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7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75화(475/1105)
475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3)
르웰이 다시 봤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이유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나중에라도 한 곳에 정착하고 싶어지실 때, 꼭 세라투 령을 찾아와 주세요.”
“정착을 하더라도 제국에서 할 건데요? 외국에서도 추기경까지는 어찌어찌 오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이상은 힘들어서 말입니다.”
내 대답에 르웰이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정이 든 건 아닐 테니. 내가 교단의 유능한 인재라는 말에 혹해서 저러는 거겠지.
르웰마저 ‘자신의 영지에 세워진 신전의 인력’을 탐내는 걸 보니, 더더욱 ‘이 조건’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제가 원하는 조건은 셋째···. 아니, 르웰 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는 겁니다.”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얘기를 돌려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르웰은 내 의도를 이해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곁에 선 베일을 돌아보았다.
내가 원하는 거래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베일도 그 사실을 깨닫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혹여 바스툴 왕국의 정치에 관여하고 싶으시거든, 교단의 성직자가 아닌 바스툴 왕국의 귀족 신분으로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왕이 된다면, ‘여러분들’께 작위를 내리는 것쯤은 재량으로···.”
“꿈 깨세요.”
나는 베일의 말을 끊음으로써, 그의 허황된 꿈을 단숨에 부서트렸다.
어디선가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베일의 투구 너머로 추정된다.
악숭이들도 그렇고, 얘네들도 그렇고.
이렇게 사람을 스카우트하지 못해 안달이 난 걸 보니, 전 대륙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제가 바라는 건, 바스툴 왕국 내 신전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겁니다. 듣자 하니 바스툴 왕국에서는 영주들이 성직자들을 자기 부하 다루듯 한다던데. 똑같이 룩스메아 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고작 땅 좀 내어 준다고 너무 유세 떠는 거 아닙니까?”
“저도 성직자분들을 아랫사람처럼 부리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세금도 안 내는데, 간단한 협조 정도는 요구해도 괜찮지 않아요?”
영주 꿈나무 르웰이 내 말에 반박했다.
아직 영주가 되지도 않았고, 영지 내에 신전도 세워지지 않았건만. 자기 밥그릇 하나는 제대로 챙기는 모습이다.
‘그나저나 신전은 세금을 안 내는구나···?’
프라시더스 령의 회계 장부를 보았으니. ‘신성’ 루멘 제국에서는 세금을 안 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 온 나였기에, ‘세금을 안 냈다면 어쩔 수 없지. 노동력으로 메꾸는 것도 당연해.’라는 생각이 떠올라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주교님의 말씀은 ‘지금처럼’ 강압적으로 신전의 인력을 차출하려 하거나, 성직자분들을 무시하는 언사를 금지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영주가 신전에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교단의 성직자들은 ‘옳은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서고, ‘옳지 못한 일’에는 막아설 줄 압니다.”
자본주의에 굴복한 나를 대신하여, 세르펜스가 바통을 넘겨받아 소견을 피력했다.
신전이 나서야 할 일이면 어련히 나설 텐데.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자꾸 시키니까, 신전에 불만이 쌓이고,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냐. 정도껏 해라.
대충 그런 뜻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세르펜스의 말이 곧 내가 하려던 말이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또한. 저하께서 주교님의 조건을 수락하신다면, 그쪽 분께서 가주 자리에 오르는 데에 저하의 도움을 받게 된 셈이며, 그 약속이 이행되는 건 저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가 됩니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그쪽이 저하를 배신하신다면, 우리 룩스메아 교단과의 약속을 어긴 거나 다름없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느닷없이 세르펜스가 르웰에게 ‘배신은 곧 이단’ 같은 소리를 해댔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이 마치, ‘어때? 나 잘했지? 칭찬해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의도가 숨어 있었다니, 과연···. 한 수 배웠어요.”
르웰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과연은 또 뭐고, 대체 뭘 배웠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세르펜스를 칭찬해야 할지 혼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성직자 설정에 따른다면 녀석을 칭찬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녀석을 키우는 사람으로서는 타인을 협박하지 말라고 혼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정작 협박당한 르웰이 좋은 걸 배웠다며 기뻐하니, 정치란 원래 이런 건가 싶고.
고민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는 걸 보면, 주교님께서는 저하를 좋게 보셨나 보네요.”
르웰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협박을 당했는데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만족스럽다는 표정이다.
자신이 앞으로 모시게 될 자가 교단에서도 인정한,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나는 그저 교단의 이미지를 깎아 먹은 게 미안해서, 만회하려고 한 것뿐인데···.’
그 사실을 밝히며 바로잡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야겠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도발하지 않으셔도, 저는 저하를 배신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는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원래 주교님께서는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십니다.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고압적인 태도로 르웰에게 이해를 강요했다.
신관 프레이에게 오만하다는 설정을 부여한 건 나와 유지스의 합작인지라, 저건 혼낼 수도 없다.
“크흠! 이것저것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바스툴 왕국 내 신전들의 처우가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해 줄 건지 말 건지, 빨리빨리 정해주시죠?”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여 시선을 집중시킨 후, 베일을 닦달했다.
“약속하겠습니다. 제가 왕위에 오르고 나면, 영주들이 신전에 명령을 내리거나 영지 내 치안을 떠넘기는 등. 불합리한 행위를 금지할 것이며, 영주와 신전의 관계에 대한 인식 개선에도 힘쓰겠습니다.”
