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8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81화(481/1105)
481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9)
* * *
어젯밤 시종장이 예고했던 대로, 세라투 자작은 우리를 본성으로 불러들였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세라투 자작은 먼저 와 있었고, 나는 이번에도 그가 자리를 권하기 전에 앉으며 시비부터 걸었다.
“먼저 와 계셨네요? 저번에는 조사하느라 바빠서 지각하셨다길래, 오늘도 그러실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조사를 설렁설렁하셨나 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때 이후로 경비와 보고 체계를 정비해서, 저번보다 일찍 끝났을 뿐입니다.”
내 비아냥거림에도 세라투 자작은 평소처럼 느긋한 말투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묘하게 여유가 없어 보였다.
저번에 나타난 침입자는 자신의 지시로 움직인 사람이었기에 여유로울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입자가 나타난 것이니.
신경이 예민해질 만도 하다.
“그런데 저번이랑은 다르게, 오늘은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시네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교님의 안색도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세라투 자작이 자신의 상태에 관한 대답은 슥 피하고, 받았던 질문을 고스란히 나에게 돌려주었다.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귀족들이 말을 돌리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굳이 그 점을 지적해가며, 말꼬리를 잡을 필요는 없겠지?’
이제 세라투 자작과 기 싸움을 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시종장이 챈들러의 수족으로 추정되는 만큼. 연기를 계속하긴 해야겠지만,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가며 신경전을 벌일 필요는 없다.
“티가 많이 납니까?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워서, 밤잠을 설쳤더니···.”
“저런, 악몽이라도 꾸셨나 봅니다.”
내 말에 세라투 자작이 걱정하는 척했다.
악몽의 원인이 눈앞에서 저러는 걸 보니, 기분이 한층 더 저조해졌다.
‘이게 다 세라투 자작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잠든 탓이겠지.’
꿈속에서 세라투 자작은 피 칠갑 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상태로 내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소름이 다 끼쳤다.
옴짝달싹 못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를 악몽에서 건져낸 건, 같은 방을 쓰던 세르펜스였다.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보며, 울상 짓는 녀석을 달래느라 혼났다.
‘이래서 사람은 나쁜 생각을 하면 안 된다니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간밤에 꾸었던 꿈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침입자를 식자재 창고 부근에서 발견했다가 놓쳤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대체 어디쯤에서, 어쩌다가 놓친 겁니까?”
“보고에 따르자면, 침입자는 성벽을 넘어 밖으로 도망간 모양입니다.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이 성벽 뒤쪽으로 향했을 땐, 이미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라투 자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집안에 자신도 모르던 침입자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파졌나 보다.
“잠깐만요. 말이 좀 이상한데요? 성벽 뒤쪽으로 향하다니, 설마 출입구를 통해 빙 돌아가기라도 한 겁니까? 그러니까 놓치죠! 침입자가 성벽을 넘어서 도망갔으면, 똑같이 성벽을 넘어서 바로 쫓아가야지, 뭘 느긋하게 빙 돌아가고 있답니까?”
“성벽은 일반 가정집 담벼락처럼 쉽게 넘을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닙니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지르자, 세라투 자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세라투 자작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성벽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구조물이다. 아무나 쉽게 넘어 다닐 수 있다면, 지으나 마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꼰대 주교 에인젤이므로, 세라투 자작의 말을 부정하며 우겨보기로 했다.
“그래도 침입자는 넘었다면서요. 이단 심문관님은 어때요? 넘을 수 있어요, 없어요?”
“저는 넘을 수 있죠.”
“넘을 수 있다잖아요! 다 넘을 수 있네!”
나와 유지스의 대화에 세라투 자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왜 자꾸 속을 긁는 거냐고 따지고 싶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세라투 자작은 ‘무식한 너와는 다르게 나는 지식인이다.’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보통은 못 넘습니다. 더군다나 기사와 병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잖습니까?”
세르펜스에게 업힌 채로 성벽을 넘어보았던 사람으로서, 갑옷이 방해가 될 거란 생각은 못 했다.
그러고 보면 볼타 산맥의 결계가 깨지던 날, 성벽에 오를 때 윈스톤 혼자 정직하게 계단을 이용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갑옷 때문이었나?’
세라투 자작에게 갑옷을 입지 않은 기사들은 성벽을 넘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자칫 팀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묻지 않기로 했다.
“그딴 건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중요한 건 어쨌거나 침입자를 놓쳤다는 거잖아요? 아까 경비 체계를 정비했다더니, 한 게 고작 이겁니까?”
“그건 침입자의 실력이 뛰어나서···.”
“그래 봤자 우리 막내 신관님이 기척을 알아채고, 깃펜을 던져서 맞출 정도의 수준 아닙니까? 기사들 실력이 떨어진다는 걸 감추려고, 젤리 도둑 따위를 치켜세우지 마세요.”
“······.”
세라투 자작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내게 이런 소리를 듣는 게 분했는지, 의자 손잡이를 움켜쥔 세라투 자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세라투 자작을 흘깃 쳐다봐 준 후, 쯧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입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 원!”
“그러게나 말입니다. 침입자가 나타났을 때, 바로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렇게 따지면 침입자가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했어야죠. 휘하 기사들의 실력이 떨어지고, 경비가 허술하다는 진실을 외면하지 마세요. 그렇게 자신의 부족한 면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거, 영주님께서 꼰대라는 증거입니다.”
“······.”
속을 너무 긁어놨나 보다.
