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8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82화(482/1105)
482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10)
당연한 얘기겠지만, 식자재 창고에는 식자재밖에 없었다. 수상한 물건이나 흔적은 눈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전을 식자재 창고에서 보내고. 오후에는 병사의 안내를 받아, 침입자의 도주 경로를 따라 이동하며 조사했다.
어젯밤 세르펜스가 그냥 땅만 밟고 다녔으면 좀 더 빨리 끝났을 텐데.
건물 지붕을 밟고 뛰어다닌 탓에 건물을 들락날락,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네 시간이나 걸렸다.
‘정작 세르펜스가 어젯밤 나갔다 온 시간은 고작 십여 분 남짓이었는데···.’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조사하는 시늉이라도 내야지.
어쩔 수 없이 성벽 구석구석까지 살펴보고 난 뒤.
우리는 별관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잠깐 정원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꽃이 만발한 정원 한가운데.
적당한 잔디밭이 보이자, 세르펜스가 가방에서 피크닉 매트를 꺼내어 그 위에 펼쳤다.
나는 신발을 벗고 피크닉 매트에 올라가, 두 다리를 쭉 뻗어 편하게 앉으며 유지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단 심문관님. 뭐 알아낸 거 있습니까? 이런 건 이단 심문관 전공이잖아요.”
“알아낸 거라 해도 별건 없답니다.”
유지스가 피크닉 매트 끝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내 질문도, 유지스의 답변도. 그냥 설정 놀이의 연장이었다.
그도 그러할 게 지긋지긋한 시종장이 아직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자재 창고에 들어가는 건 부정 탈 것 같다며 꺼렸으면서. 시종장은 조사가 끝나고 안전이 확보되자마자, 웃는 낯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여간 뻔뻔한 놈이다.
괜히 시종장을 째려봤다가 남 앞이라고 말을 아낀다는 인상을 줄까 봐, 나는 유지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뭐라도 괜찮으니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지붕에 올라갔던 거 기억하시죠?”
유지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못 할 수가 없다. 그녀가 지붕에 올라갔을 때가, 유일하게 앉아서 쉴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오래돼서 자연적으로 깨진 기왓장은 몇몇 보였지만, 인위적으로 강한 힘을 주어서 깨진 건 단 하나도 없었답니다. 건물 간 거리가 가까운 경우는 그렇다 쳐도, 그 거리가 넓거나 높낮이 차가 상당한 경우에도 말이죠.”
“그 말인즉, 침입자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얘기죠? 도움닫기나 착지를 하면서도 체중 분산을 완벽하게 해낼 만큼?”
“맞아요. 오전에 영주님이 말씀하셨던 내용을 단순한 변명으로 치부해서 좋을 수준이 아니란 뜻이죠. 또한, 쫓기고 있으니 흔적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체중을 분산하며 뛰거나 걷는 게, 습관 수준으로 몸에 익은 것 같아요.”
유지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세르펜스의 직업 적성에 대한 걱정이 다시금 떠올랐다.
진지한 주제로 고민하자,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얼굴 근육이 굳어졌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세르펜스는 암살자보다는 공작이 더 잘 어울리지.’
세르펜스는 마음이 여려서, 암살자 같은 무서운 직종을 업으로 삼는다면 스트레스로 골병을 얻게 될 게 분명하다.
가리고 다니기에 얼굴이 아깝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침입자가 막내 신관님이 던진 깃펜에 맞은 건, 방심해서 그런 거였나···.”
“안내를 해 주신 병사님이 착각해서, 우리를 다른 건물로 안내한 게 아니라면 그렇다고 봐야겠죠.”
“혹은 젤리를 훔쳐먹을 정도로 배가 고파서 집중력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였다거나?”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네요.”
“아! 그래도 몸을 내빼는 솜씨에 비해, 은신 실력은 다소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도망치는 모습을 들켰으니.”
“어쩌면 일부러 모습을 드러낸 걸지도 모르죠. 추격자들을 뿌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말이에요.”
유지스가 내 혼잣말에 일일이 맞장구치며 호응해 주었다.
그렇게 유지스와 주거니 받거니, 설정을 쌓아가며 놀고 있는 그때.
“에인젤 주교님? 이런 곳에서 뵙네요.”
르웰이 정원에 나타났다.
우리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일부러 만나러 온 건 아니고 우연히 마주친 것 같다.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 알았다면, 챈들러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미리 적어놓을걸···.’
쪽지를 몰래 건네는 것쯤은 세르펜스나 유지스에게 맡기면 그만이니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뻗고 있던 다리를 접고 르웰에게 피크닉 매트에 앉을 것을 권했다.
“바쁜 일 없으시면, 앉아서 대화나 하다 가실래요?”
“저야 영광이죠.”
르웰이 흔쾌히 대답하며, 드레스 자락을 잘 정돈하여 피크닉 매트 위에 앉았다.
드레스 안에 패티 코트라도 받쳐 입었는지, 풍성한 치마폭이 자리를 많이도 차지했다.
그래도 피크닉 매트에 앉아 있던 나와 세르펜스, 유지스, 에드나. 우리 네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앉으니,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셋째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당연히 산책하러 나왔지요.”
“그런 게 아니라, 어젯밤에 침입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잖습니까? 오늘 같은 날은 그냥 방에만 있는 게 안전할 텐데요?”
내 질문에 르웰이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며 후후후하고 웃었다.
어딘가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다.
그 웃음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르웰이 부채를 착 소리 나게 접으며 입을 열었다.