“나중에 가서 딴말하기 없기입니다? 만약 바스툴 왕국에 발령받은 성직자가 홀대받았다는 얘기가 들리면···. 정의의 이름으로 가만두지 않을 테니, 각오하세요.”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아무렇게나 얼버무리며 말을 마쳤다.
그래도 베일은 착실하고 바른 사람이니 약속을 꼭 지킬 것이라 믿는다.
“자, 그래서 이제 르웰 님을 어떻게 가주로 올려야 할지를 토론해 보죠.”
분위기를 전환할 겸, 나는 짝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러나 의견을 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방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어 비스듬하게 앉아, 껄렁하게 다리를 꼬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르웰 님은 의견을 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예전부터 뭔가 계획을 세우셨을 거 아닙니까? 그냥 저희에게 다 떠넘길 생각이었어요?”
“우선은···.”
내 도발에 르웰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무작정 입을 연 건 아니었는지, 그녀의 두 눈을 통해 굳은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한 눈빛과는 별개로 표정만은 르웰을 본 이래, 가장 경직된 상태였다.
“우선은, 아버지를···. 없애야겠죠. 교단 분들에게 사람을 죽여달라는 부탁은 할 수 없으니, 상황만 만들어 주세요.”
어쩐지 아무도 말을 안 하더라니.
딸 앞에서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어서였는가 보다.
게다가 이어진 말 또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베일에 이어 르웰까지 아버지를 직접 죽여야 한다니···. 이런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
세라투 자작을 악숭이로 고발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다.
하지만 이 방법은 택할 수 없다.
‘대륙에서 악마 숭배는 연좌제 적용 대상이니까···.’
르웰은 베일처럼 내부 고발자로 처리한다 쳐도, 자작 부인과 다른 두 형제까지 보호할 수는 없다.
‘세라투 자작더러 르웰에게 자리를 물려준 후 은퇴하라고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협박할 거리도 없고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다.
심지어 어찌어찌 은퇴시키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땐 진짜로 악숭이와 손을 잡고 무슨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리고 나서, 그다음은 어쩌실 생각이신데요?”
나는 르웰의 계획을 끝까지 들어보고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르웰은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작은 오라버니를 내심 후계자로 마음에 두신 듯하지만, 아직 소가주로 정식 임명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희 가문에는 후계자 선정에 관여할 수 있는 방계 혈족 또한 없죠.”
소가주 임명쯤은 당연히 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하지 않았을 줄이야.
설마하니 그것조차 계획적으로 써먹을 요량인 건가?
사람이 워낙 수상쩍다 보니, 모든 게 다 의심스럽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점에 관해 말하려면, 세라투 자작의 흉계를 르웰에게 전부 털어놓아야 한다.
일단 의심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나는 당장의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가주가 죽고 다른 어르신들이 안 계신다면, 자작 부인의 의견이 크게 작용하겠네요?”
“맞아요. 어머니께서는 큰 오라버니를 아끼시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오라버니가 죽는 건 원치 않으시겠죠. 그러니 제가 가주가 된다면 두 오라버니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겠노라 맹세한다면, 어쩔 수 없이 저를 선택하실 거예요.”
“첫째님이나 둘째님이 가주가 된다면, 서로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죠.”
르웰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문의 계승권을 두고 다투게 됐을 때. 자신의 형제를 죽이는 일이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한다.
더군다나 챈들러와 클로반은 사이가 매우 나쁘다.
클로반은 챈들러를 하찮게 여겼고, 챈들러는 클로반에게 적개심을 품었으니.
이제까지 챈들러가 폭발하지 않고 가만히 참기만 한 건, 세라투 자작이 클로반의 뒤에 버티고 섰기 때문이리라.
“솔직하게 말하자면 큰 오라버니를 살려두는 건, 저로서도 위험 부담이 커요.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오라버니와는 다르게, 큰 오라버니는 매우 위협적인 경쟁자인걸요?”
르웰의 말대로 세라투 자작이라는 배경이 사라진다면, 가장 가주 자리에 가까운 사람은 ‘첫째’인 챈들러다.
더군다나 그는 클로반보다 훨씬 뛰어나다. 직접 대화를 나눈 건 고작 몇 마디에 불과한데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지금 챈들러는 자격지심이란 틀에 갇혀있을 뿐이다.
자신을 둘러싼 벽만 부수고 나온다면, 소심하다는 단점조차 침착하다는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둘째님은요?”
“아버지만 없으면 작은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버지의 죽음에 혼란스러워하다가, 정신을 차릴 즈음이면. 가문은 제가 전부 장악한 이후겠죠. 그때 가서 복수하겠다며 덤벼오더라도, 저를 위협할 수 없어요.”
교만하게 말하는 르웰을 보며,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작 부인을 통해 계승권을 확보한다 한들, 작위를 인정받을 때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왕실에 관련 서류를 올려야 하니까.
임명장이 나오기 전에 형제들에 의해 암살이라도 당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아니지? 암살이 다 뭐야. 가문 내 기사들을 포섭해서 대놓고 덤벼들 수도 있잖아?’
그렇기에 쟁탈전이 벌어지면, 형제를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거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사교계에 얼씬도 하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스캔들을 퍼트리기도 한다.
상대를 철저하게 짓밟아 트라우마를 남겨,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좌절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그에 비하면 르웰의 계획은 계획도 아니다.
자기에게 힘이 주어진다면, 형제들이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일까?
아니면 세라투 자작의 아래에서 억눌려 살아온 동질감 때문에, 그 이상 매정해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