르펜스가 깃펜을 던진 것도 위협용이었을 뿐. 제대로 맞출 생각은 없었을 거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교님의 깃펜을···!”
세르펜스가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방금 자신이 던졌던 깃펜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감시자는 이미 도망친 이후지만, 연기는 계속할 생각인가 보다.
하기야 창문이 활짝 열려있으니까. 큰 소리로 떠들면 아래층까지 들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찾아서 뭘 어쩌시려고요? 그 꼴로 나가서 주워오시게요?”
“······.”
내 말에 세르펜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슬며시 창문에서 떨어졌다.
아무리 연기라 할지라도, 목욕 가운만 걸친 채 야외에서 뛰어노는 건 싫은가 보다.
“어차피 공금으로 산 거니까, 신경 끄세요. 정 미안하면 나중에 좋은 만년필이라도 사주시던가. 최근에 선물 받았던 만년필은 사용감이 영 구려서 못 쓰겠더라고요.”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생활비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서, 언젠가 주교님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꼭! 사드리겠습니다.”
아무리 ‘프레이’가 막내 신관이라 해도 그렇지. 받는 족족 저금해도 만년필 하나 사기가 그렇게 어렵나?
세르펜스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성직자 개인에게 지급되는 생활비는 쥐꼬리 수준에 불과한가 보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옷도 주고. 그 외에도 어지간한 건 경비로 처리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다 온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처사다.
세르펜스가 실은 부자라는 걸 알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릴 뻔했다.
이 녀석은 대체 왜 깃펜 얘기를 꺼내서, 나를 이다지도 민망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성기사입니다, 성기사! 방에 침입자가 왔다 갔는데, 이놈의 성기사들은 뭘 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여?!”
이제 슬슬 본래 화제로 돌아올 때다.
방에 낯선 사람이 침입했는데, 성기사들을 들볶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나는 화가 난 척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매까지 걷어붙였다.
그리고 쿵쿵 발을 세게 굴러가며 방문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멈춰 섰다.
“막내 신관님은 어서 옷이나 주워 입어요. 대체 언제까지 벗고 계실 생각입니까?”
“목욕 가운은 입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문 엽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문고리를 잡고 위협하자, 세르펜스는 황급히 잠옷을 집어 들고 욕실로 쏙 들어갔다.
그러게 좋게 말할 때 얌전히 ‘네.’ 하고 대답할 것이지. 괜히 우기다가 꽁무니를 말고 도망치는 뒷모습이 참으로 어리석다.
나는 욕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문 바로 옆의 벽에, 성기사 갑옷을 갖춰 입은 베일이 기대어 서 있었다.
윈스톤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벽에 기대지 않았을 텐데.
“······.”
“······.”
베일은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분명 눈이 마주쳤다.
설령 마주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베일의 고개가 내 쪽을 향했으니, 나를 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베일은 슬그머니 벽에서 등을 떼어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안 물어봐요?”
“아···,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막 세르펜스의 보좌관이 되었을 때. 문 앞에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는 나를 보며, 세르펜스가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도 전적이 있으니 어지간하면 이해하고 넘어가 주고 싶다.
하나, ‘에인젤 주교’는 대외펜스처럼 자상한 상관이 아니다.
“도대체가! 작은 성기사님의 상관은 대체 누구길래, 교육을 이딴 식으로···.”
“에인젤 주교님이십니다.”
“······.”
그러고 보니 설정상, 윈스톤은 성기사 단장이 되기 전이었다.
즉, 두 성기사는 선후배 사이에 불과하고 그들의 직속상관은 바로 나. 에인젤 주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뻘쭘함이 밀려들었다.
“크, 크흠! 방금 건 넘어가 드릴 테니까, 앞으로는 제대로 하세요! 보는 사람 없더라도, 벽에 기대지 말고, 허리 똑바로 세우고! 아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베일은 정중하게 대답했는데도, 왠지 모르게 약이 올랐다.
나는 괜스레 베일을 흘겨보며 날 선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나저나 작은 성기사님께서는 언제부터 여기에 서 계셨습니까?”
“방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서부터 줄곧 서 있었습니다.”
“큰 성기사님은요?”
“제가 저녁을 먹는 동안 방문 앞을 지키고 계시다가, 저와 교대하셨습니다.”
윈스톤은 베일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때늦은 저녁을 먹고 쉬는 중인가 보다.
세르펜스가 깨어있거나 얕은 수면 중일 시간대에는 베일을 세워놓고, 새벽 내내 자신이 호위를 서려던 게 아닐까 한다.
“침입자가 방으로 들어온 건, 두 성기사님께서 교대하신 이후일 겁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세르펜스였다.
뒤를 돌아보니, 싸늘한 표정으로 베일을 내려다보는 세르펜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벌써 옷을 다 갈아입고 왔는가 보다.
“뭐, 그렇겠죠. 딱 봐도 듬직하게 생긴 큰 성기사님보다, 작은 성기사님이 훨씬 만만해 보일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세르펜스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르펜스는 계속 베일을 노려보았다.
“치, 침입자가 있었습니까?”
