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7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78화(478/1105)
478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6)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대책이라 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 정리는 때려치우고, 무의미한 낙서를 끄적거리며 놀고 있을 즈음.
방 안에 잠깐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세르펜스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세르펜스는 후드와 복면을 벗고, 옷 안에 쑤셔 넣었던 머리칼을 꺼내어 정돈하며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의 목적이야 빤하다.
나는 테이블 위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종이를 모아서 세르펜스에게 건넸다.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낙서까지 집중해서 살피는 녀석의 행동에, 나는 빈 종이를 끌어와 글을 적었다.
[ 보고 안 해요? ] [ 종이와 잉크 낭비를 줄이기 위해, 필담에서는 반말을 쓰는 것 아니었습니까?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가장한 채, 장난스레 글을 적었다.
그 글을 본 베일이 나를 바라보며 괴상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세르펜스가 걸어온 장난에 맞장구를 쳐 주고 싶었으나, 곧 베일이 나가야 할 시간이다.
세르펜스도 기왕이면 베일이 있을 때 보고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순진무구한 연기를 끝내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 저는 창문 너머로 첫째 공자의 방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자는 책상 앞에 앉아 손수건을 보는 듯했습니다. ]보면 보는 거지. 보는 듯한 건 뭐람?
그런 의문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기가 무섭게, 세르펜스는 그 표현을 해명하는 글을 적었다.
[ 하지만 실제로 그자가 보던 것은 손수건이 아니라, 손수건으로 감싼 무언가였습니다.그자는 그것을 한참 동안 감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식장에 있는 책을 한 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책 사이에 그것을 끼워 넣고, 책을 본래 위치로 되돌린 후 욕실로 향했습니다. ]
세르펜스의 상세한 설명을 읽고 있자니, 슬슬 감질이 나서 못 참겠다.
챈들러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에 책을 꺼내, 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다는 내용이 이어질 게 뻔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세르펜스에게 설명 건너뛰기를 요구했다.
[ 그래서 그게 대체 뭐였는 데요? ] [ 머리카락이었습니다. ] [ 확실해요? 책을 읽다가 우연히 끼어들어 간 걸 수도 있잖아요. ] [ 그것 외에 책 사이에 끼워진 물건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발견된 건 곱슬기가 있는 붉은색의 긴 머리카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라투 가문의 일원 중, 그런 머리칼을 지닌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물결이 굽이치는 듯한 웨이브 진 붉은 머리카락.
[성검의 주인]에서 읽었던 공왕의 묘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챈들러의 연인이 공왕일 거라는 가정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이다.
‘머리카락도 나름대로 신체 일부니까, 그걸 가져온 거라면 마인 특유의 기운이 남아 있을 만도 하지.’
세르펜스쯤 되는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기운을 풍기던 것도.
옅은 신성력에도 정화되어 사라져 버린 것도.
그 물건이 고작 머리카락 한 올에 불과했다면, 전부 설명이 가능하다.
‘그 정도의 기운이라면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퍼트리지 않았어도, 자연적으로 흩어져서 사라졌으려나?’
어쩌면 챈들러의 방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공왕의 머리카락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서,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팔뚝을 문질렀다.
오돌토돌해진 살갗이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 그렇다는 건 챈들러 공자는 연인의 머리카락을 몰래 가져왔다는 뜻입니까? ]베일이 내가 내려놓은 펜을 집어 들어 글을 썼다.
챈들러가 그딴 걸 왜 가져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세르펜스의 손에 들린 펜을 뺏어 들고, 베일의 물음에 답변해 주었다.
[ 챈들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했잖아요. 그런데도 아직 세라투 자작의 애정을 갈구하는 걸 보면 보통 집착이 아닙니다.그런 관점에서 추측해 보자면. 신체 일부를 통해 현재 곁에 없는 상대방을 떠올리며, 안정을 느낀다거나. 대충 그런 게 아닐까요?