나를 바라보는 세라투 자작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저러다가 눈에서 빔이라도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빛이 무시무시하다.
“아무튼 침입자는 우리가 수색하는 영역이 넓어지니까, 이대로 가만히 숨어있다간 곧 들킬 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도망친 것 같습니다. 성의 경비만 좋았으면 토끼몰이도 가능했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놓쳐버리다니!”
“······.”
“아, 아니, 뭐···.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고, 앞으로 침입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죠.”
갈수록 더 무서워지는 세라투 자작의 눈빛에 쫄아서, 나도 모르게 말을 얼버무리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만약 꿈에 나왔던 피투성이 세라투 자작이 저런 눈빛까지 했다면, 놀라서 심장마비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감히 주교님께 저런 불경한 눈빛을 하다니···!”
“됐습니다, 막내 신관님. 영주님은 그냥 자존심이 상해서 저러시는 겁니다. 성안에 침입자가 들어와서 며칠이나 무전취식하다가 날름 도망가 버렸는데.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나는 적의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세르펜스를 붙잡아, 도로 자리에 앉혀놓고 달랬다.
녀석은 그 짧은 새에 살기라도 보냈는지, 세라투 자작의 낯빛이 새하얘졌다.
“크흠! 그건 그렇고. 하실 말씀은 이게 끝입니까?”
“그 치, 침입자가···, 처음 나타났던 식자재 창고 주변을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내 질문에 세라투 자작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항상 표정과 태도에서 느껴졌던 자신감이 사라져서, 한순간 세라투 자작이 아닌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거기에 말까지 더듬는 게, 어딘지 모르게 챈들러를 연상케 했다.
‘이 사람이 항상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건, 진짜 위협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였구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자신이라면 악숭 세력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실패하거나 좌절한 적도 없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 적 또한 없으니까.
그래서 이 세상을 우습게 생각하며, 모든 이를 자신의 발밑에 둘 수 있으리라 믿으며 살아온 걸 테다.
‘이제 보니 참, 별거 없는 사람이었네.’
그렇게 생각하니, 방금 쫄았던 게 괜히 무안해졌다.
이렇게 쉽게 꼬리를 말 거면서, 왜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봐서 겁을 주고 난리람?
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실 말이 더 없으신 듯하니,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세라투 자작의 대답은 일부러 듣지 않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막내 신관의 살기에 겁먹고 나에게 무시까지 당한 게, 어지간히도 자존심 상했나 보다.
‘결국 또 기 싸움한 꼴이 되어 버렸네?’
내 능력이 아니라 세르펜스라는 치트키를 사용해서 이긴 것 같아서, 아주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니, 세라투 자작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기쁜 것도 사실이다.
“그럼 식자재 창고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슬쩍 들뜨는 듯했던 기분이 시종장의 한 마디에 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있었다는 걸 잠시 잊었다.
‘시종장은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도대체 왜, 챈들러의 편에 서게 된 걸까?’
악숭 세력 관계자인 건지.
아니면 클로반보다 챈들러가 제대로 된 가주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줄타기하고 있을 뿐인 건지.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
‘공왕을 잡고 나면, 이 시종장의 뒤도 캐 봐야 하나?’
앞서 걷는 시종장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한참을 걷다 보니, 식자재 창고에 도착했다.
어젯밤 나타난 ‘침입자’는 내 곁에 서 있지만, 이미 성 밖으로 도망쳤다고 알려졌기 때문인지 창고 주변을 지키는 병사는 얼마 없었다.
그리고 건물 내부 조사도 진작에 끝났을 테니, 우리가 오기 전까지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세워 둔 것뿐이리라.
“아! 주교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병사가 나를 발견하곤 한달음에 달려왔다.
병사들의 투구는 기사와 다르게 안면을 가리지 않고 머리만 덮는 형태였는데, 그 덕분에 반가움 가득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날 언제 봤다고 반가워하나, 룩스메아의 열렬한 신자라도 되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는데 가만 보니 다른 병사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찰나.
나를 반겨주었던 병사가 별안간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창고에 숨어있던 자가 악마 숭배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사 때문에 창고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저, 괜찮은 겁니까?”
“아···.”
어째서 병사들이 나를 반겼는지 이해가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악숭 세력은 미지의 공포 그 자체다. 그런 자가 자기 근처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러던 와중에 룩스메아 교단의 주교인 내가 짠하고 나타났으니. 반길 수밖에.
‘이번 작전에 이런 부작용이 있었을 줄이야···.’
앞으로는 조심해서 작전을 짜야 할 것 같다.
“그 탄식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진정하세요, 병사님께 수상한 기운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저, 정말입니까? 진짜로 괜찮은 거 맞죠?”
“원래 악마 숭배 세력은 잠입처럼 은밀한 일을 할 때, 흑마력 보유자를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신성력이 있는 사람에게 쉽게 감지되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귀찮으니 저리 가라는 뜻으로 훠이훠이 손을 흔들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신성력도 쓸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억지로 병사를 떨어뜨리고 식자재 창고로 들어가려는 데, 어째서인지 창고 문을 윈스톤이 열고 있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악마 숭배자가 머물던 장소는 좀···. 주교님과 같이 들어가면 안전하겠지만, 괜히 부정 탈 것 같고 그래서···, 하하하.”
시종장이 어느샌가 멀찍이 떨어져서,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안 나왔다.
‘그래도 저 모습을 보면, 악숭이는 아닌 모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