베일이 세르펜스의 시선에 움찔하면서도 침입자에 대해 질문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당황이 느껴지는 거로 보아 모르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는 건 우리를 감시하던 놈이 베일의 실력을 뛰어넘는 은신 고수거나. 베일이 세르펜스만 믿고, 말 그대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거나.
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일 터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방을 지키라고 앞에 세워 뒀더니, 작은 성기사님은 대체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나는 일부러 목청을 높이며 베일을 다그쳤다.
이는 베일에게 면박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 저택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용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복도에서 일어난 소란에 가장 먼저 튀어나온 사람은 윈스톤이었다.
쉬는 중이라 들었는데. 갑옷과 투구까지 전부 갖추고 나타난 거로 보아, 그다지 편한 휴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윈스톤은 우리가 감시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까?’
베일과 교대한 걸 보면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세르펜스가 모르는 척하니까 맞춰준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중무장한 모습으로 나타난 걸 보면, 알면서 모른 체했다는 쪽에 무게가 실렸다.
“침입자가···. 아래에서도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 같으니까, 다 모이면 얘기할게요. 여러 번 말하기 귀찮으니까.”
나는 윈스톤에게 상황 설명을 하려다가, 여럿이서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요란한 발소리를 듣고 말을 바꿨다.
곧 시종장을 위시한 사용인들이 우리가 머무는 2층에 도착했다.
뒤이어 후드 대신 수건을 뒤집어쓴 유지스와 그냥 에드나도 방에서 나왔다.
“뭔가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시종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공손히 질문했다.
감시자의 존재를 정말 모르는 건지,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프라시더스 가문의 집사였던 한스가 사실은 한가락 하는 양반이었던 것처럼.
저 시종장 또한 대단한 은신 실력을 지니고, 우리를 감시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만약 그 둘이 동일인물이었다면 세르펜스가 내게 말해줬을 테니까.
“부울펴언~? 하아~, 나 참!”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나, 말씀해 주신다면 조처하겠습니다.”
“조처? 퍽이나!”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내 반응에 시종장이 당황스럽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방에 누군가가 침입하여, 저와 주교님의 가방을 뒤졌습니다.”
“그리고 막내 신관님의 딸기 젤리도 훔쳐 먹었죠.”
세르펜스가 냉랭한 목소리로 상황을 요약해 설명했고, 나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젤리 도난 소식에 기가 막혔는지, 에드나가 작은 목소리로 ‘미친, 제정신인가?’라고 중얼거렸다.
에드나의 기준에서도 성직자들의 방을 침입해, 젤리나 훔쳐 먹고 사라진 누군가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느껴졌는가 보다.
“그···, 그 말이 사실입니까?”
시종장이 믿을 수 없는 소리라도 들은 듯한 표정으로 얼떨떨하게 질문했다.
나는 일부러 숨을 꾹 참으며 척하니 팔짱을 낀 채, 발 앞꿈치로 탁탁 바닥을 두드렸다.
그렇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간을 끌다가, 이쯤 하면 얼굴이 빨갛게 올라왔겠지 싶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오라···.”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창문 너머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놈을 발견하고, 놈이 도망치는 뒷모습을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말을 다다다 쏘아붙였더니, 자동으로 씩씩 거친 숨소리가 났다.
나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로 훌륭한 분노 연기였다.
“영주성에 침입자라니···!”
시종장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미리 언질을 받지 않았더라도, 시종장쯤 되는 위치면 눈치껏 침입자를 보낸 사람이 세라투 자작이라는 걸 알아챘을 거다.
그런데도 시치미를 뚝 떼고 놀란 척을 하다니. 아주 의뭉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저는 그 침입자의 배후로 세라투 영주님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분이 보낸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우리가 영주성에 도착한 날 바로 감시가 붙을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대체 왜 주교님의 가방을 뒤지고, 젤리···를 훔쳐 가겠습니까?”
황당해하는 연기가 매우 수준급이다.
얼마나 감쪽같은지, 세르펜스의 연기에 익숙해지지 않았더라면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다.
“가방을 뒤진 이유는 내일 영주님께 물어보면 답이 나오겠죠. 그리고 젤리는 감시자가 배고파서 먹은 걸 테고요. 하나쯤은 사라져도 안 들킬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말입니다.”
내 대답에 시종장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모르긴 몰라도, 속으로 젤리를 훔쳐먹은 놈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 있을 거다.
“젤리를 훔쳐먹은 사실을 들키고, 보고라는 명목하에 영주님께 어떤 헛소리를 해댈지. 참으로 궁금하다 못해, 기대가 될 지경입니다!”
나는 한쪽 입꼬리만 삐뚜름하게 끌어올리며, 한껏 비아냥거렸다.
이런 말을 해 두면 그놈이 사실대로 보고한들. 세라투 자작에게는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로 들리겠지.
‘나로 하여금 세르펜스의 소중한 딸기 젤리를 먹도록 유도한, 이 원한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어쩌면 내 예복에 남은 ‘미세한 주름’ 때문에 들켰다는 보고 또한,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제대로 했는데 상대가 지나치게 예민했다, 대충 뭐 그런 느낌으로.
그만큼 세르펜스의 주름 지적은 터무니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