“침입자가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밖으로 나간 것인데 어째서 조심을 해야 하나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아침에 보았던 영주님의 날 선 태도를 마주하고, 병사들이 긴장한 채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봤더니. 제가 잠깐 헷갈렸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제 눈에도 지금 성내 분위기가 어수선해 보이긴 해요.”
르웰이 접은 부채 끝으로 자신의 턱을 톡톡,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다가, 돌연 부채를 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하죠?”
“뭐가요?”
“침입자가 처음 나타났을 땐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잖아요. 하물며 영주성 내에 침입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에요.”
르웰이 영악(靈惡)하게 웃으며 내숭을 떨었다.
지금 르웰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알 것 같다.
‘처음 나타난 침입자는 세라투 자작의 하수인이고, 이번에 나타난 침입자는 다른 사람이라는 정보를 주고 싶은 거겠지.’
그 친절은 고맙지만, 침입자에 관해서라면 르웰보다 우리가 더 많이 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젯밤 나타난 침입자는 지금 내 옆에 앉아 있으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영주님은 같은 일을 두 번이나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인가 봅니다. 계속 여유롭게 쳐 웃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에잉, 쯧쯧!”
“아버지를 두고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쳐 웃는다는 내 표현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르웰은 촤르륵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고 깔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그러다가 얼굴에 열이 올라, 펼친 부채로 부채질까지 했다.
별로 재밌는 말도 아니었건만. 저렇게까지 자지러지게 웃는 걸 보면, 그동안의 삶이 많이 팍팍하고 건조했는가 보다.
‘아니면 세라투 자작 때문에 압박감이 심했거나.’
세라투 자작이 르웰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았을 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거래할 수 있는 수준만을 요구했겠지.
그러나 아이에게 부모란, 그 존재만으로도 큰 영향력을 끼치는 법이다.
하물며 세라투 자작은 르웰의 형제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한 아동 학대범이자, 성안의 권력을 틀어쥔 독재자였다.
그런 대상을 우스갯거리로 취급했으니, 그녀가 저리도 유쾌해 할 만도 하다.
“그나저나 여러분은 여기에서 뭘 하고 계셨나요?”
이제야 웃음이 가라앉았는지, 르웰이 부채를 접으며 질문했다.
“바로 별장에 들어가기는 답답해서 적당히 앉아 쉬고 있었죠, 뭐. 어젯밤 침입자가 움직인 경로를 따라 조사를 했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지 뭡니까?”
“세상에! 아무것도요?”
“예, 그렇다니까요? 건물 지붕을 뛰어다녔다는데, 정작 지붕에는 그 흔적조차 없고.”
“그 정도인가요? 목격자가 없었다면, 침입자가 나타난 줄도 모를 뻔했네요.”
르웰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어제 나타난 침입자가 세라투 자작이 지어낸, 허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성 안에 들키면 안 될 물건이 있어서, 우리의 수색을 중단하게 하려고 꾸민 거라던가 하는 레퍼토리로 말이다.
사실은 우리가 수색을 그만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지만,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정정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긴. 막내 신관님이 전문 암살자보다 훨씬 민첩한 움직임으로 건물 지붕과 나무를 오가며, 성벽까지 뛰어넘을 줄. 그 누가 알겠어?’
저 자리에 ‘막내 신관님’이 아니라, ‘제국의 공작님’을 넣어놔도 부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르웰이 저런 오해를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러한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르웰도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참. 아침에 보니, 영주님 기분이 매우 나빠 보이시던데. 지금도 그럽니까?”
침입자에 관한 얘기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글쎄요? 점심 식사 때 이후 마주친 적이 없어서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고 좋을 것 같지는 않네요.”
“침입자가 경비를 따돌리고 유유히 성을 빠져나간 게, 그렇게나 자존심 상하셨나?”
“그런가 봐요. 그 탓에 삼일 뒤, 옆 영지에서 열리는 연회에도 불참하게 되었지 뭔가요? 아버지께서 위험하니까, 당분간은 성 밖으로 나가지 말래요.”
한숨을 내쉬며 푸념을 늘어놓는 르웰의 모습이 마치, 친구들이랑 노는데 통금 때문에 혼자 2차를 못 가고 먼저 돌아왔다고 툴툴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르웰은 기말고사가 끝난 대학생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의 르웰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주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사교활동을 통해 인맥을 넓히는 건,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우리가 르웰을 만나려면 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르웰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리 해석한다면 르웰이 불만스러워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렇게 속으로 르웰의 의도를 분석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유지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챈들러 님께서는 한창 연애 중이잖아요. 나가지 말라는 얘기에도 반항하지 않으셨나요?”
르웰보다 먼저 챈들러의 이름을 거론했지만, 이 정도면 남이 보기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질문한 것처럼 보일 거다.
특히나 성직자들은 연애할 수 없으니,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을 만도 하다.
“외출 금지를 당한 건, 저와 작은 오라버니 뿐이에요.”
르웰도 유지스의 질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대답했다.
물론 그 내용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외출 금지령을 내린 이유가 ‘위험해서’였으니, 이는 명백한 차별이었다.
“영주님은 첫째님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대요?”
“그래도 큰 오라버니는 기뻐하는 것 같더라고요. 예전 같았으면 서운해했을 텐데, 이런 걸 두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 물음에 르웰이 어정쩡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저런 웃음을 짓는 것인지 모르겠다.
‘전에 챈들러에 대해 무언가 부정적인 얘기를 하려다 말길래, 내심 꺼리는 건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다.
차라리 싫어하면 나았을 텐데 말이다.