이유가 뭐든 간에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면 그냥 스토커에 불과하지만. ] [ 그런 게 정말 도움이 됩니까? ]
어느 틈에 아공간 주머니에서 펜을 하나 더 꺼내 든 세르펜스가 질문을 적었다.
어지간하면 세르펜스에게 쓸데없는 건 질문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진 않은데, 이번만은 예외였다.
[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어디까지나 집착의 산물이고,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명입니다. 그런 것에 의존하면 할수록 상태는 더 악화될 겁니다.세르펜스는 쓸데없는 질문할 시간에 가서 옷이나 갈아입으세요. ] [ 처음 접하는 이론이라 호기심이 동했을 뿐입니다. ] [ 누가 뭐래요? ] [ 그보다 영주성 수색에 관하여 고민하시는 것 같던데, 그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갑자기 세르펜스가 딴소리를 해댔다.
화제를 돌리기 위한 어쭙잖은 수작에 불과했으나, 그 내용만큼은 구미가 당겼다.
[ 얘기해 보세요. ] [ 제가 변장하고 성벽을 넘는 모습을 일부러 발각당하는 겁니다. ] [ 아하! 침입자가 밖으로 나갔으니, 더는 성을 뒤지고 다닐 필요 없다고 핑계를 대자는 거죠? ] [ 네, 맞습니다. 세라투 자작은 우리를 의심하겠지만,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가 먼저 방으로 돌아온다면, 곧 의심을 거두고 제삼자의 존재를 인정할 겁니다.그 대신 우리의 수색 속도가 늦은 점을 지적하겠지만. ]
세르펜스가 어중간한 부분에서 마침표를 찍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차마 베일의 앞에서 세라투 자작에게 덤터기 씌우자고 주장할 수 없어서, 나에게 떠넘긴 거다.
‘자꾸 이런 거 대신해 주면 버릇 나빠지는데···.’
나는 이번만 해 주겠다는 생각을 눈빛에 담아 세르펜스를 쏘아본 후, 글을 적었다.
[ 우리는 세라투 가문 사람들의 안전을 우선한 것뿐이며, 침입자가 갑자기 도망간 건 수색 범위가 갈수록 넓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 우기면 되는 거죠? 그리고 영주성 경비가 허술해서 침입자를 놓친 거 아니냐고 반박도 하고요. ]내 글을 읽은 세르펜스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놈의 순진펜스 가면은 대체 언제쯤 벗어던지려나 모르겠다.
[ 그럼 오늘 바로 계획을 진행할 겁니까? ] [ 아닙니다. 오늘은 달리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 [ 또 어딜 갔다 오려고요? ] [ 일행 중에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저뿐이지 않습니까? 다수의 마물을 부리는 마인과 전투를 하게 된다면, 정체가 들통날지도 모릅니다. ]외세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 임금을 반기는 나라는 없다. 자주권을 빼앗길지도 모르니까.
베일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밝혀져도 왈가왈부 말이 많을 텐데, 그 이전이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될 터다.
즉, 세르펜스는 그런 문제를 방지하고자 교단에 지원 요청을 하고 오겠다는 의미다.
[ 다른 영지까지 다녀오려면 갈 길이 먼데, 당장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우체국에 가서 에스토 령에 있는 신전으로 편지를 부칠 생각입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느냐는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느긋하게 답변했다.
우체국에 숨어들어, 에스토 령으로 보내지는 우편물 사이에 자신이 쓴 편지를 끼워 넣겠다는 얘기다.
[ 발상이 참.. 뛰어나시네요. ] [ 당신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 [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까, 저하도 알고 계세요. ]나는 세르펜스가 적은 글을 못 본 체하며, 가만히 있던 베일에게 명심하라는 글을 적었다.
우리가 나누는 필담을 멍하니 읽고 있던 베일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렉스 님께서는 언제까지 계실 생각이십니까?”
이 정도면 베일이 알아야 할 얘기는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세르펜스가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목소리는 까칠한 막내 신관님의 것인데, 표정은 온화한 대외펜스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진심이 담긴 것은 목소리였고, 표정은 연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베일은 그 두 개를 반대로 받아들였는지, 세르펜스에게 미소로 화답한 후 투구를 썼다.
“시간도 늦었으니,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베일의 인사에 세르펜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새 종이와 그렇지 않은 것을 잘 분류하여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은 의문이 생겼다.
‘그냥 연습장 같은 걸 쓰면 편할 텐데. 뭐 하러 번잡하게 낱장으로 된 서류용 종이를 쓰는 거지?’
* * *
나는 잘 자다 말고,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손길 때문에 부스스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명료해지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세르펜스의 얼굴이었다.
녀석은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댄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입을 막고 있었다.
‘일어나서 밥 먹으라고 깨운 건 아니겠지?’
나는 상황 파악을 끝냈다는 의미로,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제야 세르펜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나저나 우체국은 잘 다녀왔나?’
세르펜스가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라고 해서, 씻고 머리가 마르는 대로 잠자리에 든 탓에 녀석이 나가는 것도 못 봤다.
계속 누워만 있다간 다시 잠들 것 같아서,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서 세르펜스의 옷차림을 살폈다.
암살자 같은 복장이 아니라 흰 잠옷을 입고 있는 거로 보아 잘 나갔다 온 모양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녀석이 나를 깨운 이유가 뒤늦게 궁금해졌다.
그때 세르펜스가 타이밍 좋게 웬 종이를 건넸다.
내가 종이를 받아들자, 세르펜스는 글씨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은빛의 신성력 구체를 움직여 종이를 비췄다.
‘어쩐지, 암막 커튼을 쳤는데도 세르펜스의 이목구비가 다 보이더라.’
나는 싱거운 생각을 떠올리며, 작은 신성력 빛에 의존해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종이는 두 장이었는데 한 장은 세르펜스의 필체로 글이 적혀 있었고, 다른 한 장은 처음 보는 필체였다.
글을 처음 쓰는 아이들을 위한 따라 쓰기용 책에서 볼법한, 정직한 글자들이 줄도 없는 종이에 가지런히 쓰여 있었다.
반듯반듯 잘 쓴 글씨였으나, 쓰는 속도가 느린지 잉크가 번져 획이 두꺼운 게 조금 아쉽다.
내가 종이를 보며 읽을 생각은 안 하고 딴생각만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세르펜스가 처음 보는 글씨체가 적힌 종이를 톡톡 건드렸다.
그것 먼저 읽으라는 뜻이다.
[ 시종장이 제게 편지를 보여줬습니다.그 자리에서 바로 읽기를 강권하기에 읽고 났더니, 시종장이 다시 편지를 가져간 탓에 온전한 내용을 전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
도입부에서부터 과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거로 보아, 윈스톤이 세르펜스더러 읽으라고 쓴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윈스톤이 필기구를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다음 문장을 읽었다.
[ 그리고 이렇게 종이와 펜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놀라움을 전적으로 취소하는 바이다.
아무래도 세르펜스가 시종장이 2층에 올라온 기척을 느끼고, 윈스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종이에 적으라고 시켰던 모양이다.
[ 편지에는 에인젤 주교에 대한 험담이 주를 이뤘습니다.제가 성기사 단장이 되면 사실상 주교와 동급인 셈인데, 지금 같은 대우는 정당하지 않다는 내용이 첫 문단에 쓰여있던 거로 기억합니다.
신의 뜻을 지키고자 검을 든 성기사의 기를 누르려 한다는 걸 보면, 에인젤 주교의 신앙심이 의심스럽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
세라투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기도문을 외운 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신앙심을 의심받으니 매우 억울해졌다.
물론 내가 룩스메아를 숭배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에인젤 주교는 다르다. 꼰대 같긴 해도 신앙심만은 굳건하다는 설정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나를 이단으로 의심하는 것보다, 설정이 부정당하는 게 더 뼈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